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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범 Oct 29. 2024

몸들의 무자비한 향연- <내가 물에서 본 것>

‘몸들의 무자비한 향연’을 경험해본 적 있는가? 아마 고개를 갸웃하는 이가 많을 테다. 우리 모두는 몸이라는 실체를 갖고 살아가며, 하루에도 수십 번 다른 몸들과 접촉과 분리를 반복 하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불편한 몸의 향연을 목도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정신이 인간의 핵이라고 여기지만, 사실 삶을 실재적으로 수행하며 기꺼이 부딪히고 찢기는 이 ‘몸’이야 말로 우리가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해당 관점에서 보면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저속 노화 식단이니 근력 운동의 필요성 등이, 즉 몸의 기능 향상 및 유지를 위해 벌이는 지난한 노력들이 반갑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발짝 뒷걸음질 치면, 그 기능마저 지워진 그저 '형태로서의 몸'이 존재한다. 그 날것의 '몸'을 마주할 기회는, 아니 깨달을 기회마저 좀처럼 없다. <내가 물에서 본 것>은 그 사실을 불편할 정도로 선명하게 인식하도록 한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신작 <내가 물에서 본 것>은 ‘몸들의 향연’이라는 강렬한 감상이 먼저 튀어나오는, 인상적인 작품이다. 낯설고도 불편함을 자아내는 움직임과 사운드는 우리의 몸과 의식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내가 물에서 본 것>을 제작한 안무가 김보라는 해당 극이 '의학 기술에서 몸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힌다. 보조생식기술을 직접 경험한 그는 현대 사회에서 기술과 인간의 몸의 관계성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보조생식기술의 경우 여성의 몸을 아이를 출산한다는 기능, 단 한 가지 측면에서만, 그것도 '성공'과 '실패'의 흑백 잣대로만 이분화 한다는 점에서 숙고의 대상이 된다. 재생산마저 가능케 하는 의료기술의 앞에서, 기능이라는 이해관계에서 떨어져 나간, 그저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몸'은 우리에게서 너무 멀어져 버린 것이다. 


사실 관람 이전, 관련 자료를 읽어보지 않는다면 극의 의미를 이해하기 다소 어려울 수 있다. 그도 그런 게 난해한 움직임들의 향연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무대의 막이 오르면, 무용수들은 꼭 바다를 연상시키는 파란 비닐이 깔린 바닥 위에서 각자만의 몸짓을 펼친다. 비닐 위를 기는 사람도, 발을 질질 끌며 걷는 사람도, 뒹굴며 몸을 부비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미묘하게 다른 소음들이 무대를 가득 채워낸다. 몸과 공간이찰하며 자아내는 요란한 흔적에, 대사 하나 없는 극인데도 '우리는 여기 존재합니다!'라는 외침을 쉼없이 들은 것처럼 혼이 빠지고 만다. 


이내 무용수들은 비닐을 뜯어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의 팔과 다리는 단순히 비닐을 뜯겠다는 목적을 위해 기능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해당 행위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무용한 움직임, 느리고 불필요하며 어긋난 움직임들은 마치 모체를 뜯어먹는 태아처럼, 파란 비닐을 무자비하게 벗겨내 거울 바닥을 드러낸다.


 덕분에 그 위를 걸어다니는 무용수들의 모습이 바닥에도 비치는데, 이는 그들의 움직임을 더욱 적나라하고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병원 수술실처럼 차가운 철제 공간을 연상시키는 이 거울 바닥은 우리의 시선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마치 새로운 몸의 일부를 발견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무용수들을 질기게 비춘다. 


특히 인상적인 막은 달걀을 사용한 부분이었다. 머리에 달걀을 이고 온 몇몇 무용수들이 그것을 무대 한 쪽으로 굴려낸다. 그리고, 이후 등장한 다른 여성 무용수가 달걀 위를 누비며 춤을 추는데, 그 아슬아슬한 몸짓을 바라보는 관객은 자꾸만 그의 발에 밟혀 처참히 깨지는 달걀들을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무용수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모든 달걀을 피해 춤을 마친다. 



그렇게 관객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 그 기대는 연약한 달걀처럼 깨져버린다. 다른 무용수가 등장해 달걀들을 허공으로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허망히 떨어진 달걀들은 깨끗했던 거울 바닥에 끈적하고 비린 흔적들을 남긴다. 그렇게 모든 달걀을 깰 때까지, 무용수의 분절되고 깎인 춤은 멈출 줄 모른다. 모든 달걀을 가볍게 피해 움직일 수 있는 '기능적인 몸'과 그것을 모두 깨뜨릴 수도 있는 '실체로서의 몸'이 공존하는 듯 말이다. 

<내가 물에서 본 것>을 논할 때, 사운드를 빼놓긴 어려울 듯하다. 극에서 사용된 것은 모두 일상에서 들을 수 있는 소음, 특히 병원에서 접할 수 있는 그것들을 혼합해 놓은 것이다. 그저 합침으로써 강조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축소하고 날카롭게 늘려낸 소리들일 뿐인데 마치 음악처럼 특유의 정서를 자아낸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선명한 선율에 맞춰 춤추는 무용수에게만 익숙했던 나는 언제나 그들의 몸에 찬탄하기 바빴었다. 그러나 <내가 물에서 본 것>의 경우 마치 무자비하게 증식하는 세포처럼 엉겨붙어 기괴하고 분절된 움직임을 선보이는 무용수를 통해 '몸은 몸일 뿐'이라는 새로운 감각을 일깨운다. 


<내가 물에서 본 것>은 노이즈와 낯선 동작들을 통해 '불편함', 넘어서 '불쾌감'을 자아낸다. 이는 관객으로서 상당히 피로한 관극 경험일 수 있으나, 동시에 외면하고 있던 무언가를 마주하게 한다. 우리 모두가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혼과 정신을 담는 그릇으로서 간과, 혹은 지나치게 신성시했던 몸의 실체, 또 그것이 현대 의료 기술과 병합되었을 때 차지하게 되는 어설픈 위치 등을 말이다. 그것이 예술이, 또 극이 수행해야 할 역할임을 고려했을 때, <내가 물에서 본 것>이 이룬 성취는 분명하다. 


 사실 이런 종류의 무용극을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관객으로서의 준비가 상당히 부족했었다고 느낀다. 공연을 관람하고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브로슈어를 열심히 정독하며 공연 중에는 미처 파악하지 못한 지점들을 발견하고 한탄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후에도 국립현대무용단의 공연을 관람할 기회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무딘 감각과 편견에 가려졌던 무언가의 깊은 일면을, 새롭게 마주할 기회가 될 지도 모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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