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에세이 #2 코코샤넬의 초상
경력 10년 차, 커리어우먼, 미혼
세 가지 조건이 만나면 회사에서 나름 인정받는 슈퍼우먼이 될 수 있다. 여자 남자 가려 말하고 싶진 않지만 보통 결혼한 이후 경력 단절의 리스크는 여자가 훨씬 많이 질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니, 쉼 없이 10년 내리 달려온 J는 새삼 스스로를 칭찬한다.
"고생했어!"
첫 입사 시점만 해도 이렇게까지 커리어가 인생에 중요한 포션을 차지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20대 중반의 J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도 낳으면서 평범한 인생을 당연히 살 것으로 생각했었다. 해외 파견을 신청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마음속 깊은 곳에 해외 근무에 대한 로망이 있어 온 J였기 때문에 2년 정도의 해외 생활이 커리어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인생 전체의 방향성을 바꿀 만큼 영향력이 크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대단한 착각이었지만..
올해 해외 생활 8년 차로 접어든 J는 오늘도 회사에서 고생한 스스로를 위로하며 부드러운 와인과 감미로운 재즈로 지친 마음을 다스린다. 오롯이 혼자만을 위한 이 시간과 공간이 J는 너무 좋다. 신입 때와는 다르게 경력이 길어질수록 회사에 투입하는 에너지와 리소스가 커질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한 사람이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이 일정하다고 한다면, 과거에 비해 그 에너지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일을 하며 쏟아붓다 보니, 개인적인 시간은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하는데 시간을 주로 할애하게 되는 것 같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에너지를 투입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요새는 그 마저도 쉽사리 지치는 J이다.
회사에서 몇 안 되는 여자 관리직에 심지어 나이도 상대적으로 어린 편에 속하다 보니 남자들이 대부분인 리더 집단에서 내 나름의 목소리를 내기까지 지독히도 악착같이 버텨왔다.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고 다독이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조직에서 인정받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마음 한 켠에 섭섭함과 서운함이 가득하다.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킨 후 J는 얼마 전 분카무라에서 본 마리 로랑생 전에서 구매한 파스텔톤의 그림엽서를 집어든다.
한 여인이 의자에 앉아있다. 푸른빛 파스텔톤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오묘하다. 슬퍼 보이지만 우울해 보이진 않고 외로워 보이지만 고독해 보이진 않는 그런 표정이다. 무언가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골똘히 고민하고 있는 걸까? 그녀가 안고 있는 강아지와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는 참새만이 그녀를 유일하게 위로해 주고 있는 듯하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생각에 잠기게 하였을까?
초상화의 주인공은 모든 여성들의 로망, 코코샤넬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당당한 커리어우먼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인지 코코샤넬은 이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했다고 한다.
J는 코코샤넬의 초상화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닮은듯하다. 회사에서는 항상 자신감 있는 표정과 똑 부러지는 말투로 어떤 상황에서든 당당함을 잃지 않고자 노력하는 J이지만, 천성은 그렇지 않다. 회사에선 "그럴 수도 있지"가 통하지 않는 조직이다 보니, 내가 하고 있는 업무가 옳다는 것을, 맞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과정 자체가 J에게는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스스로의 행동을 컨트롤하면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동시에 핸들링 함과 동시에, 부하직원들에게는 명확하게 지시사항을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상사에게는 프로젝트를 통과시키기 위해 때로는 논리로 설득하고, 경우에 따라서 감정으로 호소하기도 하면서 우리 조직이 하고 있는 일이 "맞다는 것"을 주구장창 구두로 페이퍼로 설득하는 작업들이 이젠 도가 텄다. 그렇게 회사에서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아붓다 보니, 퇴근 후 집에 오면 그야말로 방전. 방전된 상황에서도 머릿속으로는 내일 해야 할 회사일, 내 맘대로 따라 주지 않는 직원들, 인내력을 요하는 상사의 지시들을 복기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한다.
지금과 같이 퇴근 후 와인 한잔 마시며, 오늘 하루를 돌아보는 이 시간이 J 가 가장 행복해하는 시간이기도 한 이유는 그 누구의 방해 없이 오롯이 솔직한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보며 때로는 앞으로의 미래를 그리기도 하며 사색에 잠기는 이 순간이 혹자에게는 고독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진짜 나와 만나고 있는 소중한 시간인 것이다. 굳이 남들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의 시간처럼 말이다.
마리로랑생이 그린 코코샤넬은 어쩌면 제삼자는 알지 못하는, 코코샤넬만이 알고 있는 가장 솔직한 그녀의 모습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자신의 비밀을 들킨 것 같이 정곡이 찔린 기분이었는지, 이 초상화는 내가 아니라며 거절한 코코샤넬의 태도를 보면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당했나 보다.
1900년대 활동한 프랑스 여류작가였던 마리로랑생. 피카소와도 인연이 있던 그녀는 당대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세탁선을 드나드는 유일한 여자 화가였다. 20세기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주류 작가들 대부분이 남자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녀의 존재감은 상당했을 것이다. J는 자신과 같이 남자들이 주류인 집단에서 고군분투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한 그녀야말로 슈퍼우먼이 아니었을까? J는 마치 100년 전 커리어 멘토를 만난 것 같은 기분에 젖어 위안도 받고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하루의 끝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