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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연 Mar 11. 2022

나의 사적인 서점

Prologue

서점에 가야지..

란 생각이 든 건, 내 안의 작은 도망자가 또다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어른들의 눈을 피해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면 페이즐리 무늬의 벨벳 천으로 씌어진 소파가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부들부들한 페이즐리 무늬를 따라 그리다, 쿠션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옮겨 기둥과 천장을 만들어 작은 아지트를 만들었다. 그곳은 나만의 서점으로, 좋아하는 책들을 가져다 놓기도 하고, 젤리를 숨겨두기도 하고, 동화 속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확장되어 상상 속 또 다른 어딘가로 데려다 주기도 했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읽고 싶은 책을 색종이 위로 꾹꾹 눌러 적었다. 펭귄이나 강아지 고양이 모양으로 꼬깃꼬깃 접은 나만 알 수 있는 동물 모양의 색종이를 할아버지에게 선물이라는 듯 몰래 손에 쥐어드렸다. 할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 내가 적은 책들을 사서 전해주셨는데, 일주일마다 행해지는 이 의식이 나에게는 큰 행사였기 때문에 매일을 동내 상가 안에 위치한 작은 서점에 들러 책등에 적힌 글씨를 쳐다보다 잊어버릴세라 집으로 달려오곤 했었다. 


주말이면 방문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댁의 서재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서점이었다. 그곳은 공기마저도 집안의 여느 곳들과 달랐는데, 문을 열고 발을 디디는 순간 서늘함과 따스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서늘함 속에 청량함이, 따스함 속에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먼지의 위안이 늘 함께였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떠다니는 먼지를 가만히 쳐다보다 손이 닿는 책을 힘겹게 꺼내어 한 문단씩 곱씹어 읽었다. 책상에 쌓아 올려진 편지 봉투 옆으로 단정하게 놓여 있던 편지봉투 칼을 바라보고는, 작은 침대에 풀썩 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 책에 둘러싸인 공간에서 왠지 모를 자유로움과 안전함을 느꼈다.


보스턴에서의 규칙적인 생활 리듬에 잠시 벗어나고 싶을 때는 학교 도서관을 미끄러져 나와 다운타운을 향하는 T에 몸을 실어 대형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같은 향이 풍겼던 이곳은 가드마저 적절한 선량함으로 맞이해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특히나 이곳은 학교 근처의 작은 서점들과는 달리 아는 사람을 부딪힐 확률도 낮았고,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너무 깊지 않은 범위로 널찍이 구획되어 있어 옮겨 다니며 책을 펼쳐보기 좋았다. 특히나 새로 나온 음반까지 들어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나에게는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분위기에서 전공책이 아닌 그동안 보고 싶었던 여러 권의 책을 가슴 한가득 품고는 서점 안에 자리한 카페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게걸스럽게 종이 위에 글씨들을 흡입하곤 했었다. 주문했던 커피가 식고 체리 스콘이 부스러기만 남은 시간을 보내다 나오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 쏟아져 빗발치는 페이퍼를 견딜 수 있었다. 


첫 직장이 뉴욕이었고, 한국에서 일을 하다 동거인과 함께 다시 뉴욕으로 오게 되었다. 뉴요커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공원이 한 군데는 있다고 하던데, 나에게는 공원이 아닌 무척이나 아끼는 서점이 몇 곳 있다. 뉴욕의 여러 서점을 목적지로 소심한 여행을 다녀오곤 한다. 함께 했으면 좋겠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하는 여행을 가끔은 꿈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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