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떨고 나도 떨고 우리 모두 떤다
자발적 팀플 호구. 발표가 싫어 자료조사, ppt 작성, 대본까지 만들던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행인 건 직장인이 되고 나니 발표할 일이 현저히 줄었다는 것. 일 년에 한두 번 있는 워크숍만 잘 버티면 일 년 내내 평안했다. 하지만 이직을 하고 나니 생각지도 못하게 발표할 일이 많아졌다. 구매만 10년째인데, 9년 동안 한 횟수를 합쳐도 올해 한 것보단 적다니. 말 다했지 뭐.
처음엔 약빨로 버텼다. 전날 청심환을 사서, 발표 한 시간 전 몰래 화장실에서 들이켰다. 그러면 차분한 척할 수 있었다. 혹시나 누가 빈 병이라도 볼까 휴지에 돌돌 말아 쓱 버리며 다시 이직을 해야 하나 고민하곤 했다. 보고 장표를 만드는 것도, 그걸 들고 팀장님이나 임원에게 보고하는 것도 처음 한 두 번만 어려웠지 그 이후로는 익숙해졌다. 하지만 발표만은 예외였다. 나를 보는 눈동자가 여섯 개만 (즉, 세명만) 넘어도 손이 달달 떨리고 목소리가 흔들렸다.
발표하는 주제나, 듣는 사람이 바뀌다 보니 늘 처음처럼 떨렸다. 임신을 해야겠다 마음먹었을 때에도 '아 그럼 이제 청심환 못 먹는데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을 할 정도로. 한 번은 청심환을 먹었는데도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회사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대표님과 임원들을 포함한 30여 명 앞에서 (온라인까지 포함하면 백여 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발표를 한 날로 기억한다.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가 옆 사람한테도 들릴 것 같아서 물어봤다. '혹시 제 심장소리 들려요?'. 단상에 올라가 최대한 차분한 척하며 10분 분량으로 준비했던 발표를 4분도 안되어 끝냈다.
언제까지 이럴까.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런데 오늘. 참 오랜만에 (아마 청심환의 존재를 알고 처음으로) 약 없이 발표를 했다. 내 차례가 되기 전까지 계속 숨이 찼다. 큰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진정해보려 했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청심환은 없고, 나는 서른 명 앞에서 발표를 해야 했다.
이왕 망칠 발표 뭐부터 고쳐야 할지 알아보자는 마음에 후배에게 녹음 좀 해달라 했다. 어차피 이 회사 다니는 동안은 계속 발표할 팔자니 그냥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동안은 발표 잘하는 척, 차분한 척했지만 이번엔 떨린다고 팀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아침부터 긴장하고 있다며. 잘할 거라는 응원이나 못해도 된다는 위로를 들으려고 한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냥 말하고 싶었다. 딴 거 잘하니까 발표 하나쯤은 잘 못해도 되지 않나? 그러니 다들 좀 기대를 내려놓으라고.
생각보다 천천히 그리고 엄청 당황한 티 내지 않고 잘 마쳤다. 집에 와서 들어보니 얼추 내가 생각한 최악보다는 잘한 것 같았다. 스티브잡스나, 김봉진의장처럼 좌중을 압도하는 능력은 없지만 그냥 나의 최선을 다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뭔가 되고 싶거나, 하고 싶을 때마다 큰 장벽이었던 발표. 선생님이 못 되는 이유도, 마케터나 기획자가 못 되는 변명도 다 발표였다.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점점 앞에 나서질 않았던 나는 나도 모르게 성장하고 있었나 보다. 약이나 대본의 도움을 받아, 팀원의 응원을 받아. 이번만 운 좋게 잘했을 수도 있다. 어제 이만 보 산책을 하며 중얼거렸던 게 도움이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앞을 가로막았던 커다란 벽이 조금은 작아진 것 같다.
앞으로도 나서서 발표하는 사람이 되진 않겠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금씩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나로서는 엄청난 발전이다.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려는 욕심만 줄이고, 너도 떨고 나도 떨고 우리 모두 떤다는 사실을 안채. 더듬더듬 한 걸음씩 나아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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