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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익 Mar 10. 2022

이반 모라베츠의 베토벤 소나타 '15번', '26번'



최근에 얻은 뜻밖의 수확이다.


이반 모라베츠(Ivan Moravec)하면 쇼팽의 녹턴을 절제미를 갖춘 리듬과 크리스털 같은 음색으로 연주한 피아니스트로 유명한데, 나는 그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녹음했다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모라베츠의 쇼팽 녹턴 연주에서 큰 인상을 받지 못했기에, 그의 베토벤도 원래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미처 가동을 중지시키지 못한 유튜브 자동재생 기능 때문에 들은 것뿐이지. 근데 웬걸. 그의 15번 소나타 "전원(Pastoral)"은 지금껏 들었던 그 어떤 연주보다 내 '이상향'에 가까운 것이었다.


https://youtu.be/bQJ9sf5hI7Y

Ivan Moravec 연주. 1악장: Allegro, 2악장: Andante, 3악장: Scherzo, 4악장: Rondo



심장의 고요한 박동을 따라 소리의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맥박의 리듬을 기초로 온갖 전원 풍의 심상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1악장, 다시 마음 깊은 곳 내밀한 곳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내밀한 자기와의 대화를 잇다가 태곳적 고요로 돌아가 끝맺음하는 2악장, 왜인지 모르게 밝지만 뭉클한 맛이 있는 3악장, 언제 그랬냐는 듯 쾌활함을 보여주면서 슈베르트 못지않게 베토벤 역시 희극 속에서 비극을 그려낼 줄 안다는 점을 보여주는 4악장. 이 모든 면에서 모라베츠의 연주는 내가 듣고 싶지만 그동안 듣지 못했던, 직접 연주를 해서라도 도달하고 싶었지만 도달하지 못했던 이상을 담고 있었다. 아직 이 연주를 들은 지 얼마 안 돼서 내 감상이 다소 과장되었을 수도 있고 뒤늦게 '내가 헛꿈을 꾸었노라' 한탄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의 감상을 솔직히 밝히려면 다른 길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그의 연주에서 내 마음에 흡족했던 것은, 첫째는 악보를 충실히 따르는 절제된 리듬적 생명력이요, 둘째는 리히터의  그것에 가까울 만큼 부드럽고 따뜻하면서도 깊은 맛이 사는 피아니시모의 음색이다.


1) 절제된 리듬



먼저, 리듬적 생명력에 관해 얘기해 보자. 리듬이 설득력 없는 자의식에 의해 날뛰는 것도 혐오하지만, 리듬이 평이하다 못해 식어버린 듯한 연주는 더욱 싫어한다. 그 점에서 리히터는 참으로 놀라운 피아니스트다. 악보에서 최대한 자의식을 배제한 듯한 연주를 보여주면서도 리듬적 긴장과 이완을 어떻게 살려야 하는지를 그는 명확히 알고 있고, 자신이 아는 바를 잘 들려준다. 적어도 이 15번 연주에서 모라베츠가 보여준 리듬은 리히터의 그것과 맞먹는 것이었다. 악보를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음악의 본질적인 구조와 형식이 잘 드러나도록 리듬적 긴장과 이완을 넘나드는 그의 방식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2) 태곳적 고요를 간직한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pp), 그리고 피아노(p)에서 드러나는 부드럽고 꽉 차 있는 음색도 매우 이상적이었다.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낙후된 녹음기와 날카로운 음색의 피아니스트를 만났을 때 내는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를 매우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리히터의 피아니시모가 지니는 따뜻하면서도 서정미를 잃지 않는 음색을 동경해왔다. 그런데 모라베츠는 바로 그런 따뜻하면서도 알이 꽉 차 있는 조용한 음색을 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리히터의 연주에서 열정을 몇 스푼 덜어낸 것만 같은 그런 맛이었다고나 할까.  


내친김에 그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녹음을 몇 개 찾아보다가, 더욱 놀라운 발견을 했다. 26번 소나타 "고별(Les Adieux)"이었다. 3악장에서 모라베츠는 내가 들었던 그 어떤 연주보다도 절제된 리듬 속에서 환희에 젖은 재회를 잘 살려준다. 비록 녹음 상태 때문인지 가끔 이물감 있는 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그는 루바토를 가능한 한 절제하면서도 매우 효과적으로 생기발랄함을 살려내고 있다.


https://youtu.be/dxTpWH7sOmE

Ivan Moravec 연주. 26번 소나타 3악장 "재회"




내가 원했던 바로 그 리듬, 바로 그 음색을 들려주는 또 한 명의 피아니스트를 만난 것일까? 최근 피레스(Maria Joao Pires)의 바흐, 안데르제프스키(Anderszewski)의 베토벤을 발견한 것이 큰 기쁨이었는데, 모라베츠의 베토벤을 마주한 것도 이버금가는 행복이라 불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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