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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골 Sep 19. 2020

그래서, 좋은 옷이 뭔데?

내가 옷에 관해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앞으로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기에 앞서, 나 자신과 내가 좋아하는 옷들에 대해서 설명을 조금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필요할 때마다 반복인 걸 알면서도 설명을 하겠지만, '이 사람이 이런 생각을 기저에 가지고 글을 쓰고 있구나'를 알게 되면 글이 달리 보일 때가 있기도 하고 보통 책에는 으레 머리말과 색인 같은 것이 있는 거 아닌가? 싶어 어설프게 따라 해 보는 것이다. 아마 머리말 치고는 꽤 긴 TMI의 향연이 될 것으로 예상되니, 잘 절제해가면서 써야겠다는 마음과 함께 시작해보려고 한다.

  


옷 입는 것에 정답은 없다, 그러니..


  자신에 대해 설명하겠다면서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생각할 수도 있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구조의, 틀에 박힌 이 표현은 내가 앞으로 어떤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든 간에 가장 기저에 깔려 있는 생각이다.

  

  “기왕 입는 거, 좋은 것으로 입으면 좋으니까”라는 표현으로 지난 글을 끝맺었었다. 이 말은 평소 옷을 본인이 사서 입지 않던 친구들이 내가 추천해주는 옷들을 구매할지 말지 고민할 때에 종종 듣는 “이거, 이 정도 값어치 하는 거야?”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많이 내놓았던 말이기도 하다. 사실 나도 잘 모른다. 그 옷이 그 정도 값어치를 하는지는. 옷이라는 게 돈을 주고 사는 하나의 상품인 동시에 단순히 상품이기만 한 것은 아닌지라 느끼는 가치가 사람마다 전부 다르기 마련인데 어디까지나 내가 만져보고 입어본 경험을 토대로 추천해준 옷이 내 친구를 100% 만족시킬 수 있을지 불행히도 나는 알 길이 없다. 다행히 아직 크게 잘못된 조언을 해본 경험은 없지만, 확신을 가지고 조언을 해본 적도 없다. 그렇지만 언제라도 내 친구가 내 조언이 도움이 되지 못했다거나, 네 덕에 돈 낭비를 했다거나 하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완벽한 옷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 옷을 좋아하는 사람의 눈에는 그 옷의 장점이 크게 보이고 반대의 경우에는 단점이 부각된다. 나에게 좋은 옷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옷이 다르다는 것은 인간에게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하기에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다. 누군가는 한 벌을 사더라도 좋은 것을 사서 오래 입는 것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쉽게 질리는 성격 탓에 가격과 품질에서 어느 정도 타협을 보고 여러 가지 옷을 구매해서 다양한 옷을 입는 것을 선호할 수도 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옷에 관심이 많고 자신의 스타일이 확고한 사람들조차도 좋은 옷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이야기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우스터처럼 포멀하고 클래식하면서 위트 있는 코디를 선호하는 사람에게 피어 오브 갓의 후드 티셔츠는   마실용 정도나  것이고, 트래비스 스캇을 동경하여 스트릿코디만을 고집하는 사람에게 벨스타프의 왁스 재킷은 무겁고 뭔가 묻어나는 불편한 옷에 불과하다. (물론 이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스타일대로 섞어 입는 소위 '믹스매치의 달인'들도 존재한다. 이들은 논외의 대상이다.) 어쨌든 나는 아직 너무 초짜라 잘은 모르겠지만, ' 옷은 좋고  옷은 나쁘다'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로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예외적으로 정말  좋은 옷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옷을 입어보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상하다는 피드백을 받거나, 보기에 예뻐서 샀는데 막상 구매하고 나니 그 옷에 손이 잘 가지 않게 되는 경험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좌절할 필요가 없다. 태어날 때부터 마치 정답과 같은 패션 센스를 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고, 그러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만들어지는 스타일이 정말로 자신만의 스타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현재 그러한 시행착오의 단계에 있다. 누군가 당신의 옷은 좋은 옷이 아니라는 이유로, 당신의 스타일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당신을 비난하거나 조롱한다면? 들을 가치가 없는 이야기이다. 옷은 호불호의 영역이지, 선과 악의 영역이 아니다.


<좌> 닉 우스터, <우> 트래비스 스캇. 둘의 스타일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들이 모두 스타일이 확고하고 멋있는 사람이라는 데에 대부분이 동의할 것이다.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Esquire)



그럼에도, 점수를 높게 받을 수 있는 답은 있다


  위의 말과 상반되는 말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전혀 다르다. 시험 문제로 치면 객관식의 영역과 주관식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객관식은 다른 옵션을 고르면 점수가 전혀 부여되지 않지만, 주관식의 경우 출제자가 생각한 정답에서 조금 벗어나더라도 부분 점수를 얻을  있다. 옷차림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입던 자유이기 때문에, 최소한 옷의 본연의 기능인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는 이상 부분 점수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옷차림을 채점하겠다는 정신 나간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대학교 시험에서 공부를 아예 하지 않은 이상 부분점수에만 만족하는 일은  없다. 가능한 모두가 높은 점수를 받고 싶어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기본적인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하고 더불어 출제자의 의도 역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옷에 있어서 기본적인 내용이란, 옷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TPO이다. TPO란 Time (시간), Place (장소), Occasion(상황)의 줄임말로, 우습게도 영어 표현임에도 그 기원이 미국이나 영국이 아닌 옆 나라 일본에 있다. 누가 가장 먼저 이 단어를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본 남성 패션계의 거장으로 알려진 브랜드 VAN JAC (반 재킷)의 이시즈 켄스케(Ishiz Kensuke)가 이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시즈 켄스케, 전후(戰後) 일본 젊은이들의 패션을 지배한 장본인이다.

