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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골 Mar 19. 2024

힘들다는 말의 상대성

이러다 진짜 죽는다니까? vs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최근에 그런 류의 테스트를  좋아하는 친구가 권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정치성향 테스트'를 해보았다. 질문지 구성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내가 생각했던 대로 어느 쪽에도 쏠리지 않은 가운데 정도가 나왔다. 그 친구는 '너는 네가 회색인 것에 자부심이 있다'는 말을 장난처럼 하곤 하는데, 실제로 그렇지. 성장과정을 통해 나는 좋게 말하면 조화롭고 나쁘게 말하면 애매모호한 성정을 갖게 되었다. 성인이 되고 참여한 모든 선거에서 단 한번도 두번 연속 같은 정당의 후보에 투표해본 적이 없고, 가끔씩 정치 이야기에 불편하게 낑겨 있는 상황이 되면 보통은 팔짱끼고 관망하는 포지션이었던 것 같다. 일단 그런 류의 논쟁을 피곤해하기도 하고.


 정치얘기는 곧 싸움이 된다는 암묵적 룰에 따라 정치성향이 생활 전면에 드러나는 일은 잘 없지만 가끔 '타인의 힘듦에 대한 반응'을 보면 그것을 지레짐작하게 된다. 단순히 친구와 지인의 힘들다는 말을 들었을 때 보이는 반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 이야기에는 더 좋은 공감능력을 보이고, 설령 공감이 되지 않는다 한들 그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들다는 사람에게 다른 말을 할 필요도 효용도 없으며 무엇보다 결국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가장 힘들다고 느낀다는 어른의 상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사람들도 뉴스나 휴대폰에서 접하는 약자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아마 정치얘기 하기 좋아하는 친구 두 놈 앉혀두고 이 주제를 던져준다면 쌓여가는 소주병 속에 아침 해를 맞이할테다. 중간에 한 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지. 

 나는 학부에서는 행정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대학원에서 법을 공부하고 있다. 실질적 평등, 선별적 복지, 커뮤니티케어, 자립지원형 정책 등 약자에 대한 정책들이 지향해야 하는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개념들이 산재한다. 문제는 이러한 목표들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니 지향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제적, 사회적 투자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재원은 복지의 대상이 아닌 다른 국민들에게서 나온다. 아마 현재의 국가 체제에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문제일지 모른다. 자신이 번 돈을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에서 가장 큰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 소수가 되는 세상은 존재하기 어렵고 생각건대 썩 바람직하지도 않다. 


 기껏 복지의 대상이 아닌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걷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복지혜택을 제공해줬더니 웬걸, 좋은 말을 못 듣는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게 뭔지 모르느냐'라는 말이 나온다. 당연하다. 위에 언급한 궁극적 목표들은 결국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거시적이고 이상적인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잠재적으로 창출될 수 있는 몇 배의 부가가치보다 당장 통장에 꽂히는 몇만 원이 내 삶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선거철이 되면 온갖 공수표들이 난무하는 이유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감의 단절이 발생한다. 공동체에 속해 있으니 세금을 내는 것까지는 오케이, 그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한테 쓰는 것까지도 오케이. 근데, 이 사람들이 계속 그것만 이용해먹으려고 하네? 내가 호구야? 하는 알량하다면 알량하지만 들 수밖에 없는 생각들이 모여 별개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도움을 받는 계층을 배척한다. 복지정책을 수립하는 정부는 '나 이러다 진짜 죽어'를 외치며 무언가를 요구하는 계층과 '그건 내 알바 아니고'를 뇌까리며 눈을 돌리는 계층 사이에 낀 새우 처지가 된다. 아마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복지정책 관련부서에는 상여금 봉투에 천원이라도 더 넣어주고 싶을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나는 회색분자다. 행정학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 어떤 정책에도 모든 케이스에 완벽히 통용되는 마스터 키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별 정책마다 이익 집단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비용을 최소화하고 효과를 최대화할 수 있는 방향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다 진짜 죽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한다. 그 말을 본인들의 무기로 삼는 소위 '꾼'들의 자극적인 메시지는 잠시 뒤로 하고,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죽는다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스러져 가는 이들을 찾고 그들에게 물을, 밥을 주는 일이 완전히 끊기는 일은 있어선 안 된다. 형사소송법에서 피고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이유가 누구든 의도치 않게 형사피고인이 되어 법정에 설 수 있기 때문이듯, 우리 모두는 언제든지 우리가 가지고 누리고 있는 것을 모두 잃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생활할 수 있는 처지가 될 수 있다. 


 아직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 정말로 죽어가는 이를 외면하지는 않는 정도의 가슴 따뜻함은 남아있기를. 필요한 곳에 필요한 도움을 주고자 불철주야 노력하는 복지공무원들의 노력에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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