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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진 Oct 30. 2023

문장의 조각들

종이를 꿰매게 된 사연




시작은 새로운 소재로 한복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단순한 시도였습니다.



노방(안감)으로 만든 저고리 / 데님 바지로 만든 뷔스티에.                                 모두 업사이클링 제품. @hanbok_sill



처음엔 한복의 안감으로만 한복을 지어보는 것.

그 다음엔 데님 의류를 해체하여 한복을 지었습니다. 몇 가지 소재를 바꿔서 써보면서 점점 더 다양한 소재를 믹스해서 사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필연적으로 만들어지고, 그러나 쉽게 소비되어 버려지는 것. 그리고 꿰맬 수 있는 것의 교집합으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종이 조각 작업이었습니다.




제가 지난 수년간 꾸준히 해온 것이 바로 바느질로 꿰매서 잇는 것인데요, 조각을 잇는 작업은 업사이클링과 궁합이 잘 맞는 작업입니다.

옛날, 생활에서 쓰였던 전통 소품의 경우 아주 작은 자투리도 조각보에 덧대어 이어 쓸 만큼 선조들은 조각에 진심이었습니다. 알록달록 염색한 좋은 원단이 지금처럼 쉽게 버려지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요.


조각 밥멍덕(좌) / 조각, 자수로 꾸며낸 베갯모








잡지는 잘 정제된 글과 사진이 담겨있는 소재입니다.

다양한 카테고리의 글, 많은 사람들의 여러 날 고민과 퇴고를 거친 글이 담겨있지요.


그리고 그 글은 이미 이번 달, 가장 최신의 정보로 한 번 소비가 되었습니다.


잘 정제된 문장들과 멋진 사진들을 하나의 문양으로 담아보고 싶어서 조각을 이어봅니다.





잇는 과정은 단순합니다. 어쩌면 원단으로 만드는 조각보 보다 훨씬 간단할지도 모르겠어요.

열심히 머리를 써서 조각보 도안을 짜고, 잡지에서 다양한 크기의 조각을 무심히 재단해 둡니다.

옆으로 뉘이기도 하고, 거꾸로 놓기도 하면서 평범한 바느질로 문장과 문장을 잇습니다.






이미 익힌 글자는 아무리 애를 써도 글자로 읽히게 되더군요.

무심코 저도 모르게 예쁜 단어와 문장을 선별해서 재단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권을 통째로 읽어도 유독 마음에 남는 구절이 있고, 마음에 드는 옷의 튀어나온 실밥은 보이지 않듯이

우리는 사랑하는 무언가를 볼 때에 한껏 편애의 시선으로 봅니다.

성글게 짜여진 문장의 조각들 사이에서 편애의 시선으로 저마다 발견한 문장은 무엇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며 조각을 잇게 됩니다.


가까이서 조각으로 이어진 글을 보면 수많은 스피커에서 각자 다른 방송이 송출되듯 조각조각 다른 내용과 이미지가 시끄럽게 눈에 비춰집니다.


지난 5월. 공모전에 응모했던 조각 중 일부







다시 만드는 이야기로 돌아와서

자그마한 종이를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바느질로 꿰맨다는 것은 생각보다 정신력을 꽤나 빼앗기는 일입니다. 종이이기 때문에 바늘로 한번 뚫린 곳은 바늘 자국이 남아 지워지지 않지요.


새삼 직물. 패브릭이라는 소재가 참 유연해서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늘 한 땀 잘못 꿰어도 다시 돌릴 수 있고,

심지어 해체해서 다시 만들어도 웬만해선 바늘땀을 유연하게 감춰주는 고마운 소재입니다.


종이는 그런 면에서 아주 까다롭고 솔직한 소재입니다.

잘못 잡으면 구김 자국이 남고, 바늘이라도 한 땀 잘못 꿰면 바늘 자국이 남지요. 게다가 그 바늘 자국 바로 옆을 꿰게 되면 커다란 구멍이 되어 형태가 다르게 이어집니다.



어쩌면 글을 써보면서 편집증에 가까울 만큼 만족 없는 퇴고를 거듭하던 때에도 종이조각으로 다져둔 멘탈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종이에 구멍은 났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바늘 자국을 없던 일처럼 멀쩡히 돌려놓을 순 없으니 그냥 넘어가고 나머지 땀을 최선을 다해 꿰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완성되었음에도 끝맺지 못한 글들은 퇴고를 거치다가 지금의 나는 더 잘 써볼 순 없음을 인정하고 그냥 넘어가서 다음 글을 준비합니다.









한 조각, 한 조각씩 작은 조각들을 이어가다가 언젠가 커다란 조각으로 만나게 되면 어딘가에서 멋진 전시를 열어보자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맛보기로 올 여름에 제주에서 열린 '땀'전시에서 [ 문장의 조각들 1 ]을 전시하기도 했었습니다.





어떤 문장은 이제 닫힌 책에서 나와 누군가의 시선에서 새롭게 해석되는 오브제로서 소비될 것입니다.

제가 생각한 소각될 수 있는 종이에 반영속성을 부여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서 종종 종이를 꿰매볼게요.


문장의 조각들이 더욱 다양한 카테고리의 문장을 수집하고 더 넓은 세계관으로 이어지도록 프레임 밖으로 조금씩 나아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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