(이미지 출처: Grailed)


  그리고 출제자의 의도란, 그 옷을 디자인한 디자이너의 의도이다. 디자인의 기원을 찾아 그 옷의 본질을 찾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것이 불분명한 옷도 많고 지나치게 복잡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그 옷'을 디자인한 디자이너의 의도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 요즘에는 옷에 관심 있는 사람이 점차 많아져서 옷에 담겨 있는 스토리 안에 옷의 역사들을 서술하는 브랜드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디자인의 의도를 포함한 옷에 담긴 이야기는 곧 그 옷을 어떻게 입으면 좋다는 설명서와 같다. 단순히 '드라이클리닝을 해라', '탈수를 너무 심하게 해서는 안된다'와 같은 케어라벨에 적힌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러이러한 곳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 옷을 디자인했으니 이러이러하게 입어주십사'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브랜드들이 옷을 판매할 때 모델이 착용한 풀 코디 착장을 사진으로 함께 제공하지만 그에 더해서 나는 디자이너가 직접 이 옷의 특징과 메시지를 전달했을 때 조금 더 구매할 생각이 강해지는 편이다. (물론 이것이 유행처럼 번져 쓸모없는 정보를 마치 중요한 것인 양 포장해서 전달하는 브랜드가 많아지고 있다. 옷에 정말 관심이 많지 않고서야 이러한 내용을 구분해내기는 쉽지 않다.)


  이 두 가지를 알고 옷을 입는 것과 모르고 입는 것은 옷에 관심이 많아질수록 그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게 된다. 남성복으로 태생적 TPO의 예를 들면, 후드가 달린 풀오버 (후드티)는 그 자체로 속칭 '후리함'과 스포티한 느낌을 주는 대표적인 아이템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드레스 셔츠보다 포멀 해질 수 없다. 운동을 할 때 입는 트랙 팬츠 역시 턱이 잘 잡힌 스탠다드한 핏의 트라우저보다 차려입은 느낌을 주기 어렵다. 스트레이트 팁의 옥스포드 슈즈를 아무리 캐주얼하게 신으려 노력해도 에어 조던보다 자유로운 느낌을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렇게 TPO를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장 어울리는, '베스트 매치' 아이템도 그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정확히는, 가장 안 어울리는 '미스 매치' 아이템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좌> 발렌시아가 후디 풀오버, <우> 브룩스브라더스 넌아이런 셔츠. 아무리 명품이라도 태생적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미지 출처 : Farfetch, Amazon)

  

  여기서 중점은, '가장'이라는 표현이다. 대부분의 옷들은 여러 가지 룩에 접목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찾는 일은 하다 보면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위의 예를 이어서, 그렇다면 후디 풀오버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하의와 신발은 무엇일까? 신발은 최소한 옥스포드 슈즈는 아니라는 점은 알 수 있다. 로퍼라면 데님 팬츠와 함께 캐주얼하게 연출할 수 있을지 몰라도 끈으로 묶는 구두는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의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남친룩'이라는 이름으로 후드티에 슬림한 핏의 슬랙스를 매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핏을 정말 잘 맞춰 입지 않는다면 굉장히 어색한 코디가 될 수 있다. (사실 애초에 이 둘은 잘 어울리는 아이템으로 보기가 어렵다. 후드티를 입어 남자친구로서의 훈훈함을 드러내고 싶다면 개인적으로는 적당한 핏의 데님 팬츠를 권한다.)


  디자이너의 의도는 여기에서 변화구를 던진다. 모든 후디 풀오버가 마냥 후리한 것만은 아니고 모든 셔츠를 쓰리피스 정장에만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태생적 TPO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한국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옷의 패턴과 디자인에 따라 미스 매치였던 아이템들과 어울리게 디자인을 할 수도 있고 오히려 또 다른 베스트 매치 아이템을 찾아낼 수도 있다. (그래도 후드티에 구두는 조금 어렵기는 하다.)  나 역시도 아직 직장생활을 하지는 않는지라 몸에 딱 맞는 셔츠보다는 큰 사이즈의 셔츠를 데님 팬츠 등에 단품으로 입는 것을 선호한다. 디자이너가 그러라고 만든 셔츠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이 두 가지를 고려하면 최소한 미스매치를 피하고 안정적인 코디가 가능해져 더 높은 '부분 점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쇼핑을 전보다 줄이게 되면서, 옷장 정리를 조금씩 하다 보면 '대체 이걸 무슨 생각으로 샀을까' 반문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처음에는 돈도 아깝고, 부족했던 나 자신의 안목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러다 문득 머리를 스치고 간 생각은, '그때는 그게 예뻐 보였으니까'였다. 그 말 그대로다. 나는 그 당시 내 구매력 하에서,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옷이 무엇일까를 그 당시의 관점에서 고민하고 구매한 것들이다. 어느 정도 공부도 하고 전보다는 옷에 돈을 조금 더 쓰고 안목도 조금은 생긴 지금 구매한 옷들도 몇 년이 지나면 그렇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내 옷장을 누군가 본다면 누군가는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누군가는 이게 다 뭐냐고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는 것이다.


  옷은 그런 영역이다. 절대적인 것은 없고, 철저한 호불호의 영역. 결국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색깔을 잘 표현해내는 사람이 멋있는 것이지 무조건 값비싸고 유행하는 아이템으로 치장한다고 멋진 게 아니라는 것, 자신을 발전시키려는 모든 노력은 더 멋진 삶을 위한 노력이라는 것이 앞으로 나의 글을 읽는 모두에게 와 닿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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