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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랄 Aug 21. 2023

발리에 두 번 살다 (5)

원시의 나를 만나는 경험


두 번째 주 월요일 밤부터 화요일 낮까진 좀 이상한 일들이 연달아 벌어졌다.


월요일 밤에 발리 친구와 그의 아들이 잠시 놀러왔는데, 이 아들로 말하자면 강한 ENFP로 순식간에 집안을 휘저어놓고 우리 아들의 기운을 업! 시켜놓고 가 버렸다. 그런데 이 친구가 떠난 이후에도 아직 신나는 기운이 몸에 남아 있던 아들이 신나게 우리집 돌계단을 뛰어 올라가다가 엄지 발톱을 부러뜨리고 말았다. 아주 큰일난 정도는 아니었지만, 발톱이 부러지고 피가 나고 너덜거릴 정도는 됐다. 일 주일이 더 지난 어제에서야 겨우 살이 아물고 자연적으로 부러진 뚜껑 부분이 떨어졌다.


그러더니 화요일 아침에는 차곡차곡 쌓아놓았던 그릇이 돌 재질로 된 싱크대 위로 살짝 떨어지면서 그릇 하나가 이빨이 탕 나갔다. 전날 깨진 아들 발톱이 떠올라서 기분이 거시기했다. 그런데 같은 날 오전에 열린 학부모회에 참석했을 때, 갑자기 주변으로 서양 엄마들이 인사하러 몰려 들길래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무릎 위에 놓았던 내 핸드폰이 엎어지면서 떨어졌다. 그 때문에 한국에서부터 원래 보호판에 금이 좀 가 있었던 액정 커버가 조금 더 부러져 나가 버렸다. 마치 그릇에서 이빨 나간 모양 같이 보여서 기분이 더 거시기해졌다.


중요한 게 세 개나 조금씩 금 가듯 부러졌네.

그래도 오후부턴 별 탈 없이 조용히 넘어갔다.

그러더니 수요일에 갑자기 모든 문젯거리들이 해결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늘 교차하지.


일단 바쁜 와중에도 새로 친구들을 사귀고 차 한 잔 사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은 게 큰 도움이 됐다.

그들에게서 직접 도움을 받기도 하고 생활에 유용하게 쓸 팁을 얻기도 했다.

그들은 발리에 5년 살았거나, 자카르타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거나, 미국에서 살다가 발리에 2년 전에 들어온 한국인들로서 현지화를 제법 마친 사람들이다. 그들의 작은 충고도 내겐 큰 이정표가 된다.

아 그리고 발리에서 나고 자란 나의 발리인 친구들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들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라 비록 나와 입맛은 다르지만 (어찌 그렇게 맵게 먹는가!) 외지인인 나와 내 가족을 따스하게 품어 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여러 나라를 떠돌며 살면서 뼛 속 깊이 배운 큰 교훈 중 하나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늘 열린 마음으로 남들을 도우려고 애쓰는데,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으로서 내가 받은 도움을 갚고 싶다.


나의 큰 세 가지 문제 - 변기 막힘과 욕실 구조 문제, 연기로 인한 공기 오염, 바퀴벌레 등 벌레 퇴치 숙제는, 이 날까지 애쓰며 기다리느라 고생했다고 바람이 어깨를 토닥토닥해 주는 것 같던, 서늘한 둘째 주 수요일에 해결되기 시작했다. (발리는 적도 바로 밑 남반구에 위치하고 있어서, 우리나라와 계절이 반대다. 우리의 여름에 발리는 서늘한 가을처럼 청량하다. 우리나라의 9월 말 같은 느낌이다. 햇살은 짜랑짜랑하게 내리쬐는데 바람이 시원하게 더위를 달래주는 그런 근사한 날씨다.)


일단 연기의 현장을 잡았다. 아침에 집에 일찍 돌아오니 마당에 연기가 또 자욱했다. 사실 나는 이 곳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꽤 괜찮은 타운하우스에 살고 있다. 집주인이 큰 부지에 2층 짜리 타운하우스를 비슷하게 세 채를 지어서, 한 채는 아들을 주고 나머지는 세를 놓았다. 그래서 나는 관리비를 약간 내고 아들과 집주인이 마당과 쓰레기 등을 다 관리해 주고 있다. 뭔가 방식이 한국 방식이라 마음에 들었는데, 하필 그 아름다운 마당에 연기가 자꾸 들어차는 것이었다.

