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옷을 좋아하게 된 이유
대학생인 나의 하루의 시작은,
1. 아침에 눈을 뜨고, 침대에서 조금 미적거린다.
2. 겨우 일으킨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화장실로 향해 씻으며 마저 정신을 차린다.
3. 기초 화장품을 바르고, 머리를 말린다.
4. 어제 생각해 둔 옷을 입는다 마음에 들면 그대로 외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민의 늪에 빠진다.
5. 겨우 착장이 정해지면, 기분에 따라 향수를 뿌리고 날씨에 맞는 노래를 들으며 집을 출발. 물론 신발이 룩의 마침표를 잘 찍어주어야 한다.
하루를 시작할 때 그 날의 기분을 결정하는 요소는 매우 많다.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가 딱 맞춰 오는 예기치 못한 행복일 수도, 그 반대로 시간표를 지키지 않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불행일 수도 있다. (경의 중앙선을 타다 보면 흔히 하게 되는 경험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2,3번이 외출을 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필수적인 것들이라면 4,5번은 선택적인 것들이다. 그렇기에 많은 선택지가 생기고 그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다 지각을 해서는 곤란한 일이지만, 종종 그런 일이 발생하곤 한다. 특히나 오늘 입을 옷을 어제 미리 생각해두지 않은 경우에는 더더욱.) 여기에서 그날 내 하루의 시작이 결정된다.
사실 군 입대 전까지만 해도 보통의 남학생들이 그러하듯 나에게 있어 패션은 그저 주변 친구들처럼만 입고 다니면 되는, 그러니까 유행에 뒤쳐지지만 않으면 그만인 정도의 분야였다. 2016년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누구나 인스타그램에 빠져 사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지금보다는 옷에 대한 관심도가 낮았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아마도 그때까지는 페이스북이 대학생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도 무신사는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편집샵이었고 그때마다 유행하는 옷들이 랭킹 상단에 위치하며 나와 같은 남학생들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그렇게 옷을 구매하면 최소한 어디서든 옷차림으로 질타 받을 일은 없었으니까.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신기하게도 그런 식으로 옷을 구매할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누나들의 핀잔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누나들. 나는 1남 3녀 중 막내아들로 위로 누나가 세 명이나 있다. (나도 알고 있다. 결혼은 글렀다는 거.) 많이 싸우고 투닥대기도 하지만 누나 세 명은 때로는 각개전투로, 때로는 합동작전으로 내 삶의 방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영역이 바로 패션을 포함한 자기 관리의 영역이다.
내 기준에서 내가 처음으로 구매한 '좋은 옷'은 랄프로렌의 옥스포드 셔츠이다. 이 옷을 구매하게 된 경위는? 중학교 3학년 수학여행을 위해 옷을 구매하고자 조언을 구했던 나에게 누나들이 내가 제시하는 옵션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속칭 '아묻따' 구매를 강력 추천해서 사게 된 옷이다. 고로 2011년 구매를 했다는 것인데, 이 옷은 9년이 지난 현재도 내 옷방에 잘 걸려 있다. 여러 번의 세탁과 내 체중의 증가로 그때와 같은 느낌으로 입을 수는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클래식한 착장을 하는 날 착용하는데 문제가 없다. 18년에 군대를 갓 전역하고 옷장을 정리하던 중 이 옷을 발견하고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 좋은 옷이란 이런 거구나, 누나들 고마워!' 그리고 이후로도 부족한 내 안목으로 고른 옷들은 대부분 헌 옷 수거함으로 향한 반면 누나들의 추천으로 고른 옷은 꽤 생존율이 높은 편이다.
그렇게 나의 옷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다. '기왕 입는 거, 좋은 것으로 입으면 좋잖아?'로 시작한 이 관심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첫 번째 관심사로 자리 잡아 편집샵 아이쇼핑이 취미가 되고, 지나가다 보이는 매력적인 옷 매장은 반드시 들어가 봐야 직성이 풀리며 이력서의 아르바이트 경력에는 의류매장 아르바이트만 빽빽하게 된 현재의 내가 완성되었다.
여전히 나는 학생이고, 구매력이 옷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는 낮은 편에 속할 것이다. 좋아하는 브랜드들은 여전히 그림의 떡이고, 국내에는 그런 옷들을 입어볼 매장조차 찾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서울은 이제 패션 하면 아시아권에서 알아주는 도시가 되었다. 많은 브랜드들이 새로 생겨나고, 한국의 도메스틱 브랜드들은 4년 전과 비교해서 양적, 질적 측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발전하였다. 구매력이 낮은 나로서는 가격대가 부담스럽고 접하기 힘든 해외 브랜드들보다 도메스틱 브랜드들을 눈여겨보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브랜드들이 몇 시즌을 유지하지 못하고 없어진다. 책이나 유튜브 등을 통해 여러 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아도 한국만큼 유행에 민감한 나라도, 덕분에 한국만큼 사람들이 옷을 비슷하게 입는 나라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한 소비자들의 입맛을 맞추지 못한 브랜드들은 그들의 상품을 '클리어런스 세일'로 정리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 속에서 옷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를 멋지게 꾸미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좋은 브랜드가 만든 좋은 옷을 많이 보고, 만져보고, 입어보며 몸으로 느끼고 그러한 브랜드들이 가지는 철학과 디자인의 의도를 이해했을 때 나는 누나에게 빌려 입은 명품 옷을 입었을 때보다 나 자신이 더욱 멋지다고, 한 단계 성장했다고 자부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에는 주변 친구들이 왕왕 옷에 대해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 나름의 기준과 그간 공부해온 것을 바탕으로 제시하는 조건에 맞게 추천을 해주며 느껴지는 기쁨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던 부분에까지 오지랖을 부리는 나를 보면서 부끄러웠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구매한 옷이 자신이 지금까지 대충 사 입던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며 고마움을 표하는 친구들에게 머쓱한 웃음과 함께 다음에도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하며 가슴이 따뜻해지곤 한다. 나보다 옷을 더 오래 공부하고, 많이 아는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20대 대학생 중 브랜드의 아이덴티티가 무엇인지, 이 옷의 시작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울리는 TPO는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옷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쓰일 글은, 아직 많이 모자란 내가 더 멋진 삶을 살기 위한 첫 단계가 될 것이다. 기왕 입는 거, 좋은 것으로 입으면 좋으니까.
끝으로 내가 처음으로 사서 읽은 패션 관련 서적인 <헤비 듀티>의 저자 고바야시 야스히코의 여는 글을 빌려, 앞으로 부족한 나의 글을 읽게 될 독자들에게 부탁과 당부의 말을 전한다.
" 저는 그저 옷을 좋아하고 옷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은 팬에 불과합니다. 전공을 해본 적도 없고 어디 가서 내세울 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제가 글에서 다루게 될 항목들에 대해 이미 훌륭한 전문가나 책들이 많이 있지만, 저와 같은 위치에서 정리한 사람은 흔치 않았을 것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글들을 계기로 언젠가는 조금 더 완성된 좋은 글들을 써내려 가고 싶습니다. 읽으시는 모든 분들의 많은 의견과 질타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