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의 한 예배당. 신도들이 1층 좌석을 가득 채워 앉았다. 각기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단정한 옷차림이다. 엘리 추는 2층 좌석에 앉아있다. 후줄근한 체크 남방. 잔머리가 흘러나와 단정치 못한 낮은 포니테일은 그녀의 소탈한 성격과 무기력한 일상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순수한 사랑으로 타오른다.
"Love isn't patient, kind and humble!"
"사랑은 인내하고, 친절하고 상냥한 게 아니에요!"
(예배당의 신도들이 놀란 표정으로 모두 엘리 추를 바라본다. 앞줄에 앉은 애스터도 그녀를 보고 있다.)
"Love is a messy, horrible and selfish... Bold.
"사랑은 엉망진창에 끔찍하고 이기적이고, 대담한 거예요.
It's not finding your perfect half. It's...
당신의 완벽한 반쪽을 찾는 게 아니에요. 그건...
The trying and reaching and failing.
노력하는 거고 가까워지려는 거고 또 실패하는 거예요.
Love is being willing to ruin your good painting for the chance of a great one. "
사랑은 내가 열성껏 그린 작품을 기꺼이 망칠 수 있는 거라고요."
(1층으로 내려온 엘리는 애스터를 향해 말한다.)
"Is this really the boldest stroke you can make?"
"이 상황이 정말 네가 만들 수 있는 가장 굵은 획이야?"
(정적)
(애스터는 답한다.)
"You."
"너였구나."
(엘리가 답한다.)
"Yeah."
"응"
짝!
(애스터가 폴의 뺨을 후려치고 예배당을 나선다.)
1층의 신도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홀을 채운다.
한 남자 아이의 엄마가 울먹이며 아이를 향해 말한다.
"Mommy wants you to know in case you are a gay, mommy still loves you."
"엄마는 네가 게이라도 널 사랑한다는 걸 알아둬."
"Well, I'm not gay, mom."
"저 게이 아니에요 엄마."
"Thank God."
"세상에 다행이다."
올해 5월 개봉한 넷플릭스의 신작 <반쪽의 이야기> (the half of it)는 앨리스 우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10대 성장물이다. 미국의 기독교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중국인 10대 소녀, 엘리 추가 주인공이다. '반쪽의 이야기'는 넷플릭스에서 이미 하이틴 로맨스물로 큰 인기를 얻은 시리즈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키싱 부스' 와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반쪽의 이야기'는 프랑스 고전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서 모티브를 따온 구성으로, 시라노 희곡의 현대판으로불리는 넷플릭스 영화 '시에라 연애 대작전'과 스토리 전개가 비슷하다. 전자의 작품들과는 등장인물의 설정이, 후자의 작품과는 이야기의 구성이 유사하다. 하지만 '반쪽의 이야기'는 '10대들이 등장할 뿐' 하이틴 장르물이 아니다. 앨리스 감독은 영화가 로맨스물과는 거리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영화 개봉 인터뷰에서 이와 같이 밝혔다.
"It could be marketed as a teen rom-com but the reality is the movie's really not a teen movie.
"'반쪽의 이야기'는 10대 로코물처럼 마케팅될 수 있지만 사실 영화는 10대 장르물이 아니에요.
It's really just a movie of teeangers in it. But the reality is, I think we all regresse to becoming teenagers when it comes to love."
말하자면 단지 10대들이 출연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제 생각에 우리 모두 사랑을 하면 10대 시절로 돌아가긴 하잖아요."
백문이불여일견이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먼저 인물 간의 사랑의 작대기는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한다.
애스터를 만나 긴장한 폴, 고백을 건네기 직전이다.
문자를 주고받을 때와 다른 모습의 폴을 보는 애스터, 실망인지 긴장인지 알 수 없는 기색이다.
저돌적이고 엉뚱한 면이 있지만 멀쩡한 허우대를 가진 미식축구 선수, '폴 먼스키'. 학업 능력, 교우 관계, 미모를 두루 갖춘지. 덕. 체의 결정체, 엄마 친구의 딸 '애스터 플로렌스'. 그리고 교실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조용한 모범생이자 세상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엘리 추'가 주인공이다. (리아 루이스의허스키한 중저음의 목소리와 명확한 딕션이 주인공의 시니컬한 매력을 증폭시킨다.)