 

집 2층에 올라가서 연기가 어디서 오는지 확인해 보니, 옆에 있는 동네 건설장에서 나무를 태우고 있는 게 보였다. 이 동네가 인기가 있어서 계속 개발되려는지 주변에 건축물 올라가는 건설장이 두 군데나 있었다. 그래도 몇 달 후면 공사가 끝나겠지. 설마 일 년 내내 하진 않겠지 - 언젠가는 끝이 날 거라니 얼마나 고마운가!


가서 말할까 말까 하다가 - 건설 인부들은 어느 나라나 터프하므로 만나기가 살짝 겁이 났다 - 그래도 가서 말이라도 해 볼만 하다 싶어서, 대면하기로 마음 먹고 건설장으로 향했다. 이번에 연기를 꺼 줄 거란 기대도 없었다. 뭐 한 두세 번 말하면 그래도 안 피우지 않을까? 그냥 가서 말이나 해 보자.


가면서 작전을 세웠다. 새로 사귄 친구가 준 팁이 떠올랐다. 발리에 5년 산 한국인 친구가 말하길, 가서 따지듯이 말하면 원한 살 수 있으니 최대한 불쌍한 척 하라고, 그래야 말을 좀 들어준다고 했다. 그녀가 아는 보복 케이스 중에 동네에 개들을 풀어서 집 앞에 똥 싸게 하거나 (유독 인도네시아 오고 나서 똥 얘기를 많이 쓰는 거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더 심한 경우엔 밤에 담을 넘어서 물건을 훔쳐간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월담 케이스는 한국인 주인이 뭔가 돈을 안 주고 쫓아낸 경우라고. 그 주인은 게을렀던 이 고용인에게 화가 난 것이고. 인도네시아의 hati-hati 문화와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의 충돌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보았다.


그래서 나는 공사장에 도착했고, 연기 때문에 문을 못 열겠다고 대충 바하사로 둘러댔다.

"Saya tidak bisa buka pintu~~", 말미에 콜록콜록 하고 메쏘드 연기를 선 보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한국 친구에게 배운 팁 - 화내지 말고 징징 울어라. 불쌍해 보이면 들어준다를 실행했다.

여기 사는 사람인데 너무 힘들어요, 콜록콜록.

공사장 십장 아저씨 같은 사람이 나와서 웃더니 어디 사냐고 물었다. (그건 내가 대답할 수 없고) 속으로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잠시 후 놀랍게도 연기가 멈췄다!

미리 인니인을 대하는 바른 태도에 대해 배워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로 벌레 문제는 자카르타에서 온 한국 친구가 도움을 주었다. 그가 인터넷으로 모기장과 바퀴벌레약을 주문해 주었다. 물건들은 자카르타에서 지금 오는 중이다. 그의 흥미진진한 인도네시아 생존기를 들은 건 덤이다. 물건이 오면 바퀴벌레약을 집 구석에 바르고, 침대에다가 모기장을 설치할 것이다. 우리 아들 다리가 절반은 모기에 뜯겨 있는데 이제 매끈한 다리로 잘 수 있게 해 줘야지.


그래도 처음 발리에 왔을 때 멋 모르고 저녁에 문을 활짝 열어놨을 때처럼 모기와 동거하진 않고 있다. 발리에서는 대략 5시 정도 되면 문을 닫아야 한다고, 안 그러면 모기들이 집안으로 몰려들게 된다고, 친구가 충고해 준 것을 귀 담아 들었다. 그랬더니 정말 집안에 모기가 줄어드는 것이었다. 발리인 친구도 꼭 문 닫고 에어컨 틀고 자라고 해서 그 말을 지켰다. 둘째 주부터는 시원해지면서 밤에 에어컨을 틀지 않고도 잘 수 있게 됐다. 감사합니다, 발리 섬의 신령님.


그리고 점점 더 요령이 늘어서 자기 전에 모기퇴치 스프레이를 다리와 이불에 좀 뿌리고 자면서 모기가 확실히 덜 덤비게 됐다. 그리고 모기 잡는 전자모기채를 휘둘러서 몇 마리를 꼭 잡아주고 잔다. 아들은 마치 국가대표 배드민턴 선수처럼 전자모기채를 스매싱으로 휘둘러서 모기를 태워죽인다. 내 다리 물었던 놈, 나와! 가만 두지 않겠어! 이런 제스처라고나 할까.


