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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asel Aug 31. 2021

영국 박사3년 차

정말 언젠가는 끝/새로운 시작이 오는 걸까?

2021년, 8월의 끝. 


우리나라에서는 3월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계절이지만, 영국에서는 학교가 9월에 첫 학기를 시작한다. 그래서 8월 말은 달콤한 여름방학의 끝자락인 동시에, 새 학기를 시작하기 전 분주하고 설레는 시기다. 학과나 학교의 특성에 따라서 자세한 사정이야 다들 다르겠지만, 영국에서의 예술 박사는 학기의 구분이 딱히 상관이 없다. 박사 연구생들은 정해진 강의나 세미나가 없고 대부분 각자 알아서 자기 공부를 하고 일거리를 찾는다. 그래서 대부분은 학교에서 정해준 방학 같은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데, 이는 학생들이 여름휴가를 가려고 해도 연구 진척이 더디거나 지도교수들이 연구를 잠시 잊고 휴식을 취하는 걸 탐탁잖게 여긴다면 학교의 방학이건 개인의 일정이건 모두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올해 7월 초부터 8월 중순까지 긴 방학을 가졌다. 코로나 여파로 작년 가을부터 올해 초여름까지 가족들을 전혀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가족들은커녕, 작년 겨울의 긴 봉쇄조치로 인해서 남자 친구 이외의 다른 사람과는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 와중에 2월에 한 번, 5월에 한 번 이사를 두 번 했다. 3년을 해외에 살면서 느낀 것인데, 유학생의 신분으로 해결하기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가 주거와 법률적인 문제다. 나는 이사를 하면서 예상치 못한 지출을 늘려야 했고, 고약한 집주인을 만난 불운 탓에 보증금 문제를 놓고 분쟁조정 신청까지 했다. 요약컨대 작년 가을부터 올해 여름까지의 1년, 나의 두 번째 아카데믹 이어(Academic Year)는 쉽지 않은 한 해였던 것이다.


그와 반면에 한 달간 한국에서의 휴식은 꿈같았다. 한국 역시 방역 비상이라며 4단계까지 거리두기 수칙을 올렸다지만, 영국에서의 지옥 같은 봉쇄조치 2번을 경험한 나에게 그 정도 제약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코로나 검사를 받고, 부모님 댁에서 2주간 자가격리도 해야 했지만 사실 그것도 즐거웠다. 생활면의 물리적 제약이 있다는 점에서는 물론 답답했지만, 부모님의 시골집 정원에서 햇볕을 쬐면서 잘 익은 토마토를 따거나 한가롭게 빨래를 널고 개키는 느긋한 일상은 다른 무언가가 아니라 '휴식', 그리고 '가족' 이 필요했던 나에게 가장 적합한 종류의 휴가였기 때문이다. 격리가 끝난 후에는 1년, 혹은 2년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 동창들을 만나며 몇 주를 보냈다. 그리고 어느덧 8월 중순, 나는 돌아가야 했다. 한국에서의 한 달은 재충전을 위한 완벽한 시간이었지만, 그곳에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없었다. 슬펐지만, 일이 없다는 다시 떠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다시 영국, 글래스고에 있다. 지도교수들에게 언제 미팅을 하면 좋겠냐고 이메일을 보내고 일전에 만들어둔 대략적인 새 학기의 계획표를 보면서. 이제 거의 끝나가는 자가격리 생활을 약간은 안타까워하면서(자가격리는 더 이상 나의 핑곗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희한하게도 맑은 이곳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제 곧 닥쳐올 새로운 한 학기와 한 해를 염려하고 있다. 그리고 박사 3년 차를 준비하는 마음은 박사를 첫 시작하던 그 해와, 두 번째 해를 준비하던 작년의 마음가짐과는 사뭇 다르다. 첫 해와 두 번째 해에 나는 '나에겐 아직 시간이 많아'라는 약간의 느긋함과 배짱이 있었다. 하지만 올 해는 다르다. 코로나로 인해 학교 시설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연구에 지장이 있어 논문 집필과 마무리를 위해 기간을 연장한다 해도 어쨌거나 올 해로 나는 박사 3년 차, 공식적으로는 박사 과정의 마지막 한 해에 접어드는 학생이 된다. 내 학생증에는 2022년까지 내 학생 신분이 유효하다는 작은 문구가 적혀있는데, 바로 내년이 그 해가 아닌가. 그렇기에 이제는 올 한 해만 잘 마무리하면 된다는 소박한 마음가짐보다는 한 해를 지나 졸업을 하는 시기, 그리고 그 졸업 후의 시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곧 닥쳐올 미래에 대한 생각과 계획, 요컨대 나에겐 그것이 이 1년을 시작하기 직전 현재에 가장 중요한 화두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이 근미래에 대한 계획이 단지 '무엇을 할 것인지'라는 일의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고 먹고살 것인지에 대한 총체적인 생활의 자잘한 면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박사를 취득한 이후 영국에서 거주하며 구직활동을 할 것인지,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가 좀 더 잘 아는 사회와 커뮤니티 안에서 직장을 알아볼 것인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어디에서 살며 일하느냐에 따라 준비해야 할 것들도 달라지고, 나아가 더 넓은 미래에 대한 계획도 달라질 것이다. 남자 친구, 가족들과의 관계, 더 큰 예술가와 연구자들의 커뮤니티 등등. 또한 먹고사는 문제. 한국이든 영국이든 박사 학위를 딴 이후에 연구자나 강사로 먹고사는 일은 험난하기 그지없다. 수많은 경쟁자들이 있고, 운이 좋아 계약직으로 처음 고용이 된다 하더라도 가르치는 일 외에 다른 부업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업은 무엇인지, 그 부업을 누구와 해야 하는지, 내가 하는 일의 수요자는 누구인지 등등을 고려해야 할 것인데, 이 모든 것들이 일단 그 첫 질문, '어디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와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돌이표처럼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나는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싶니? 또, 무엇을 해야 하니?






