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에 유난히 따랐던 영어 선생님이 계신다. 우습지만 반 오십 인생을 돌아보면 부모님만큼이나 감사한 분이다. 비유하자면 '비가 내린 뒤 촉촉이 젖은 땅'과 같은 분이셨다. 이제 막 땅 속에서 고개를 든 새싹은 잘못 건드리다간 뿌리가 꺾이기 십상이다. 선생님은 파릇파릇한 새싹과 같은 아이들이 세상에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좋은 토양을 제공하셨다. 모든 먼지가 씻겨 나가고 어떤 씨앗이 심겨도 푸르게 자라날, 충만한 영양분을 갖춘 대지와 같았다.
영어를 공부하면서 영미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11살이 되었을 때 미국 시사주간지 TIME을 구독하라고 권유하셨다. 사람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는 분이셨다. 내가 사는 지역은 다소 시골이어서 TIME을 구독하는 가정은 우리 집이 유일할 정도였다.
2006년 가수 비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으로 선정된 기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국내에서 정말 센세이션한 사건이었다.
대학을 진학하고 서울에 거주하면서 고향을 찾는 시간이 점점 줄었다. 가끔 집에 내려가면 선생님을 뵙고 온다. 재작년쯤 나에게 해주신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진로 고민을 토로했는데 선생님께서 되물어보셨다.
"혜민인 왜 기자가 되고 싶어?"
"너무 오래전부터 꿈꿔오던 일이라 이젠 왜 기자가 되고 싶은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세상의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고 싶어요. 항상 '깨어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정말 하고 싶다면 준비하는 게 맞지. 그렇지만 혜민이 네가 생각하는 것과 기자의 직장은 조금 다를 수 있을 것 같아. 혜민이 네 성향에 잘 맞을지 걱정인데."
(TMI인데 상대방과 마주 앉아 대화를 할 때도 항상 3인칭으로 부르신다. 그냥 '너'라고 부르시는 법이 없다. 따듯한 화법이다.)
"저도 사실 고민하던 부분이에요. 물론 된다는 보장도 없지만요. (머쓱)"
"혜민인 좀 더 크리에이티브(creative)한 직종이 잘 어울릴 것 같아.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될 거야."
요즘따라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목차『좋은 걸 좋다고 말하기』中두 번째 회상 (2008년)
초등학교 6학년, 교사-학생 멘토링 수업 후기 글쓰기 대회에서 입상했다. 상장을 들고 교무실로 멘토 선생님을 찾아갔다. 멘토 선생님은 당황스럽게도, 당황하신 기색이었다. 이유가 있다. 사실 6개월의 멘토링 기간 동안 딱 한 차례만 멘토 선생님과 마주했는데 바로 상을 타서 인사드리러 가던 그때였다. 새로 부임하신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첫 수업 때 지나가듯 던진 말씀이 기억에 남아 그 내용을 적어냈다. 멘토링은 고사하고 내가 쓴 글을 그때서야 처음 읽어보시는 눈치셨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업무가 바쁘셨을 것이다. 첫 만남에 선생님은 양심선언을 하셨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상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때의 나는 진심이었으리라.)
"이건 내가 가르쳤다기보다 혜민이가 가르침을 잘 발굴해낸 것 같아."
사실 지금 생각하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작업이었다.(진담) 아무튼 결과가 좋았으니 글로 남길 수 있어 다행이다.
나는 생각이 많았지만 표현이 비례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평범한 일상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혼자 부풀려 생각했다. 초등학교 3학년 즈음부터는 낯선 사람들과 있을 때 유달리 조용해지고 친한 지인이나 가족들과 있을 땐 '끼'쟁이로 돌변했다.
대학을 진학하고 서울로 상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서울말이 입에 붙었는데, 타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나의 억양이 겉돌거나 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대학교 3학년 때 학교 방송국에서 국장을 맡았다. 당시 나의 심경은 <책읽아웃>이라는 팟캐스트에서 코너를 진행 중인 김하나 작가의 학창 시절을 통해 가장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다.
목차『배역과 진짜』中
"중학교 3학년 때 반장이 되었던 사건은 내 성격을 많이 바꾸어놓았다. 아니, 실제로 성격이 바뀌었다기보다는 바뀐 척하며 지냈던 것 같다. 이후로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내리 반장을 하게 되었는데, 점점 학교에서의 캐릭터와 나의 실제 캐릭터가 유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생략) 나는 학교에서만 '반장'이라는 배역을 맡고 있을 뿐, 학교 밖에서 다시 주눅 들어 버리는 나야말로 진짜 나였다."
