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봄
온종일 비가 내렸다. 그 바람에 환초의 주 업무인 활주로 공사는 진행하지 못했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동영은 동굴 안 제자리에 와 누웠다. 굴 안은 비가 와서인지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곳곳에서 장작을 때 밝기와 온기는 있었지만, 그는 오한을 느꼈다. 으스스 떨리는 게 몸살이 오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꿈에 그의 고향 강진 땅이 눈앞에 펼쳐졌다. 동영은 백련사 앞마당 배롱나무 아래서 동무들과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동영과 언년이 한패, 칠구와 명자가 한패를 먹었다. 넷은 각자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공깃돌을 주워다 커다란 원을 그린 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원에 붙여 반원을 그려 자신의 땅을 구축했다. 구축한 땅 위에다 돌을 올려놓고 영토 확장에 나섰다. 동영은 자기 차례가 오자 엄지를 검지에 대고 힘을 줘 돌을 튕겨냈다. 두 번을 뻗어나갔다 세 번째는 자기 땅으로 들어와야 확장한 땅을 온전히 확보할 수 있다. 반원 안에 들어오지 못하거나 금에 닿아도 실패한다. 돌을 길고 멀리 튕길수록 보다 많은 땅을 얻을 수 있다. 그만큼 실패 확률도 높다. 힘 조절과 상황 판단 능력이 요구되는 고도의 수 싸움이었다. 백련사 주지 일연은 대웅전을 지나다 아이들이 노는 광경을 지켜봤다. 그러다 실패를 거듭하던 동영에게 다가가 훈수를 뒀다.
“아가, 너는 어찌 그리 욕심을 부리느냐.”
“빨리 땅을 얻고 싶어서요.”
“그 성급하고 조급한 마음이 너와 네 편을 패배로 몰아가고 있지 않느냐.”
“하지만, 스님. 저흰 이미 너무 많은 땅을 빼앗겼어요.”
“왜놈에게 모든 땅을 빼앗긴 우리를 생각해 보거라. 포기하지 않고 하나씩 찾아오면 되는 거다. 그것이 진정한 싸움이지.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린 거란다. 많은 땅을 내주긴 했지만, 아직 남은 땅이 있잖으냐. 차근차근 그 땅부터 가져와 보거라.”
“알겠습니다, 스님.”
동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연에게 길게 합장했다. 나머지 아이들도 엉겁결에 일어나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자, 다시 시작하자. 누구 차례야?”
자신감을 얻은 동영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공깃돌을 주워 들고 옹기종기 모여 다시 놀이에 집중했다. 아무리 불리해도 큰 소리를 내거나 다투지 않았다.
일연은 빙긋이 웃으며 아이들 옆을 지나 암자 방향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산자락에서 내려오는 봄바람에 일연의 승복을 가볍게 흔들렸다. 대웅전 처마에 달린 풍경도 뎅그렁, 뎅그렁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동백꽃은 백련사 주위를 둘러싼 숲을 온통 붉은 빛깔로 물 들여갔다. 마치 땅따먹기 놀이처럼. 백련사 동백은 이른 봄에 핀다고 해서 ‘춘백(春栢)’이라고도 불렀다. 아직 눈이 다 녹지 않은 강진의 봄은 서늘하게 다가왔다. 주지 일연의 체포됐다는 소식이 들린 건 춘백의 시간이 정점에 달했을 무렵이었다. 일연은 독립운동 자금책 역할을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백련사는 물론, 강진 땅 전체가 술렁거렸다. 그때, 동영은 땅따먹기를 함께했던 아이들과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물에 걸려 팔딱거리는 송사리와 모래무지를 표주박에 담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허리춤에 긴 칼을 찬 일본 순사 둘이 일연을 포승줄로 묶고 끌고 가는 모습이 동영과 아이들 눈에 들어왔다. 동영은 눈이 커다래졌다. 무슨 해코지를 할 줄 몰라 다들 어쩔 줄 몰라 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손에 든 물고기 통을 놓칠 뻔했다. 순간, 일연은 동영에게 입 모양으로 ‘쉿! 조용히’ 신호를 보냈다. 아이들을 쓱 보던 순사들은 일연의 포승줄을 잡아당기며 길을 재촉했다. 아이들은 백련사 일주문을 빠져 나간 일연과 순사들이 주재소에 도착할 때까지 제자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저녁놀이 희미하게 드러났고, 동백꽃은 한두 송이씩 후드득 떨어졌다.
