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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믄 Oct 13. 2021

어머니 나를 낳으시고, 죽음 나를 기르시니

네 살 쯤인가, 우리 집 앞엔 돌계단이 있었다. 계단 위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 했던 것 같다. 매끄럽고 동그란 돌멩이를 찾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든, 아무 나뭇가지나 주워 들곤 땅바닥에 낙서를 했든.. 어쨌든 그 위에서 시간을 보내던 나는 데구르르르 굴러 계단 밑으로 떨어졌는데, 제대로 떠오르는 것 하나 없는 기억 속에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만은 선명하다. '나 이대로 죽는 거구나'


이게 내가 기억하는 죽음에 가까운 첫 번째 경험이었다.


잘 잊어버리고, 모든 걸 대체로 긍정하며, 모든 걸 그런대로 이해하고, 오직 오늘만 생각하는 삶을 살다 보면 그 성격의 근원에 대해 묻는 사람이 많아진다. 가정환경 때문일까? 집안 내력일까? 풍파 없는 삶을 살아서인가? 100번 질문에 120번 정도 고민해도 답이 없었다. "원래 이렇게 태어났어요!"


지난주, 또 한 번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쉐어하우스에서는 종종 섭외를 받아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곤 하는데, 그날도 그랬다. 1시 반부터는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모습을 담고, 5시부터는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찍는다고 했다. 그럼 그 사이에 일 때문에 미뤄둔 병원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병원까지 가는 길에 유독 날이 좋아서 사진도 열심히 찍고, 인스타그램에 셀카도 업데이트하고, 하여간 떨 수 있는 유난은 다 떨며 갔는데, 이런 것까지 유난을 떨 줄은 몰랐다.


평소와 똑같이 진료를 받고, 의사 선생님과 진료 상담을 했다. 상담이 마무리될 쯤이면 선생님은 항상 한 마디씩 덧붙였다. "유산균을 꾸준히 먹는 게 좋아요. 나갈 때 하나 구매하면 좋겠네요." 라던지, "자궁경부암 백신 아직 안 맞았으면 오늘 맞고 가는 거 어때요?" 라던지. 그날은 백신 쪽이었고, 이마저 긍정해버린 나는 어느새 왼쪽 팔을 걷어붙인 채 주사를 맞고 있었다. 간호사 선생님은 재빠르게 주사를 놓곤, 내가 알아야 할 사실 4개 정도를 노련하게 전달하며 15분으로 설정된 스톱워치를 건네주었다.


대기실에 앉아 멍하니 스톱워치를 바라봤다. 숫자가 10으로 바뀌자 느낌이 이상했다. 엄청나게 생경한데, 분명 느껴본  있는  어지러움이었다.   돌계단에서 데구르르르 구르던 , 엉덩이에 주사를 맞고 피를 줄줄 흘리던 , 다래끼를 짼다고 국소마취를 했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던 ... 벌떡 일어나 프론트로 향했다. 여기서 조금  지체되면 바로 땅바닥행이라는  경험적으로 알았다. ", 현기증이 나는데요..."


생각해보면 나에겐 죽음에 가까운 경험이 많았다.


나는 아무리 해도 미래를 떠올릴 수 없었다. 학교 다닐 때 제일 싫어했던 질문이 나중에 뭘 하고 싶냐는 거였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그냥 하고 싶은 거 하고 싶었고, 누가 벌써부터 그런 걸 명확히 알겠냐며 위로하려 드는 사람들이 싫었다. 한 달 전 헤어진 남자친구도 그렇게 말했었다. "정말 결혼하고 싶은 거 맞아? 너랑은 미래가 그려지지 않아."


나는 아무리 해도 미래를 떠올릴 수 없다. 알러지내과에서 세 가지 마취제에 알러지가 있다고 했다. 결과지를 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 세 가지 약물을 검색했다. 케타민은 환각을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어서 마약으로 종종 쓰인다는 글이 적혀있었다. 재수 없으면 마약 하다가도 뒤질 수도 있겠구나.


나는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고, 그냥 하고 싶은 걸 한다. 어차피 다 죽을 거 되는대로 살자는 게 아니라, 어차피 죽을 거라면 최선을 다해 내가 할 일을 하고 싶다. 일이 언젠가 끝난다는 건 그 순간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 3주만 참으면 꼭 인원 충원해주겠다는 말이, 1년만 더 기다리면 내채공 만기가 다가온다는 사실이, 내일 당장 이름도 못 외우는 무슨무슨 약물에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를 구성하는 힘이 된다.


"우리 엄마가 나를 낳았지만, 죽음이 나를 만들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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