영화에서는 엘리 추가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중국 쉬저우에서 태어나 무교인 그녀는 애스터를 짝사랑하게 된다. 사건의 발단은 폴이 애스터에게 한눈에 반하면서 엘리에게 대리 연애편지를 부탁하면서부터다. 살아온 환경이 너무나 다름에도 애스터와 엘리는 짧은 문자를 통해 그들은 서로가 영혼까지 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반쪽, '소울메이트'인 것을 직감한다.
영화를 시청하며 확실히 '시에라 연애 대작전'의 줄거리가 연상됐다. 감독 앨리스 우는 올해 5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시라노 고전형식을 따랐던 기존 작품과 비교될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답했다.
"Partway through it starts to subvert the genre, and ends up not really being about who is going to get the girl. It’s really about this whole idea of going to look for the perfect other half.
"줄거리가 전개되는 도중 영화의장르는완전히 바뀌고결국 이야기는 '누가' 여주인공과 커플이 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완벽한 다른 반쪽을 찾아가는지에 중점을 둡니다.
It’s sort of the realization at certain points, that it’s not about finding your perfect path.
인생을 살아가는 데 완벽한 길을 제시하기보다인생의 어느 한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깨달음이죠.
It’s actually that moment, when you realize you’re reaching and you’re gonna fail, but your connections with people along the way —and in this case, it took three people who otherwise wouldn’t interact — kind of collide together.
작품에서는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세 인물들처럼 당신이 누군가와의 관계에 손을 뻗으려 했을 때 실패하겠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사 관계는 함께 무너집니다.
And the three of them, each of them end up sort of affecting each other, and through their connection with each other, each ends up getting a piece of themselves that allows them to move forward and become the person they’re meant to be.
작중세 인물들은 서로에게 애정을 가지고 그들 간의 관계를 통해 결국서로를더 나아가게 하고 스스로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각자의 반쪽을 조금씩 나눠 가져요.
And that’s not how Cyrano went. I mean, there’s a lot of literary attributions in it, but it’s kind of subverting the genre than doing a modern retelling."
이건 시라노적인방식이아닙니다. 물론 줄거리에서 시라노 스타일을 따르는 많은 문학적 장치들은 있겠지만, 그것을 그대로 현대 스타일로 말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새로운장르로 뒤엎은 것에 가깝죠."
문학을 감상할 때는 독자가 작품 속에서 중요한 단어, 사물을 찾고 그것의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는것이중요하다. 한 장의 페이지에 다양한 인물과 일화들이 넘쳐 홍수를 이루곤 할 때 한 가지 키워드와 상징적인 사물을 파악해두면 산만한 서사 속에서 중요한 맥락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더불어 키워드와 사물을 다양한 상황에 적용해 보다 풍성한 방식으로 주제를 이해할 수있다.
영화 '반쪽의 이야기'를 시청한 후 'stroke'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처음에는 주인공 엘리가 편지를 보낸 당사자를에스터에게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기에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줄거리를 되돌아보며 이외에도 은유적으로 다양한 의미의 stroke가 등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폴은 글쓰기에 소질이 있는 엘리에게 애스터를 위한 연애편지를 의뢰한다.
시작은 애스터였다. 첫 번째 stroke는 그녀가 긋고 싶은 인생에서의 대담한 'stroke(획)'이다. 그녀는 성인이 채 되기도 전에 자신과 맞지도 않는 학교 킹카에게 공개 청혼을 받는다. 예배 중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애스터는 종교의 교리와 사회적인 분위기를 먼저 고려한다. 단지 상황이 혼란스러운 그녀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려 한다. 엘리는 예배당 2층에서 항상 그녀를 바라봤다. 남들과는 다른 시선과 환경에서 애스터를 바라본 것이다. 엘리는 그녀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우려 한다.
"Is this really the boldest stroke you can make?"
"이 정도가 정말 네가 그을 수 있는 가장 대담한 획이야?"
