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stina lente. 천천히 서둘러라. 카이사르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가 한 말이다. 모든 일에 성급하지 말고, 신중하되, 늘어지지 말라는 뜻이다. 앞서 언급한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Alea iacta est, 죽음을 기억하라는 Memento mory와 더불어 내 왼쪽 팔에 타투로 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아우구스투스는 열여덟에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주변의 걱정이 많았다. 전부 기우였다. 놀라울 정도의 평정심을 발휘했다. 끝내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렸다. 벽돌로 지어진 로마를 발견해 대리석으로 도배된 로마를 남겼다. 천천히 서두른 결과다.
나는 이른바 소년급제를 했다. 이른 나이에 의원이 되었다. 중년이혼, 노년무전과 더불어 인생의 삼대 악재라고 한다. 운명을 바꿀 것이다. 악재를 호재로 바꿀 것이다. 나의 능력을 맹신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겸손을 잃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서두를 뿐이다.
우선 정당이라는 공간에서, 천천히 서두르고 있다. 고교 자퇴, 병원 입원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개와 늑대의 시간이었다. 한국에서 자유의지로 당원이 된다는 것.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는 일이다. 정치혐오보다 정당혐오가 뿌리 깊은 토양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 노을 지는 시간.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입당원서를 제출했다. 내용을 정성껏 채우고, 교무실 팩스를 몰래 이용했다. 석 달 후면 고교 졸업식이었다. 가수 윤종신이 부른 오래전 그날의 첫 가사처럼, 교복을 벗고 처음으로 만난 연인과 같았다.
당명은 새정치민주연합이었다. 기대와 달리, 당명과 달리 새정치가 없고, 민주가 없고, 연합이 없다는 냉소가 만연했다. 뭐라도 해야 했다. 대학생위원회 워크숍에 쭈뼛거리며 참석했다. 현수막 걸고, 생수통 나르고, 선거캠프 바닥 청소부터 했다. 열혈 평당원이었다.
나는 왜 이 정당을 선택했나. 서구와는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이 당이 이 땅에 뿌리 내릴 수 있는 진보적 가치를 믿었다. 수권정당의 길이었다. 이데올로기적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진보의 길이 아니었다. 샌드백과 같은 절대악을 상정하는 심판의 정치가 아니었다.
입당 전부터 온몸으로 부딪쳤다. 처음 찾은 현장은 전주시장 선거사무소였다. 하굣길에 무작정 방문했다. 교복 차림을 보자 부모님을 찾으러 왔냐고 캠프 관계자가 물었다. 선거를 돕겠다고 했다. 모두가 당황했다. 아는 것이 없어서 두려움도 없었다. 특권이었다.
하루는 전북도당 사무실이었다. 위원회 조직을 건의하고 싶었다. 이번에도 무작정 찾아갔다. 입구에서 서성이자 한 당직자가 나왔다. 테이블로 안내했다. 내가 기특하면서도 안타까웠나 보다. 여러 조언을 건넸다. 마지막이 압권이었다. 후배님, 정치는 사양사업입니다.
고교 졸업 후 서울로 상경했다. 국회에서 처음 9 to 6를 경험한 날이었다. 해질녘 의원회관을 나섰다. 대각선 방향으로 본청의 민트색 돔이 보였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간절한 꿈 한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내게 정치는 사양사업이 아니었다. 소명이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소명이 오만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다. 함규진은 개와 늑대의 시간을 넘어 개와 늑대들의 정치학을 말했다. 고대 로마에서 현대정치까지, 주권자 시민은 지도자로 충견을 원했다. 문제는 충견이 늑대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사례가 쌓였다.
선출직 공직자로서 나의 여정은 미완이다. 수많은 허물이 기다릴 것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받을 것이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될 수도 있다.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무게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심연의 거울이 날마다 필요한 까닭이다.
나는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는가. 심연의 거울 앞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 질문을 던졌다. 세상을 바꾸는 다양한 방법론이 있었다. 내게는 세 가지였다. 지식인, 사회운동가, 제도정치가의 길이었다. 마지막을 택했다. 나만의 공부와 판단이었다. 영향을 끼친 사람도 있었다.
먼저 지식인 강준만. 한국 사회에 실명 비판을 도입한 지식인이었다. 좌우를 다 깠다. 전투적 자유주의자 역할에 충실했다. 같은 동네에 살았다. 직접 인터뷰도 했다. 그의 책은 늘 술술 읽혔다. 시원했다. 문제는 실천이었다. 문제 제기의 역할에만 머물고 싶지 않았다.
다음은 운동가 박원순. 시민사회를 개척한 그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뛰어들었다. 결국 제도정치로 귀결되는구나. 야만의 시대에 정치밖에 답이 없구나. 결론을 내렸다. 그는 협치, 주민자치, 마을사업 등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새로운 청사진을 조감했다.
끝으로 정치가 안희정. 틈만 나면 정당정치를 강조했다. 안철수의 새정치와 박원순의 시민정치 레토릭보다 훨씬 와닿았다. 야인 노무현과 동행한 삶의 궤적도 좋았다. 대통령을 만들거나, 대통령이 되거나. 그가 삶의 척도였다. 기댈 곳이었다. 든든한 롤 모델이었다.
그중 두 명이 권력이라는 악마적 속성에 무너졌다. 안희정이 무너졌을 때, 처음 혼술을 시도했다. 막걸리 한 병을 비우고, 고시원 침대에서 탄식과 눈물로 잠들었다. 박원순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이 몽롱했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인 듯했다. 우울의 늪에 빠졌다.
사람은 떠나도 제도는 남는다. 정치인이 소멸해도 정당은 존속한다. 나아가 진화한다. 토니 블레어에서 제레미 코빈까지, 영국 노동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였다. 에이브러햄 링컨에서 로널드 레이건까지, 미국 공화당도 마찬가지였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김대중은 행동하는 양심을 말했다. 노무현은 사람 사는 세상을 말했다. 문재인은 나라다운 나라를 말했다. 내가 속한 정당의 언어이자 비전이다. 한편 정동영은 대륙으로 가는 길을 말했다. 손학규는 저녁이 있는 삶을 말했다. 안희정은 더 좋은 민주주의를 말했다.
한쪽은 정통으로 인정받는 비전이다. 다른 한쪽은 희미해진 비전이다. 전부 계승할 것이다. 나만의 언어와 비전으로 확장할 것이다. 정치는 뺄셈이 아니라 덧셈에 가깝다. 정당은 집단지성의 결사체다. 손에 손잡고 발걸음을 맞출 것이다. 매일, 천천히 서두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