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다 된 시간, 월리가 배고프다며 과자를 사러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평소보다 저녁을 푸짐하게 먹었던 터라 의아했지요. 뭐라도 씹으면 두통이 나아질 것 같아서 그러느냐고 물으니, 그런 것도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반대할까봐 눈치를 살피더군요. '이 사람이 과자 하나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내 허락을 구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얼마 전 일이 떠올랐습니다. "월리씨는 자신의 주인이니까, 몸과 마음을 건강히 돌볼 책임도 월리씨에게 있어요" 라고 말하는 나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내 주인은 귤님이에요"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농담인가 싶어 몇 번을 되물어도, 으는 내가 되묻는 이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요. '그동안 내가 얼마나 월리를 통제했으면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후회로 가슴을 쳤습니다.
나는 월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확인하고 통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요리를 하면서도, 책을 읽으면서도 수시로 월리의 안색을 살피고, 통증을 확인하는 것이 나의 일과였습니다. 월리가 잠이 들었을 때조차 잘 자고 있는지, 통증은 잦아들었는지를 확인했지요. 먹는 것부터 입는 것, 자는 것까지 놓치는 것이 없도록 애썼습니다. 뇌하수체를 제거한 탓에 수시로 몸이 급격히 변하는 월리는 남들에게는 사소한 일로도 크게 아프기 때문이지요. 무더위 속에서 20분을 걸은 후 열사병으로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에어컨 바람에 온 몸이 차가워져서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지고, 갑자기 구토감을 호소하며 길에서 쓰러진 것도 모두 이번 여름에 일어난 일입니다.
나는 그런 월리를 위해서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무엇이든 다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으로 월리와 한평생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고 여겼지요. Adele의 'Make you feel my love'라는 곡을 아시는지요. 그 노랫말이 꼭 내 마음 같았습니다. 그런데 정신차려보니, 나는 사랑을 핑계로 월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하는 독재자가 되어 있었고, 월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꾸려나가지 못하는 무력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통제받는 삶에 익숙해져서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도 망각할 만큼 말이지요. 충격 속에서 며칠을 헤매고서야 알았습니다. 그동안 내가 한 행동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요.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제한하고 옥죄는 에너지이며, 사랑은 자유롭게 허용하는 에너지라는 말이었지요. 두려움은 우리 몸을 옷으로 감싸지만, 사랑은 우리가 발가벗고 설 수 있게 해준다고 말입니다. 그 문장을 떠올리면서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내가 월리의 사소한 통증이나 괴로움조차 견디기 힘들어서, 내 두려움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월리의 행동을 통제했다는 것을요.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나의 독재자적인 태도는 내 안의 두려움을 점점 크게 만들었고, 월리를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요.
돌이켜 보면, 그 때 나는 온 힘을 다해 삶에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 때문이었겠지요. 그 경직된 마음이 또다른 어려움을 만들어내고, 내가 나답게 살 수 없도록 만드는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본디 내가 바라는 것은 아무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경험을 예단하고 통제하려 안간힘을 쓰면서 과연 내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럴 리 없겠지요. 통제와 자유는 정반대의 단어니까요. 'The soul afraid of dying that never learns to live'라는 노랫말처럼 말입니다.
고민 끝에 나는 허용하는 마음으로 살 것을 선택했습니다. 지금 이 상황도, 우리에게 다가올 모든 경험도 의식적으로 허용하기로 말입니다. 그 결심을 하기가 참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보다 더 버거운 상황이 끌려오면 어쩌나, 그것까지 다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불안이 앞섰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금껏 얼마나 많은 선택을 두려움에 이끌려 했던가요. 그리고 그 선택들은 어김없이 후회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두려움 대신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선택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했지요. 모든 경험은 그저 순수한 것임을, 거기에서 느끼고 배우는 것이 진정 우리 영혼이 원하는 것임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말입니다.
두통에 몸부림치는 월리에게 허용하는 마음을 이야기했을 때, 월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구요. 월리의 말에서 깊은 무력감이 느껴졌습니다. 내 행동의 본질이 무엇인지 좀더 일찍 숙고했더라면, 월리가 지금처럼 자신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을 거라는 후회가 밀려왔지요. 월리를 관찰하고 통제하던 내 행동은 믿고 맡기지 못하는 불신의 에너지였기에, 그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감시받는 사람이 스스로를 믿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리 만무하니까요. 월리를 위한 거라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조차 대신 해주던 행동 역시 월리로 하여금 사소한 일조차 스스로 해낼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주저하는 월리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억지로 허용하는 마음을 낼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고, 우격다짐처럼 허용이나 용서, 긍정을 쑤셔넣는 것은 폭력이나 다름없을 테니까요. 그 대신 나는 내 마음을 닦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하는 일이 곧 월리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내 두려움이 그에게서 생각하는 힘과 홀로 서는 능력을 빼앗았듯이, 허용하는 마음이 다시 우리를 일으켜 줄 거라 믿었습니다. 스스로를 다잡으려 매일 수행일기를 쓰고, 삼천배를 하고,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깊이 수행하며 깨치는 것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한 날들이 며칠간 이어졌습니다. 그럴 때면 '아, 됐다' 싶지만 그 마음이 오래 갈 리 없지요. 다시, 통증에 몸부림치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월리가 답답해 보이고 못마땅한 날들이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뾰족한 말투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어이 월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말지요. 그 과정을 얼마나 무수히 반복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월리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지난 새벽, 처음으로 허용하는 명상을 했고 머리가 많이 가벼워졌다고 말입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요지부동이던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그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 날따라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지요. 그 날 이후로 월리는 꾸준히 허용하는 마음을 닦으며, 나날이 몸도 가벼워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경험할 때마다 우리의 오라가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실감하곤 합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다른 한 사람에게 전해져서, 결국 우리가 같은 에너지로 공명하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나를 위하는 일이 너를 위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귀하게 배워가고 있습니다. 내 마음 닦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사랑과 두려움, 허용과 통제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어느 새벽, 우주는 나에게 노래 한 소절을 들려주었습니다.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그 한 마디가 나를 얼마나 울렸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움켜쥔 손을 놓고 자유로워질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