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전적 인센티브에 대한 오해와 모순(1)
중세 말 유럽에선 '면죄부(免罪符, indulgence)'라는 것을 살 수 있었다. 이 면죄부란 죄가 사면되었음을 증명하는 서류로서, 이를 증명하는 자는 카톨릭 교황이었다. 카톨릭의 교리를 따르면, 죄를 지은 자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회개하고 그에 대해 사제가 기도를 올려주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 죄에 대한 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그것은 살아가면서 기도나 선행을 통해 갚아나가야 한다. 그런데 중세 유럽에선 굳이 기도나 선행을 행하지 않아도,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살 수 있다면 인간계 뿐만 아니라 신계에서조차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 23-24)"고 한 성경 구절은 적어도 그 시절엔 틀린 설교였다. 면죄부의 논리 안에서는, 돈만 있다면 부자들은 면죄부 구매를 통해 죄가 하나도 없는 깨끗한 인격체로 당당히 천국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었다. 부자들에게 중세 유럽이란 이 세상에서 먹고 싶은 걸 맘껏 먹고, 사고 싶은 걸 맘껏 사는 걸 넘어서, 사후 세계의 삶까지 돈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그런 멋진 사회였다.
과연 면죄부로 번 돈을 카톨릭 교회는 어디에 썼을까? 식스토 4세(1414~1484) 같은 교황은 시스티나 성당을 건립하고 바티간 도서관을 확장하고 코펜하겐 대학교를 세우는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겼는데, 그는 이런 사업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면죄부를 열심히 팔았다. 아무래도 사업들이 다 대형이다보니 카톨릭 인구들에게 면죄부를 다 파는 걸로도 비용을 다 마련할 수 없었던 모양인지, 그는 나중에 연옥에 든 영혼들에게도 면죄부가 유효하다고 선언하여,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서도 면죄부를 구매할 수 있게 했다. 조선 시대 말기 죽은 자에게 징수하던 세금인 '백골세'를 떠올리게 하는 어이 없는 제도이다. 그러나 식스토 4세가 세운 건물들은 무려 120년 간 증축된 성 베드로 성당(1506~1606)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 성 베드로 성당의 천문학적 공사 비용을 대는 데에 면죄부는 필수적인 돈줄이었다.
면죄부로 인한 폐단은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주 심각해져서, 독일의 주교나 수도승 등은 아예 대놓고 제 승진에 필요한 뇌물값 마련, 제 주머니에 들어갈 사비 마련 등의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면죄부를 마구 팔아댔다. 이에 보다 못한 루터가 '95개 조 반박문'을 통해 "사람들의 죄는 돈으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회개를 통해서 사하여지는 것"이라고 면죄부 남발을 비판하면서, 비로소 독일에 종교 개혁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런데, 면죄부의 역사를 읽고 우리는 왜 짜증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사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면죄부 판매는 돈을 벌려는 자들에게 기가 찬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재화를 팔면서, 그 판매에 내가 들이는 원가는 종이 한 장이면 된다. 소비자들에게 실물이 없는 재화는 서비스재이다. 사람들이 면죄부 구매를 통해 획득한 서비스는 '죄의 사면'이다. 사실상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서비스 중 최고라 할만 하다. 일단 서비스 내용이 몹시 탐탁하다. 구매를 하려는 순간 소비자들은 잠시 멈칫하게 되는데, 내가 속는 건 아닐까, 진품이라면 이만큼 큰 돈을 내고 천국행 티켓을 살만도 하지만, 만일 가품이라면 이런 돈을 낼 필요가 없지 않는가, 하는 망설임을 겪게 된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이 누군가 믿을 만한 사람, 즉 권위자의 보증인데, 무려 교황이 보증을 섰다. 이렇게 되면 면죄부를 사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옆집도 뒷집도 다 샀다. 이러다 나만 천국에 못 들어갈까봐 걱정된 나머지 빚을 내서라도 돈을 마련한다. 