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기사 로니를 만나다
발리에 들어온 지 오늘로 딱 4주를 맞았다.
어마어마한 폭풍이 몰아치듯 흘러간 시간들이었다.
첫 주는 절망하고, 둘째 주는 회복하고, 셋째 주는 열심히 일하고, 넷째 주는 정착하는 기분을 낼 수 있었다.
그 동안 발리인 친구 가족과도 어울리고, 새로 아들 학교를 통해 한국인 친구 가족들도 사귀었다.
아들과 둘이 동네를 탐방하기도 하고 바다도 다녀보았다. 아들은 학교에서 2박 3일 캠프를 다녀오기도 했다.
나는 그 기간 동안 한국에서 오신 중요한 고객을 맞아서 열심히 일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야말로 발리에서 한 달을 지냈고 인생을 살았다.
우리가 요즘 흔히 말하는 '어딘가에서 한 달 살기'는 사실 '삶을 살아간다'는 흐름의 개념이 아니다.
한 달 간 그 공간을 꼼꼼이 들여다보며 관광을 해 보겠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한 달 살기'는 관광의 한 형태로 '장기 거주를 통해 현지인의 기분을 내는 관광'이라고 볼 법하다.
그런 의미에서 만일 발리에서 리조트에 한 달을 살았다면 그것은 진짜 발리에서 살았다고는 볼 수 없다.
수많은 관리인들이 대신 리조트를 관리하고, 나는 요리를 할 필요가 없이 누군가 해 주는 음식을 먹고, 매일 새로운 곳으로 수영이나 래프팅을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냥 '발리에서 한 달 놀기'라고 불러야 맞지 않을까 싶다.
지난 한 달을 발리에서 지내면서, 나는 '살아 낸다'는 것의 의미를 처절하게 느꼈다.
사회인으로서 책임을 다하면서 새로운 공간에서 서바이벌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다스리는 게 힘들었다.
게다가 나는 아들의 삶을 동시에 지켜야 하고, 이러한 가정적, 사회적 책임을 미룰 곳 역시 없다.
이런 가운데 좌충우돌 한 달을 겨우 살아냈지만, 앞으로 남은 열한 달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살짝 막막하다.
막막한 미래는 어른이라도 무섭기 매한가지다.
발리에서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교통 문제이다.
버스가 있긴 한데 노선도 적은데다 매우 드물어서 실용성이 없다.
한 번은 발리인 친구 차를 타고 가다가 덴파사에서 꾸따로 가는 빨간 버스를 본 적이 있었는데 버스에 아무도 없이 텅텅 비어 있는 것이었다. 친구가 저 차를 타고 자기 남편 오피스로 한 번 가 보았는데, 내내 혼자 타고 가서 아주 리무진을 타는 기분이었다고 농담을 했다. 그만큼 이용자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매우 싸서 정말 몇 백원만 내고 우붓의 원숭이 숲까지 갈 수 있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모또르라 불리는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데, 우르르 떼를 지어서 출근하고 퇴근하기 때문에 어지간히 잘 타지 않으면 운전할 엄두가 안 날 모양새이다. 나는 평생 오토바이를 타 본 적이 없어서 모또르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남편이 자전거를 한 대 타고서 빈 자전거를 한 대 끌고 올 수 있을 정도로 자전거의 달인인데도, 15년 전 발리에서 그가 오토바이를 처음 탄 날 넘어지는 걸 보았기에 애초에 도전도 해 볼 생각이 없었다. (할 맘이 있었으면 한국에서부터 연습을 해 봤을 것이다.)
차를 빌리거나 사서 자가 운전을 해 보는 방법도 있는데, 이것도 걱정이 됐다.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은 차도에서 덤벼드는 수십 대의 모또르들로, 불나방처럼 운전자 앞을 막아서는 그들을 잘 피해 운전할 자신이 없었다. 누구 하나 실수로 치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 날 일이었다. 사람의 몸과 생명을 다루는 문제인데 용기를 낸다고 그걸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그리고 기술적으로는 이 곳의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는 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나는 98년부터 면허를 따서 운전을 해 왔는데, 늘 운전석이 왼쪽에 있는 환경에서만 운전을 해 왔다. 지난 한 달 간 교통신호 체계를 유심히 보면서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을 때를 염두에 두고 봤음에도 불구하고, 어휴 내 신경이 한 번 꼬이기라도 하면 좌우를 헛갈리게 될 텐데 잘해 낼 자신이 없었다.