그런데 아들은 어떤 날은 모기퇴치약을 뿌리지 않는다. 물리는 데 점점 덤덤해져 가고 있다. 모기장이 도착하기 전에 그냥 익숙해져 버리는 것인가. 이런 방식으로 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인가. 사실 아들은 정말 신기하고 고마운 게 나라와 나라간 비교를 안 한다. 미국, 중국, 한국, 인도네시아 각 나라의 장점과 단점을 그대로 수용하고 그냥 적응해 버린다. 어린이인데 이미 문화 간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할 줄 안다. 고루해져가는 어른보다 확실히 사고가 유연하다. 발리만의 장점을 좋아해주고 단점은 무던히 넘길 줄 안다. 불평 없이 잘 지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아들이 나를 위로하는 상이었다. 이제야 겨우 나의 징징거림은 멈추었고.


마지막으로 대망의 변기와 욕실 수리를 위해 집주인과 테크니션이 수요일 오전에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나는 인도네시아의 기술력을 미리 알고 있는지라 큰 기대는 없었으나, 그래도 집주인이 이 문제를 문제로 여겨준다는 것은 좋은 사인이었고, 당장 오늘 별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몇 번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어느 정도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살아본 경험이 있어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올해 다시 이 곳에서 살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믿을 건 역시 내 자신 뿐인 건가.


욕실의 가장 큰 문제는 변기 수압이 낮아서 변기가 기능을 못한다는 것, 휴지고 변이고 잘 내려가지 못한다는 것과 욕실 바닥이 잘못 공사된 나머지 배수구가 아니라 입구 쪽으로 기울어 있어서 물이 입구로 모여드는 것이었다. 수압 문제를 해결하고 입구의 물을 말릴 수 있다면 일 년을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주인과 테크니션이 와서 화장실을 봐주니 일견 든든한 마음도 들었다. 한국으로 치면 관리소장님과 관리소 기술직 직원이 온 거고, 한국 같았으면 바로 해결됐을 텐데... 그러나 우리의 인도네시아 테크니션은 아주 기다란 뚫어펑 기계를 가지고 와서 크게 힘을 발휘하며 쒜리 변기를 뚫기 시작했다! ㅋㅋㅋㅋㅋㅋ 이것은 기술인가? 힘인가?


그래도 그는 욕조에 물이 새나 뜯어서 검사도 해 주고, 2층 변기는 부품도 교체해 주었다. 부품 교체 후 확실히 2층 변기는 거의 정상 작동되기 시작했다. (1층 변기는 한 며칠 괜찮아 보이더니 다시 원상태로 됐다. 뭐를 넣고 쓸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하이고 마 됐다. 이게 어디냐.)



물이 화장실 입구에 고이는 문제는 고친 것도 아니고 안 고친 것도 아니게 됐다. 주인이 그냥 아주 커다란 물밀대걸레를 사 오셨다! 하하하! 그냥 목욕 마치고 나면 내가 수동으로 맨날 물을 밀어내기로 했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다시 내 노동력으로 기술부족을 커버하는 걸로. 위생이 걱정되어서 맨날 청소만 하니 집에 윤이 난다. 이러다 일 년 내내 청소만 하다가 갈 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문제는 주방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바퀴벌레 등을 걱정하기 때문에 주방에서 겁나게 부지런히 일하게 되는 것이다. 설거지는 절대 쌓아두지 말고 싱크는 늘 뽀송하게 유지해야 기본 위생을 지킬 수 있다. 그런데 싱크대가 열악해서 수량을 잘못 맞추면 물이 다 튀어오른다. 뽀송하게 우아하게 설거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설거지를 마치고나면 꼭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수준이다. 앞치마가 있긴 한데, 그걸 갖춰 입을만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는 없고 말이다. 앞치마란 그냥 신혼에 남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요리할 때 걸쳐 입는 꾸밈옷이 아니었던가?


주인과 테크니션이 떠난 후에 그들이 지나갔던 자리들을 1층과 2층 가리지 않고 다시 다 닦고, 화장실 두 개도 새로이 청소를 했다. 정말 피곤했지만 안 할 수도 없었다. 그러고선 너무 더워져서 그냥 1층 화장실에 들어가서 미리 받아놓은 찬물을 바가지로 푹푹 퍼서 간단하게 목욕을 했다.


