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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범 Nov 24. 2024

[도서 리뷰] 추리하는 인간의 역사

캐드펠 수사 시리즈

 역사와 추리의 낯선 만남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꽤나 기묘한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역사는 실제 사건의 연속임에도 누구의 시선으로 관조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개체의 인식을 넘어서는 거대한 흐름 안에서도 존재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추론하고, 또 추리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둘러싼 작은 사건들을 하나씩 이해 가능한 논리 속으로 포섭하다 보면, 개체는 마침내 역사라는 거대한 몸뚱이를 마주하게 된다. 


추리 미스터리 장르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설레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시리즈 완간 30주년으로 캐드펠 수사 시리즈 리미티드 에디션이 10권의 야무진 분량으로 출판되었다. 총 22개국으로 번역된 이 시리즈는 역사 추리 소설의 고전이라 불림은 물론, 영국 BBC에서 드라마화되며 그 서사적 가능성을 증명해왔다. 그 중 총 5권의 책을 접할 기회를 얻는 행운을 누렸고, 한 권씩 즐거운 마음으로 탐독해갔다. 



미스터리 소설에 대한 이해도는 물론, 흥미도 그리 높지 않은 불성실한 독자이지만 해당 시리즈를 반드시 접하고 싶은 계기는 있었다. 정세랑 작가의 추천사 중, '매번 자신있게 추천하는 역사 추리 소설'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끌렸으며 '역사와 미스터리'를 교묘히 조합해 '12세기 중세 유럽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는 출판사 서평은 높은 기대감으로 이어졌다. 1~5권을 접해본 적 없기에, 6권부터 시작되는 시리즈를 읽는 데 걱정이 앞섰으나 공유하는 설정이나 캐릭터가 존재하되, 각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흘러가기에 이해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나 시대배경에 있엇다. 물론 아는 만큼 더욱 즐거운 독서 경험이 가능할 것이라 예상하지만, 본인처럼 12세기 유럽에 대한 세계사적 지식이 전무하다 싶은 독자에게는 눈이 뜨일 만큼의 새로움을 안겨 준다. 사실 미스터리물, 특히 범죄물이 난무하는 현재콘텐츠 시장의 소비자로서, 우리는 그 장르적 문법에 지겨우리만치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배경이 현대의 한국이 아닌, 낯선 중세 유럽으로 옮겨가는 것만으로도 신선함은 배가 된다. 


그러나 이 낯섦은 종종 익숙함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소설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사회 문제와도 구도적으로 일치한다. 이 모든 것이 특정 시대의 산물이기만 한 것이 아닌, 인간사의 보편적인 문제임을, 그리고 이를 이해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잔잔한 선인들은 언제나 있어왔음을 강조한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의 배경은 12세기 중세 잉글랜드의 슈루즈베리 수도원이다. 그곳의 수사로 있는 캐드펠은 수도원이라는 특정한 장소성이 돋보이는 살인 사건, 당시 첨예하게 부딪히던 종교적 신념과 그로 인한 갈등, 세계사의 한 축을 담당하는 내전과 권력 다툼 등을 마주하며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신선한 갈등 상황을 제시하지만, 이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익숙한 범죄 추리물의 구도를 재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즉, 장르적 기대에 충실히 답하면서도, 그 자체만의 빛나는 정체성을 끝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극을 이끌어 가는 수사, 캐드펠의 캐릭터성이다. 그는 약초에 능한 수도사로, 수도원 바깥 세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상당한 인물이다. 그가 폐쇄적인 공간에 머물면서도 여기저기에서 수사를 이어갈 수 있는 인과성이 자연스레 부여된다. 또한 종교의 권능이 절대적이었던 시기에 수도사이지만, 오히려 근대성의 표상인 합리성을 지닌 인물, 종교의 논리와 상관 없이 인간에 대한 고뇌와 정의 추구를 이어갈 뿐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매력이 드러난다.

   

캐드펠은 파괴당한 도시의 몰골과 악취, 그 황폐함을 잘 알고 있었다.그 역시 젊은 날에는 병사이제 선원으로 머나먼 전장을 떠돌지 않았던가.
"식량 문제 외에도, 겨울이 코앞이라는 게 걱정이야. (중략)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나라에서는 질서가 붕괴되고 야만이 고개를 드는 법이지."

- 6권, 눈 속의 여인 中


 개인적으로 그를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탐정 캐릭터, 셜록홈즈와 자꾸만 비교하며 읽게 되었다. 범접할 수 없는 천재인 동시에 치명적인 결함들을 안고 있는 셜록홈즈는 독자들과 현격한 거리를 둔 신비스럽고 비범한 인물로서 묘사된다. 그러나 캐드펠 시리즈는 정 반대의 방식을 취한다. 캐드펠은 보다 더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친근한 주인공이다. 그의 추리는 우월한 두뇌와 추리 능력이 아닌 '인간적인 이해'를 바탕에 두고 있다. 이 모든 사건이 인간사의 흐름의 한 축임을 이해하고, 인간 존재 하나하나의 심리나 행동 동기 등을 이해하고자 하는 접근법은 우리 안에 잠든 작은 탐정들을 일깨우기도 한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아주 섬세한 추리 소설이다. '섬세한'이라는 수식어에 의문을 표하는 이가 있을 지 모르겠다. 서늘한 서스펜스를 쌓아가는 여타 추리 소설과 달리,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배경 묘사부터 심리 묘사까지, 모두 섬세하고 잔잔한 톤앤매너를 유지한다. 평소 장르 소설을 그리 즐기지 않는 독자일지라도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반대로 장르에 익숙한 독자에게도 신선함을 주는 작품이다. 추리 미스터리물에서 가능한 트릭은 다 보았다고 조소한 적 있다면,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담담하고 잔잔하게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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