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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아 Jan 25. 2021

폭식으로 현실 도피하는 나

왜 나는 늘 먹고 나서 후회할까

저는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식이장애와 우울증으로 상담을 받고 여러 면에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을 무렵, 유학 간 친구도 만나고 여행도 할 겸 영국에 4주 정도 머물렀어요. 그런데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던 날, 아빠에게 뜬금없이 메시지가 왔습니다. 한국과 영국의 시차는 8시간이니 한국은 밤, 영국은 이른 오후쯤이었겠네요.


“엄마와 해돋이 여행을 왔는데, 엄마가 사라졌다.”


아직도 그때의 놀람이 잊히질 않아요. 너무 놀라서 친구에게 전화를 했고, 받자마자 제가 우는 바람에 친구도 놀라서 숙소로 달려왔어요. 아빠는 함께 저녁을 먹다 말다툼 때문에 화가 난 엄마가 핸드폰만 챙겨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했어요. 알고 보니 엄마는 버스를 타고 홀로 서울로 돌아간 것이었고, 잠깐의 해프닝으로 마무리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끝나지 않은 일이었죠. 엄마는 아빠가 연락했냐며 미안하다고 했고, 아빠는 엄마가 자신과 말을 안 한다며 푸념을 했어요. 저는 영국에서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을 했냐고요? 잠잠했던 폭식이 또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폭식이란 단순히 많이 먹는 게 아닙니다. 마치 누가 먹으라고 조종하는 것처럼 통제할 수 없는, 조절 불가능한 상태에서 마구 먹는 것을 뜻하죠. 어쩌면 상황과 맞지 않는 뜬금없는 행동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왜 저는 그 상황에서 폭식을 했을까요? 아빠에게 그만하라고 하거나 엄마와 아빠를 중재한 것도 아니고, 한국으로 짐을 싸서 달려간 것도 아니에요. 대신 마트에 달려가 눈에 보이는 대로 과자를 사서는 홀로 꾸역꾸역 먹었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저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학부 때 연극영화학을 전공했습니다. 시나리오를 써서 짧은 영상을 연출하는 것이 하나의 수업 과제였죠. 그때 저는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는 압박감과 불안감에 사로잡힌 채로 빵을 몇 만 원어치 사다가 먹었습니다. 매우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많은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답니다.





이 순간을 피하고 싶어요

흔히 ‘현실 도피’라고 하는 심리적 철수withdrawal는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된 정신분석적 심리치료에서 말하는 방어기제의 일종입니다. 방어기제란 우리에게 주어진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여러 스트레스 상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행동입니다. 그중 철수 및 도피는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해결하기보다는 상황을 회피해버리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죠.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을 자려고 한다거나 갈등하다 말고 뜬금없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행동을 예로 들 수 있답니다.


여러분은 어떤 회피 행동을 하고 있으신가요? 시험 기간에 공부는 하기 싫은데 압박감과 불안감은 느끼면서 원래는 잘 하지도 않았던 게임에 빠지거나 별 관심도 없었던 드라마를 열심히 보았던 경험, 혹시 있으신가요?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회피와 문제 해결을 반복하고 있답니다. 글을 쓰고 싶지만 또 쓰기 싫은 마음에 괜히 유튜브도 봤다가 메시지도 봤다가, 별로 잘 들어가지도 않던 인스타그램도 뒤져봅니다. 이 모든 행동이 바로 회피에 해당합니다.


이 현실 도피 행동을 모두 나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저는 해야 할 과제가 있을 때 절대로 한 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리저리 돌고 돌아 결국 과제를 하게 되기까지의 적절한 회피 행동은 환기도 되고, 그 나름대로 하루의 즐거움을 주기도 하니까요. 불안감을 가득 안고 보는 드라마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죠. 혹시 ‘여행은 결국 현실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크게 보면 여행도 하나의 도피에 해당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 과한 것은 문제가 됩니다. 과제하기 싫은 마음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고, 부모님이 싸울 때 무력감에 사로잡혀 과자 한 봉지쯤은 먹을 수 있죠. 하지만 그것이 계속 반복되어 정작 해야 할 과제를 못 하거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만큼 폭식을 한다면 이는 위험신호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번은 피할 수 있지만, 계속해서 피한다면 정작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요.




회피 행동을 적절한 수준에서 마무리 짓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도망가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굉장히 쉬운 해결책 같아 보이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없죠.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다음으로 해볼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명확히 구분 짓는 것입니다. 저는 왜 부부싸움을 한 엄마와 아빠를 두고 영국에서 홀로 폭식을 했을까요? 저는 그 당시 굉장한 무력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 무력감에는 내가 어떤 개입을 했더라면 부모님이 싸우지 않았을 거라는 통제감이 깔려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데 안 한다고 생각되니 무력감과 죄책감에 빠져 폭식을 한 거죠.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제가 부모님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엄마가 그렇게까지 화가 났는데 제가 나서서 상황을 대충 무마시켰다면, 그 당시에는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두 분에게는 악수가 되었겠죠. 제가 그때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빠가 돈을 보태줘서 간 영국에서 다양한 경험을 열심히 해보는 것, 아빠가 힘들어하면 적당한 위로를 해주는 것, 자기를 신경 쓰지 말고 지내라는 엄마에게는 심심한 안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당장 나에게 닥친 일이 너무 버겁고 겁이 나고 어디서부터 헤쳐나가야 할지 몰라 막막한 마음에 음식을 찾고 있다면,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손쉬운 일부터 차근차근 해보는 게 어떨까요?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은 과감히 제쳐두고요. 어디까지 도망갈지 한계점을 정해놓는 것도 좋아요. 인생은 내가 해내야 하는 과제들로 넘쳐납니다. 가끔은 길을 잃어도 괜찮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해주지 않는 것들이 분명 있더라고요.


눈앞에 있는 산이 너무 커 보여서 암담하고 막막할 때가 있을 거예요. 산을 넘기 위해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첫 발을 내딛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그다음 산을 넘을 때는 조금 쉬워지고, 또 그다음에는 더 많이 쉬워질 테니까요.


<또, 먹어버렸습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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