그리고 냉장고에 남아 있는 야채들로 아주 소박한 점심을 차려 먹었다. 나는 원래 여름에도 더운 물로 샤워를 하고 7월에도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사람인데, 열대에 와서 열대 방식으로 살게 되니 여기 사람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 신기했다.


맨발로 현관과 뜰의 경계를 넘나들고, 찬물로 목욕하고, 벌레들과 대충 동거하고, 기술이 부족해서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견디고, 햇살과 바람에 감사하고, 땅과 바다에 감사하고, 간단한 야채들로 식사를 하고.

그야말로 나는 여기서 '원시의 나를 만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이제 발리로 온 지 셋째 주가 시작됐고, 그간 봉착했던 여러 문제들을 직접 부분이라도 해결하고 나니 한결 살 것 같아졌다. 기분이 훨씬 나아졌고 앞으로 길게 살아갈 자신이 좀 생겼다. 열흘 만에 이 정도면 정말 수고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빨리 자리잡으려 애쓴 나머지 살짝 멀미 기운까지 있었는데, 이제 좀 생활이 정상 속도로 내려온 거 같다. 첫 주에 비해 둘째 주가 되니 확실히 덜 스트레스 받는다. 화장실에 물 내려가는 게 나아진 것 하나만으로 여러 모로 개선된 게 실감난다. 그리고 연기도 확실히 덜 나고, 바퀴 모기도 좀 덜 만나게 됐다.


두 번째 토요일에 아들과 함께 빨래걸이를 조립했다. 그냥 헹거를 썼더니 도르래 달린 발로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면서 다 마른 옷들을 잔디밭에 처박곤 해서, 다리가 바닥에 딱 붙어 있는 빨래걸이가 꼭 필요하게 됐다. 빨래걸이를 써 보려고 빨래를 돌리려는데 애기 도마뱀이 세탁기 위로 도망쳤다. 이 녀석이 혹시 실수로 통돌이에 들어가서 같이 빨게 될까봐 신경 쓰인다.


이 집에서 맞았던 첫 번째 일요일엔 아들이랑 둘이서 엄청나게 청소를 하고 뿌듯했다. 그리고 휴일이었던 목요일엔 동네 산책을 나갔다. 위험하게 지나다니는 차들을 조심스럽게 피하면서. 동네 노상 식당(warung)에서 스페셜 볶음밥(nasi goreng special)을 시켜 먹었는데, 천상의 맛인 것이었다. 우리는 엄청 행복해졌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아들이 내 인생의 새 전우로구나.   


아들이 크면 함께 소리지르며 바퀴벌레 잡던 거, 집안 계단에서 똑또르르륵 하는 도마뱀 소리에 잠 못 자던 거, 모기에 벌겋게 물리던 거, 모든 게 추억담이 될 테니까. 서로 여기 얘길 하며 웃을 테니까. 아들의 아들에게 네 아빠가 유연하게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줄 아는 멋진 소년이었다는 걸 말해 줄 수 있을 테니까.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미래를 위해 지금이 의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째 일요일, 어제는 또 바다에 갔다. 1주 1바다(海). 루틴화 되고 있다.

크게 위로 받고 집으로 돌아가서 한 주를 살아낼 힘을 얻는다.

매일매일 1일 1기쁨(小喜)을 구하고, 한 주에 한 번은 바다에 가야지.


바닷물 속에서 서로 껴안고 놀고 있는 발리인 부자를 보았다.

그 둘도 그들만의 서사를 쌓아가고 있는 것일 게다.

아빠는 작은 배의 선장일 것 같고, 그 아들도 크면 발리 바다를 지키는 사나이가 될 터이고.


아들과 나는 모래에 구멍을 송송 내고 있는 바닷물 오징어들의 자취를 따라 얕은 바다를 걸었다.

아들은 아마 장성한 젊은이가 된 후에도 계속 발리를 찾아올 것이다.

공항에서 우리 기사 아저씨를 만나서 나의 발리인 친구들을 찾아가서는 정답게 삼촌, 이모 하고 부를 테지.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동년배 친구를 만나고, 그들의 정다운 2층 정원에서 귀여운 강아지들의 배를 긁어 주겠지.

내가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 이제 내 삶이 아니라 내 아들의 삶을 위해 자취를 남기는 일이 되었다.


무사히 두 주가 지나간 것에 감사하며.

이 다음엔 우리 기사 아저씨를 만난 이야기를 써 봐야 겠다.

발리에서 만난 또 하나의 소중하고 신기한 인연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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