두 번째 stroke는 애스터와 만남을 앞두고 말주변이 없는 폴을 위해 엘리가 도와주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엘리는 몸을 잘 사용하는 그를 위해 대화를 탁구(ping-pong)에 비유하며 자연스러운 대화법을 알려준다. 폴은 엘리가 가볍게 던진 샷에 지나치게 강한 힘으로 받아친다. 이때 그의 과격한 'stroke(타격)'는 대화에서 필요한 가벼운 티키타카에 서툰 폴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야구에나 적합했을 폴의 풀스윙으로 게임과 함께 대화도 끝났다. 당황하는 엘리의 표정이 이어진다.
세 번째stroke는 엘리 추가 졸업 전 공연으로 기타를 연주할 때 등장한다. 하필 엘리의 순서는 학교 킹카의 무대 직후. 앞서 신나는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초등학생 때나 배웠던 간단한 선율을 연주할 생각이다. 좌석에 앉아있는 것도 간신히 버티는 고등학생들에게 엘리의 무대는 야유를 받는다. 보다 못한 폴이 무대로 기타를 내민다. 엘리는 잠시 머뭇거린 후그녀가 만든 노래를 부른다. 짧지만 진중한 가사에 모두가 공감하며 환호를 보낸다. (미국의 America's Got Talent 프로그램에 간혹나타나는 반전의 주인공을연상시킨다.)그녀는stroke 주법(손으로 여러 줄을 쓸어내리는)으로 기타를 연주했다.
다양한 의미로 파생될 수 있는stroke(획, 타격, 기타주법)는 어쩌면 영화에서 Love(사랑)보다 중요한 키워드가 아닐까. 엘리는 애스터에게 훌륭한 미술 작품에 필요한 5개의 선에 대한 논리를 듣는다. 그녀가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망설이고 있음을 느낀엘리는 애스터만의대담한 'stroke'를 긋도록 격려한다. 또엘리는 폴과 탁구 경기에서 샷(대화에서는 질문)을 단어 'stroke'라고 표현하며적절한 타격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그러나 정작 엘리 그녀가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에서 스트로크 주법과 관련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녀 역시 자신에게 필요한'stroke'를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세 인물은 서로를 만나 각자의 'stroke'를 찾고, 불완전한 반쪽에서 비로소 완전한 하나가 되어가는 방법을 배운다.
처음으로 애스터가 엘리가 사는 세상으로 손을 뻗는 것(reaching)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 장면
이 영화는 단순한 퀴어영화가 아니다. 하이틴 로맨스물은 더더욱 아니다. 엘리 추는 미국 기독교 사회에서 이질감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인종, 종교 그리고 사랑마저 어느 곳에서 쉽게 이해받지 못한다. 한 사회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낙인당한 성장기의 소녀는 마침내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존재와 마주한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가치를 깨닫는다. 영화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방인'들에게 언젠가 그들 인생에서 비어있는 반쪽이 되어줄, 또는 미처 채우지 못한 조각들을 매워줄 존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반쪽의 이야기'는 단어가 가진 다양한 의미를 통해 매 장면마다 다채로운 해석을 할 수 있어 보는 내내 흥미로웠다. 문학이 선사하는 진정한 즐거움도 이와 같다!
'반쪽의 이야기'를 즐겁게 시청한 사람으로서 현재 가장 궁금한 것은 '반쪽의 이야기'의 시즌 2 제작여부이다. 고등학생 주인공들이 대학을 진학하며 조금 더 성숙한 모습의 사랑을 보여주는 틀은 어느 정도 예상된다. 앞서 언급한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키싱 부스' 작품들이 비슷한 맥락으로 시즌 2를 제작해 성공적인 결과를 거뒀다. 미성년인이 성인이 되어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다소 진부하다. 하지만 각기 다른 매력을 자랑하는 두 여성이 멋지게 성장하고사랑을 이어가는이야기는 기대가 크다. 앨리스 감독은 작품성과 대중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시리즈물로 다시 한번 퀴어 영화 역사에 '굵은 한 획 (the boldest stroke)' 을 그을 수 있을까.
Is this really the boldest stroke you can make, Alice?"
내용 참조 Reference
앨리스 우 인터뷰 (본문 번역: 작성자) Hoai-Tran Bui, 'The Half of It' is Director Alice Wu's Ode to Platonic Soulmates [Interview], /Fil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