일연이 잡혀간 뒤로 백련사는 암담했다. 주지를 잃은 사찰은 삭막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적막했다. 상좌와 법사, 거사, 행자 등이 법회를 이어가긴 했지만, 주지를 잃은 절은 평소와 달리 낯설었다. 일경(日警)의 눈을 의식한 듯 신도들의 왕래가 부쩍 줄었다. 시주도 줄었다. 공양주가 어두운 낯빛으로 도감(都監)인 주연을 찾았다.
“스님, 공양간이 비어 갑니다.”
“으음.”
주연은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곤 공양주를 따라가 공양간 안을 확인했다.
“며칠이나 버틸 수 있겠나?”
“닷새나 될까요….”
공양주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자, 주연은 다시 한번 긴 숨을 내쉬며 저 멀리 강진만을 바라봤다. 강진만 어귀에 자리 잡은 주재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무관세음보살.”
주연은 일연이 무사하길 바라며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대웅전으로 향한 주연은 108배를 시작했고, 공양주는 쌀독을 열어 콩과 쌀을 한 되씩 담아 밥을 짓기 시작했다. 솥은 넓디넓었지만, 내용물은 보잘것없이 적어 초라해 보였다. 그마저도 닷새만 지나면 바닥을 드러낼 것이었다.
그날 밤이었다. 사내 서넛이 도둑고양이처럼 백련사 공양간을 들락거렸다. 발소리도 내지 않으며 민첩하게 움직였다. 사찰 승려든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새벽 아침밥을 하러 나온 공양주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꿈인 줄만 알았다. 휑했던 공양간 한쪽에 쌀이며, 음식이며, 승복이며, 서적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해포는 족히 먹고 쓰고도 남을 양이었다.
“아니, 누가 이렇게 시주를 많이 했을꼬. 나무관세음보살.”
공양주는 대웅전에서 염불을 외우려던 주연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 주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석가모니불을 올려다봤다. 그리곤 눈을 지그시 감고, 염주 알을 하나씩 굴리며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벌건 아침 해가 강진만에서 떠올랐다. 햇살이 백련사 대웅전에 스며들었다. 빛에 반사된 금색 불상들이 반짝거렸다. 주연의 불경 소리가 법당 안을 가득 채웠고, 의식주로 가득 채워진 공양간 굴뚝에선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주연은 간밤에 공양간을 다녀간 치들이 끌려간 일연과 관계된 자들일 거라고 짐작했다.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항간에는 강진 출신 김찬일이 배후일 거란 소문이 돌았다. 그 말고는 백련사에 그 많은 시주를 할 만한 사람이 없을 거라고 수군거렸다. 김찬일은 일찍이 대한독립에 뜻을 품고 독립군에 투신했는데, 그는 김선재의 아들이자 동영의 아버지였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소총을 멘 일본군들이 털털거리는 군용 차량 세 대를 몰고 강진 읍내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사지 멀쩡한 남성들만 골라 태웠다. 서너 살 먹은 어린애부터 칠순노인까지 가리지 않았다. 걸을 수 있으면 다 끌어다 실었다. 그 안에는 선재와 동영도 있었다. 한 동네에서만 서른 명 넘게 붙잡혔다. 반항하는 자들은 개머리판과 군홧발에 맞았고, 도망가는 자들은 총에 맞아 죽었다. 그들은 이유도 모른 채, 갑작스럽게, 개돼지처럼 끌려갔다. 그들은 다음 날 강진만 하구에 정박해 있던 배에 실려 떠났다. 배 안에는 다른 지역에서 징집된 이들이 백여 명이 넘었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며칠 밤낮 바다를 가로질러 섬에 닿았는데, 그곳이 바로 ‘밀리환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