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적 관념론이 아니고, 3인칭 지각 이론이다 - (2)
[0]
저번 편에서 이야기한 것을 요약 정리하도록 하자.
우리가 버클리 하면 으레 떠올리는 명제가 있다고 했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 그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는 지각 가능한 것만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버클리 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지각이 허용되는 범주들을 정해놓은 가능성 위에서 '지각'이 되는 것이 된다.
이때 '지각'이란 대상에 적당히 속할 수 있을 만한 어떤 속성들로 이루어진 집합을 구성하는 능력이다.
여기까지가 저번 편의 요약이다.
[1]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러한 버클리적 지각을 1인칭 시점에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일까? (저번 편의 마무리는 이것에 대한 의문으로 끝맺혔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각을 속성들의 집합 구성 능력이라고 보았을 때, 만약 지각이 1인칭, 즉 주관적인 것이 되어버리면 집합의 요소들이 매우 자의적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예시를 보면 한결 명확해진다.
예) 1인칭 시점: 내 눈앞의 컴퓨터 모니터는 빛, 전기, 화면, '모니터 사용 중'으로 구성된다.
=> 이때 1인칭 시점은 '자기가 본 것을 확신할 수 없으므로' 가령 빛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더 지각을 해야 한다.
즉, "빛은 x, y, z로 구성된다."
이때 1인칭 시점은 여전히 자기가 본 것을 확신할 수 없으므로 x, y, z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또 다시 한 번 더 지각을 해야 한다.
=> 즉, 무한퇴행이 발생한다.
반면 3인칭 시점에서는, 이미 지각(집합)된 속성들이 객관성을 갖고 있으므로, 가령 빛, 전기 등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집합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버클리의 '지각'은 철저히 3인칭이어야 하고, 그런즉 절대로 "주관적"이라는 말로 형용될 수 없다.
[2]
이제 버클리 철학에 대한 '근본 없는 입문서'를 마치도록 하자.
지각이 허용되는 범주들을 정해놓은 가능성(지각장) 속에 들어와 있을 때만 대상은 존재한다. 그 외에 대상이 존재하는 방식은 따로 주어져 있지 않다.
이 말은 곧, 객관적 속성으로 지각 가능한 것들이 여러 조합으로 집합 가능한 방식으로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버클리에 따르면 대상은 그 자체로 실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증되는 속성들의 집합으로 지각되는 한에서, 즉 객관적 속성들의 지각장 속에서는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굳이 버클리를 이렇게 봐야 하는가?
다름 아니라 버클리 철학이 대부분 오독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문 철학자들 사이에서조차!
이해하기가 어려운 철학자는 일단 단순화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내가 버클리 시리즈를 연재한 것이다.
버클리의 말대로, 일단 존재는 지각(장)이 선제되어야만 (그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의적인 지각장 속에서는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집합>을 학교 다닐 적에 다른 시간이 아니라 '수학' 시간에 배웠다는 것을 상기해보라! 그렇다면 왜 내가 집합이라는 교개념을 거쳐서 버클리의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설명하려고 한 것인지 나름대로 납득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