상황이 이러하여 나는 택시를 타고 다니기로 결심했다. 아들을 학교에 보내주고 데리고 올 때 차가 필요했고, 고 사이사이 오피스에 출근하거나 일이 많지 않은 날은 집에서 일할 수도 있었다. 나는 낮에 일을 해야 했기에 누군가와 차를 마시거나 맛집을 갈 일도 없어서 이동이 적은 지라 굳이 차를 보유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나는 사실 일 년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소유를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 집을 구할 때 수영장이 없는 집을 원했는데, 사눌과 르논 지역에 수영장이 없는 곳이 드물어서 선택지가 좁아진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친구 덕분에 수영장 대신 마당이 있는 곳을 구했고 마당을 뛰어노는 아들과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흐뭇하다. 수영장을 관리할 필요도 없고, 수영장을 관리하러 오는 누군가를 관리할 필요도 없어서, 크게 신경 쓸 곳이 줄었다. 마찬가지로 차가 없으니 차를 관리할 필요가 없고, 차를 돌볼 누군가를 관리할 필요가 없어서 일에 더 신경을 쓸 수 있어서 좋다.
나는 우버 앱(현지에서 그랩Grab이라고 부르는)을 써서 차를 불러서 타고 다녔다. 그랩 기사들은 약간씩이라도 영어를 했고 내가 조금 바하사를 쓰면 몹시 친절하게 대해줘서 타기 편했다. 다만 가끔은 차에서 사람의 체취가 배인 냄새가 나서 힘들었고, 모르는 기사들이 집 앞에 우리를 내려주는 게 꺼려져서 약간 멀리 내렸고, 늦게 귀가할 땐 모르는 사람과 집에 가는 게 조금 걱정스럽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 그래서 고정 기사를 구했으면 했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랩 기사 중 누군가 마음에 들어서 계약을 하면 좋겠다는 막연한 마음만 있었다.
첫 주 목요일 아침에 아들이 유독 그랩 택시에서 나는 냄새를 힘들어 했다. 이미 전날도 괴롭다고 했었다. 아들은 민감하지만 엄마에게 이런저런 부탁을 잘하는 편은 아니다. 엄마 입장을 고려해서 가능하면 참는 편이다. 그런 아들이, "엄마 우리 기사 아저씨 구하면 안 돼?" 라고 물었다는 건 참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아직 믿을 만한 사람을 못 만나서 그래. 곧 구해 볼게"라고 대답은 했지만, 나로서도 언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막연한 상황이었다.
같은 날 오후 그랩 차를 타고 아들을 데리러 학교로 가는데, 기사가 제법 괜찮은 영어로 이런저런 말을 조심스럽게 걸어왔다. "학교에 가서 아이를 데려오는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렇다면 내가 기다려서 다시 올 수 있다"라고 제안을 했다. 괜찮은 제안이다 싶었다. 앱으로 새 차를 서치하고 기다리고 모르는 기사와 연락하는 수고를 줄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고려해 보려고 차를 스윽 둘러봤더니, 차가 깔끔하고 시트가 빨간색인 게 맘에 들었다. 우리 가족들은 빨간색을 좋아해서 거실 소파가 빨간색이다. 남편과 나의 첫 차도 빨간색이었다. 뭔가 운명적으로 맞다 싶었다.
아들을 데리고 차에 태워서 차가 마음에 드는가, 아저씨 인상은 어떤가 물어보니, 사람에 대해 꽤 까다로운 편인 아들이 차도, 사람도 좋다고 반색을 했다. 아저씨도 아들에게 싹싹하게 이름과 나이를 물어보고 잘 사귀려 들었다.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저씨가 자기 집이 사실 우리 집 근처라고 했다. 걸어서 5분 거리인데, 집에 있다가 콜이 들어와서 온 것이라고 했다. 오, 서로 가깝게 살면 기사에게 폐 끼치는 기분이 덜해서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서 자기 집에 가서 좀 쉴 수도 있을 것이고, 서로 윈-윈이었다. 거리가 관계를 결정하는 경우를 살면서 자주 보았다.
차 안에서 아들과 장난을 치면서 No thanks 대신에 중국어로 不要 라고 말했는데, 아저씨가 좀 놀란 듯이 "지금 중국말 하신 거냐"고 물었다. 그래서, 아들과 나는 중국에 살면서 중국어를 배운 적이 있어서 가끔 쓴다고 말했더니 좀 놀란 눈치였다. 나는 그래서 3개 국어를 쓴다는 사실에 놀란 건가 했는데(인도네시아어까지 배우는데 성공한다면 사실상 4개 국어일 텐데, 과연 가능할까?) 아저씨 말이 본인도 중국어를 좀 할 줄 안다고 했다. 중국어도 알면 더 좋구만 하고 기사 아저씨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갔다.