30대가 되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을 줄 알았다는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국내의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서 남들보다 안정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던 친구는, 아기를 낳고 육아휴직을 한 후에 회사로 돌아갈지 아이를 돌보며 다른 일을 알아볼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나도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서른이 넘으면 뭘 하고 싶냐, 뭘 해야 하냐는 등의 질문은 자동으로 해결되는 류의 질문인 줄만 알았다. 이제 와서 내가 하고 싶은 거라니, 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질문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은 더 앞으로 나아가기도 힘들 것이라는 걸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내 생활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 박사가 끝나고 나서는 부모님에게 경제적인 짐을 지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도 내 일 인분의 삶을 내가 받쳐나가고 싶다. 설사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의 종류를 살짝 바꿔놓는 타협을 동반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1년 만에 한국에서 머물며 느낀 것은, 내가 어디에서 살고 어떤 일을 하든, 나는 한국에 있는 가족과 나 자신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랜 해외 생활은 그동안 내가 몰랐던 자유의 감각,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 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하는 생활의 고단함과 외로움도 가져다주었다. 가족과 친한 친구들이 있으면 보다 쉽게 해결됐던 일들이, 어눌한 영어로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책임져야 할 때는 생각만큼 간단하게 풀리지 않았다. 몸이 아프거나 누군가 곁에 있어줬으면 할 때,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엄마였다. 나를 돌보고 사랑해주는 엄마, 그런 엄마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있으며 가장 많이 생각했던 사람은 영국에 있는 남자 친구였다. 아버지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어머니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고, 친구들과 만나 서울의 멋진 곳들을 누비면서도 나는 이 경험을 나 혼자 하고 있다는 묘한 자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멋진 것을 보거나 맛있는 것을 먹으면 남자 친구가 떠올랐다. '걔는 이런 걸 모르겠지, 이 좋은 걸 나만 누리다니'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사실 남자 친구는 무덤덤했는데도 나는 부러 내가 보고 먹으며 즐긴 것들을 사진으로 찍어 마치 보고서를 쓰듯 일주일에 몇 장씩 보내주고는 했다. 지독한 바이러스 전염병의 공포와 제약 속에서 유일하게 매주 만나던 남자 친구는, 이제는 친한 친구나 재미난 데이트 상대를 넘어 모종의 인생 파트너처럼 느껴졌다. 일주일의 식사 몇 끼, 그리고 그 주의 작은 즐거움과 일상의 스트레스, 어김없이 찾아오는 문제들을 쉴 새 없이 나눈 것은 단지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는 누군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무게감과 더불어, 안도감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 감각이 내게 알려준 사실 하나는, 내가 그 파트너십을 강렬하게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물론 현재 남자 친구와 그 파트너십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는 다른 종류의 문제다).


이런 깨달음들을 요약하자면, 나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남자 친구와 함께하는 삶'을 원한다. 이제 남은 건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구현시키느냐가 문제일 텐데, 현재는 일단 한국에서의 생활은 상상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남자 친구를 내 미래에 동참시키는 게 하나의 과제가 될 것 같다. 내 가족은 한국에 있고, 남자 친구는 영국에 있으며, 가족은 영어를 하지 못하고, 남자 친구는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 모든 국제 연애를 하는 커플의 딜레마, 장소와 언어의 문제. 그러나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해결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를 알고 실제로 같이 노력하는 게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박사 이후에 무엇을 하여 집세와 생활비를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답안이 필요할 테다. 일단은 영국에서 공부를 한 만큼, 영국에서 일자리를 알아보고 조금이라도 경험을 쌓아보는 것이 훗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더 좋은 선택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근 미래에 내가 있을 곳은 영국이다. 적어도 목표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글로 적어보니 마음은 정리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머리 한 구석에서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결한담, 하는 골치 아픈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 같다. 이상과 현실은 늘 다르고, 계획은 어김없이 틀어진다. 그것이 30대가 되며 깨달은 인생의 비밀 중 하나인 것 같다.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내가 강렬하게 원한다고 해서 모든 게 그렇게 해결되리라는 법은 없다는 것, 계획을 세워도 새로운 계획이 필요할 변수가 늘 찾아온다는 것. 하지만 그래도 일단, 나는 바보같이 계획을 적어본다. 물 흐르듯 살고 싶다고 얘기하지만, 그렇다고 떠밀려가며 살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게 과연 언젠가는 끝이 나고, 해결될 문제일까 싶다. 박사만 끝나면 지금의 삶은 일단락되고 새로운 삶이 열리는 걸까? 과연, 나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30대에는 이런 생각을 할 줄 몰랐다는 이야기들을, 10년 후에 아마도 나는 친구들과 40대에도 이런 생각을 하다니, 하며 똑같이 한탄하지 않을지. 


새로운 일 년을 앞둔 늦여름의 끝자락.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나를 알아야 한다. 어떤 미래가 온다고 해도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나는 나로서 살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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