이렇게 해서 마감 임박한 면죄부 구매가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이 '면죄부의 시장'에서 핵심 문제 중 하나는, "시장이 약속한 이익을 정말 가져다 줄 수 있는가"(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121쪽)이다. 면죄부는 정말로 죄에 따르는 벌을 사할 수 있는가, 혹은 벌은 죄값으로 상쇄될 수 있는가가 쟁점이다. 더 나아가 과연 서비스의 품질을 보증했던 교황은 벌이 사해졌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인물이 확실한가. 중세 유럽 사람들은 신이 그에게 그런 능력을 부여했다고 믿었다. 면죄부 판매를 부추겼던 인물 중에서 독일의 알베르트 대주교는 더 높은 성직으로 올라가고자 당시 명망 있던 푸거 가문에 돈을 크게 빌려서 교황에게 바칠 뇌물을 마련했다. 거꾸로 교황의 관점에서 보자면, 교황은 뇌물을 기꺼이 받았고 그에 기준하여 성직자를 임명했다는 뜻이 된다. 신이 진짜 존재한다면, 그런 교황도 그런 대주교도 천국에 들어가선 아니될 일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면죄부의 시장'에 대해 한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면죄부가 팔려고 했던 것이 함부로 인간이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감히 면죄부가 한 장 짜리 종이에 담으려고 했던 것은 '윤리적 가치'로서, 이는 인간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낮은 차원의 규범이 아니라 그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도덕과 정신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은 면죄부를 비꼬아서 만들어진 웹사이트 치트뉴트럴닷컴(www.cheatneautral.com)을 자신의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114~115쪽)'에서 일례로 소개한다(사실 그는 탄소상쇄정책에 대한 패러디로 이 웹사이트를 제시했다). 이 웹사이트는 런던에 사는 이가 불륜을 저지르고 난 후 죄책감을 지우고 싶을 때, 배우자에게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맨체스터 시민에게 금전적 후원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상쇄할 수 있다. 불륜은 죄값으로 상쇄될 수 있는 것인가(탄소배출은 불륜처럼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샌델은 말한다. 탄소배출은 다른 관점에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할 문제이다). 만일 불륜이 면죄부로 상쇄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불륜면죄부 시장' 혹은 '불륜상쇄 시장'에서는 상당히 우스운 일이 일어나게 된다. 아마 마케팅 표어로 쓰자면, "불륜을 즐기세요. 그리고 불륜상쇄를 통해 배우자에게 신의를 다하고 있는 한 가정을 후원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불륜이 한 가정의 행복을 지킵니다"와 같이 말도 안 되는 논리가 도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혼자 만남 주선 사이트 애슐리는 실제로 "인생은 짧아요, 바람을 피우세요"란 마케팅 표어를 웹사이트에 올려 놓아서 불륜 조장 사이트로 비난 받았다. 대신에 그들은 불륜상쇄 같은 물타기는 시도하지 않고 유료남자회원들에게 회원비를 받는 자본주의 정공법으로 승부를 했다. 그로 인해 애슐리에서 불륜하다가 걸린 남자들의 인생은 원래 그들에게 허락된 기간보다 더 짧아졌다.)
요즘 대선에서 돈을 대놓고 주겠다는 공약들이 여럿 나오는 것을 보면서, 금전적 인센티브로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책결정권자들의 태도가 심히 우려스럽다. 그들이 뿌리려고 하는 돈은 어디서 나오는가. 세금으로 마련된 돈이다. 세금이 매겨진 것은 다행히 우리의 도덕과 윤리는 아니지만, 대부분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자산 혹은 권리이다. 그리고 일부 후보들이 선전하는 '커다란 공약의 시장'에서 우리는 돈을 받기로 되어 있다.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가. 무엇보다 우리에게 돈을 준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얻는가. 또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돈 말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금전적 인센티브는 아주 위험한 것이다. 그 의도가 선한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정말 신중하게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