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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p Nov 01. 2020

쉬운 동양 철학 15

정약용 VS 최한기

정약용은 주희의 이일분수론을 비판한다. 정약용이 무엇보다 주목했던 것은 이 세계가 형체 있는 것, 없는 것, 인간처럼 사유하는 존재, 그렇지 못한 동물들을 포함한 너무도 이질적인 존재자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체가 전체이고, 전체가 개체’라는 주희의 사상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주희는 이 모든 상이한 만물을 하나의 이(理), 즉 태극으로 환원시켜 버렸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내면의 가려진 본성을 찾기 위한 공부에 더 매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희를 비판한 정약용은 이런 논리가 참선을 강조한 불교의 논리와 유사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주희의 사유가 불교와 동일한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직감했던 것이다. 정약용이 옳다면 불교와 구분되기 위해서 유학은 내면에 몰입하기보다 반드시 외부로 나갈 필요성이 있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인간 밖의 다양한 사물들을 그 다양성에 입각해서 긍정할 수 있는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 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정약용은 신유학의 이기론을 전적으로 개조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신유학에서 이(理)가 통일의 원리였다면 기(氣)는 개별화의 원리였다. 그런데 이제 정약용은 기(氣)가 개별 사물이라 본다면 이(理)는 그것에 소속돼 있는 구체적 속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그는 주희의 이기(理氣) 개념 중 기(氣) 범주만 수용하게 된다. 전체 세계의 개별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던 이(理)라는 개념은 이제 일자(一者)라는 지고한 권좌에서 추락해 개별자들에게 귀속되는 속성이란 지위로 전락한 셈이다. 개별자가 사라지면 동시에 소멸될 수밖에 없으니 이(理)의 신세가 처량하기 이를 데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은 기(氣)를 ‘스스로 존재하는 사물’로, 그리고 이(理)를 이 사물에 ‘붙어있는 속성’으로 간주한 정약용의 생각이, 그의 독창적인 견해였다기보다는 사실 중국에 들어온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의 <<천추실의>>에서 배운 내용의 일부였다는 점이다.

예수회 신부였던 마테오 리치는 기본적으로 중세의 자연관을 수용한 스콜라 철학의 입장에서 중국에 신학을 전파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스콜라철학은 기독교라는 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결합해서 출현한 사상이었다. 그래서 마테오리치가 사용하던 두 범주, 즉 ‘실체’와 ‘속성’이라는 범주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범주에서 차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약용이 기(氣)와 이(理)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 내리면서 사용한 두 범주는, 결국 중국에 선교하러 온 신부 마테오 리치를 거쳐서 드디어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그 기원을 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놀랍게도 지금 정약용은 신유학의 핵심 범주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 레스의 중세적 세계관을 다시 끌어들였던 셈이다.

최한기는 정약용의 전통적 이기론을 비판하며 신유학의 핵심 범주를 공격했다. 최한기는 기(氣)를 갖가지 실험기구와 수학을 통해서 양화 되어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것으로 사유했다. 그가 역수학과 기계학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측면 때문이다. 역수학이 수학을 통한 양화의 논리를 함축하는 것이라면, 기계학은 실험 장치의 조작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찾을 수 없는 정신을 최한기는 피력하고 있다. 측정과 양화에의 의지. 최한기는 정약용이 그나마 보존하고 있던 개별자의 원리로써 기(氣) 개념도 버리고 있다. 이제 기(氣)는 측정 가능하고 양화 될 수 있는 에너지, 혹은 일과 치환 가능한 그 무엇으로 다루어진다. 그래서 “물과 불의 기(氣)를 변동하여 크고 무거운 기(氣)를 움직인다"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이것은 바로 증기기관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최한기가 서양의 근대적 자연관을 그대로 수용하기만 했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연세계에서 운행되는 기의 본질을 활동운화(活動運化), 즉 자발적으로 유동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활동운화라는 개념 자체가 역동성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근대 자연과학, 특히 뉴턴 물리학의 기본 원칙과는 조금 다르다. 사물 자체에 활동성이 있다고 보기보다는 외부에서 에너지나 일이 공급되었기에 운동을 한다는 것이 뉴턴 물리학의 근본 입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뉴턴 본인도 기계론적 자연관 이외에 물활론(物活論) 적 자연관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최한기는 뉴턴의 기계론적 사유뿐만 아니라 물활론적 사유에도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자발적으로 운동하는 기(氣)는 동시에 측정도 가능하다는 그의 주장은 바로 이런 문맥에서 가능했다. 최한기로 하여금 장재의 기철학에 새롭게 주목하도록 만든 결정적인 요인은 기계론적 자연관이라기보다 뉴턴의 물활론적 사유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 동아시아에 뉴턴의 ‘에테르’ 가설이 유행했다는 가설이 유행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테르는 빛의 반사나 굴절을 설명하려고 뉴턴이 도입한 빛의 매질이다. 바로 이 에테르를 접하고서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기(氣)를 연상했던 것이다.

뉴턴에게 에테르는 단순한 매질이 아니라 빛을 품은 영원한 활동자로 사유되고 있다. 바로 이 에테르가 응결되어 구체적인 물질들이 만들어졌다는 것, 이것이 뉴턴의 생각이었다. 기(氣)가 모여서 객형(客形)을 만든다는 장재의 철학이 뉴턴의 에테르 가설과 만나는 순간, 최한기의 활동운화하는 기(氣) 개념은 바로 탄생한다. 당시 최한기가 얼마나 서양문명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최한기는 기(氣)의 작용이 반드시 한열조습(寒熱燥濕)으로 드러나며, 이를 통해 측정 가능하다고 이야기함으로써 기의 구체적 검증 가능성을 여전히 강조하게 되었다. <<추측록>>이라는 책에서 최한기가 차가움과 열기를 재는 온도계 그리고 건조함과 습도를 재는 습도계를 그림까지 곁들이며 자세하게 설명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최한기는 기(氣)와 무관한 초월적인 존재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理)란 기(氣)의 조리, 즉 기의 구체적인 패턴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주희의 세계관을 비판하면서도 결국 그의 핵심 범주인 이기(理氣) 개념 자체를 제거하지 않는다. 오직 이기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려고 시도했을 뿐이다. 그들은 반은 성공했다면 반은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양한 사상가들이 주희의 철학을 공격했지만, 주희를 대체할 만한 철학을 체계화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우리는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라도 주희의 철학을 넘어서야만 한다. 특히나 패권을 잡으려는 중국이 유학을 새롭게 살리려 하는 작금의 현실에서는 말이다.



최한기 초상화


참고 서적: 강신주 철학 VS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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