일단 일 주일 동안 아침과 점심에 약속을 하고서 만나보기로 했는데, 아저씨는 단 한 번도 시간을 어기지 않았다. 약속 시간보다 5분에서 10분 정도 일찍 와서 기다려줬기에 아들 등하교 시간을 편하게 맞출 수 있었다. 나는 사회적 약속시간에 민감한 편이라서 나도 늦지 않는다. (개인적 약속에 마음이 좀 녹아들면 가끔 늦을 때도 있다.)
금요일에는 아저씨와 함께 은행에 가서 환전을 하고 텔레콤에 가서 유심칩을 사고 전화기도 사러 갔다. 모든 과정에서 아저씨가 통역을 잘해 줘서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오후에는 우리가 부탁도 안 했는데 아들을 데리고 새로 생긴 몰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5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Living World란 몰이 생겼는데 한 달도 안 됐다고 했다. 이렇게 아저씨는 단순 운전기사를 넘어서서 우리의 생활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저씨와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와 일터를 다니는 것 이외에도 필요한 물건을 사고, 바다를 보러가고, 식당을 가려할 때 로니의 도움을 받았다. 아저씨는 자기가 아들을 학교에 등하교 시킬 수 있다고 맡겨 달라고도 말했지만, 나는 그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일단 우리집이 별로 멀지 않은 편이어서 아침에 아들을 학교에 넣어주고 꼭 껴안아주고 나오는 일상ritual이 내게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아들의 하루를 건강하게 시작하는 중요한 일상을 남에게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저씨와 일 주일을 더 지내본 후 아저씨에게 한 주에 두 번 정도 아들의 하교를 부탁하기 시작했다. 손님이 오셔서 내가 학교에 갈 수 없는 때가 와서 그리 했는데, 그 몇 번을 안 가니 은근히 몸이 덜 힘들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차를 타고다니는 게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우리 아들 학교는 등하교를 시킬 때 교문을 통과하려면 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하는데, 교칙에 부모, 친척, 지인, 기사, 유모(pembantu) 등이 허가증을 발급받고 아이들을 등하교 시킬 수 있다고 되어 있다. pembantu란 조력자란 뜻인데, 엄마들이 아이들을 키우는데 힘을 보태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명칭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기사도 넓은 의미에서 엄마들의 조력자에 속하는 셈이다.
아저씨는 2년 전에 수마트라 섬에서 발리로 왔다고 했다. 발리에서 살고 싶어서 온 가족이 함께 이주했다가 부모님은 자카르타로 옮기셨고,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아저씨는 처음 아들의 학교에 왔을 때, "오 이런 학교도 있었네" 했고, 허가증을 받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고 사진을 찍을 때에도 절차와 격식에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아저씨는 다른 한국 손님들을 태웠을 때, 우리 아들의 학교에 대해서 얘기해 줬다고 자랑을 했다. 하하하. 한국 여자분이었던 손님은 학교에 한 번 가 봐야 겠다고, 정보 고맙다고 하면서 내렸다고 했다. 우리 학교 홍보대사 로니 아저씨. :)
이 과정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가 사실은 조부모님이 중국인으로서 푸지엔(福建)성에서 인도네시아로 건너온 화교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됐다. 처음 만났을 때 중국어를 알아들었던 것이 당연했던 것이었다. 그는 그래서 인도네시아의 다수가 믿는 무슬림이나 발리의 다수가 믿는 힌두교를 믿지 않는 불교도였다. 발리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문화의 다양성인데, 아들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종교 활동 시간으로 인정한 종교만 해도 다섯 개나 된다. 무슬림, 힌두교, 불교, 카톨릭, 크리스찬 모두를 인정하고 있었다. 중국의 국제학교들은 종교가 없지만(정부에서 종교란 걸 인정하지 않는 관계로) 한국의 국제학교는 대부분 크리스찬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거북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경우를 만날 일이 없어서 아주 맘에 들었다.
로니는 가끔 자기 여동생이 한국 식당에 간 이야기나 자기가 갈비 식당에 소주 50개를 배달간 이야기 등을 해주었다. 그는 발리에서 한국 문화를 아주 가깝게 접하고 있다. 어쩌면 언젠가 그는 한국을 와보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를 한국에서 만난다면 그는 운전하지 않을 테고 우리는 아마 지하철 등을 이용할 텐데 그러면 관계가 낯설어지지 않을까? 커다란 공간의 이동은 종종 관계를 재배치하게 되기 마련이므로.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가까운 거리에 사는 친척처럼, 가족처럼, 삶을 살아가게 됐다. 토요일엔 쉬고, 일요일엔 약간 멀리 나들이를 가고, 주중에는 학교와 일터를 열심히 오가면서, 로니의 도움을 받아서 빠르게 발리에 정착할 수 있게 됐다. 단단하고 안전한 발이 생기면 어디든 못 갈 데가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