"나는 서울말을 쓸 때면 또 새로운 배역을 맡은 것 같았다. 스무 살에 이 배역을 맡고서야 비로소 나에게 더 맞는 언어를 찾았다고 느꼈는데, (생략) 서울말을 쓰는 배역은 내 마음의 지형과 더 잘 들어맞아, 원래 생긴 대로의 나를 오히려 더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
<책읽아웃: 김하나의 측면돌파> 작사가 김이나 편
본인을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사람'으로 소개하는 김하나 작가는 산문 '말하기를 말하기'에서 효과적인 말 전달법에 대한 그녀만의 고찰을 공유한다. 분량은 짧지만 내용은 풍성하다. 단순히 불특정 다수에 해당하는 독자들을 타깃으로 '잘 말하는 법'에 대한 조건을 나열하지 않는다. 마치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다섯 살 터울의 언니(누나), 또는 철든 딸의 입장에서 한국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고픈 독자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넨다.
이 책을 완독한 것은 지난달이었다. 9월이 되어 두 번째로 정독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아껴' 읽고 싶은 글이었다. 우리 생활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말하기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 지난날의 '말 기억'들이 너무나 많이 떠올랐다. 다음 책장을 넘기기 전까지, 심지어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기 전까지도.
목차『에 예 네 음』中 세 번째 회상 (2020년)
한 방송사에서 연출직으로 일할 때이다. 당시 팀 인원에 비해 큰 프로젝트를 맡아 업무가 쏟아지는 지경이었다. 정해진 근무시간 없이 모든 스태프분들이 몇 개월 간 주말을 반납해야 했다. 새벽 3~4시까지도 휴대폰은 끊임없이 울려댔다. 직장인들이 갖는 카톡 업무 스트레스를 미리 체험했다고 할까. 하루는 지시사항을 확인하고도 미처 답장하지 못했다. 상대방은 소위 '읽씹'(읽고도 답장하지 않음)을 당했다고 느낀 듯했다.
"이런 거 대여 가능한지 알아볼래?" 17:48 (읽음)
...
"000한테 시킬게!" 17:49 (읽음)
"앗 네네! 저번 소품이랑 다른 건지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17:50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소품을 대여하는 목적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업체를 알아볼 때 참고하기 위해서다. 1분이 채 되지 않은 침묵이 상사에게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전달된 듯했다. 업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보다 즉각적으로 대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후로는 지시가 내려오면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기 이전에 먼저 답장부터 보낸다.
'에 예 네 음' 회차에서 작가는 유교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하는 한국 사회에서 손 웃어른이나 상사에게 공손함을 강조하기 위해 '네'를 붙여서 답하는 방식을 "네의 크레셴도 현상"이라 칭한다. 우리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웃픈'(웃기고도 슬픈) 사회 현상을 풍자하는 표현이 강하게 뇌리에 박혔다.
다시 읽어보고 싶은 표현을 볼 땐 절로 형광펜을 찾았다.
뉴스룸에서 볼 수 있었던 손석희 사장 특유의 '이에'가 "취재의 정확성을 인증하는 도장 같았다."는 비유에도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 지망생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언젠가 마이크를 차고 인터뷰를 진행한다면 꼭 한번 따라 해 보고 싶은 추임새이다.
최근 MBC 놀면 뭐하니에서 화제가 된 비의 추임새 "Yesssss!"를 분석한다면?
산문이 참 재미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말'과 관련된 소소한 일상 에피소드를 그녀만의 언변으로 풀어낸다. 제대로 소화하기만 한다면 어디 가서 따라 하고 싶은 말하기 모범답안들이 가득하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듯한 연이은 산문들은 책을 든 두 손에 계속해서 완독해야 할 이유를 쥐어준다.
이 포스팅은 서문 중에서도 일부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말하기에 대한 김하나 작가의 좀 더 본격적인 고찰은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진지한 내용에 앞서 독자 스스로 과거의 '말 기억'들을 되짚어볼 수 있도록 돕는 서문이야말로 이 산문을 읽는 묘미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서문에서 "말하기에 대한 생각을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라고 밝힌다. 그녀의 산문을 읽으면서 나 또한 목소리를 낼 용기를 얻었다. 훗날 어디선가 마이크를 건네받는다면 나는 세상에 묻혀 있는 수많은 목소리들에게 그것을 돌리고 싶다. 내가 기자가 되고픈 새로운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