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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 머리 앤 May 14. 2023

똑똑한 애들은 왜 그렇게 보수적이야?

"저는 여러분들이 실험적인 주장을 자유롭게 던져 주었으면 좋겠어요."

오랜만의 대면 발표. 

1시간 남짓의 시간을 온전히 발표로만 채워야 하는 수업이었던 지라, 팀원들 사이에서는 어떤 내용으로 발표를 구성해야 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다. 그런데 발표 방향성에 대해 조언을 해주시던 조교님은, 정작 내용적인 측면에 대한 조언보다도 '실험적인 주장'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다. 오히려 많이 배울수록, 자신만의 주장을 강하게 표명하는 것에 거리낌을 느낀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지난 2년 간의 학교 생활을 돌아보면, 나 역시 이러한 지적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 같다. 

러시아 명작의 이해를 듣던 신입생의 나는 삶의 본래성과 자유라는 가치에 대한 나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양명후학의 사상적 변화를 논하는 중국근현대 철학을 수강했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전 처음 왕수인을 접해보는 지라 양명후학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하나의 용어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해석이 어떻게 상이한가를 학자들의 철학적 입장과 연결하여 작성해보기 위해서 노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많이 부족한 글이었지만, 그래도 그 때에는 책을 읽고 그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뒤, 글을 써나갔다. 


그러나 조금씩 배워갈 수록 오히려 두려운 것이 많아졌다.

어느새 보고서를 작성할 때가 되면, 내가 잠깐 생각한 것을 그 누군가가 생각하지 못했을 리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것은 못했던 것이 아니라 기각되었던 것이 아닐까? 와 같은 생각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나의 가장 주된 업무가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문득 떠오른 생각들이, 또는 나의 해석이 과연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2차 문헌을 수 십건씩 읽다보면, 더 이상 나의 의견이랄 것은 없고 결국 기존의 수많은 의견을 재생산하는 것에 그치게 된다. 정몽을 읽고 썼던 마지막 레포트에서, 교수님이 본 보고서는 그냥 기존의 의견을 잘 읽고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평을 남겨주셨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 나아가 본인은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순자와 장재의 주장이 동일하다는 주장을 보다 강하게 펼쳤다면 훨씬 흥미로웠을 것이라는 평과 함께. 


그러니까 철학을 배우면서, 나는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고 싶어서 철학을 선택했는데,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나의 주장마저도 검열해야 꺼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한국의 교육이 문제라는 상투적이면서도 중요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고 말이다. 한국인들 대부분이 뒤쫓기에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반면 최초의 영역에서 최초의 질문을 던지는 데에는 참 부족하다는 공통점을 가지는 것은 경로에서 이탈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나,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틀에 박힌 의견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는 교육의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거시적인 문제를 지적하기보다는 내가 배운 철학을 통해 다른 얘기를 해보고 싶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철학자 이이는『중용장구서』속 인심도심문답에서 리발과 기발에 대한 주희의 논의를 의도적으로 재해석하여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道設]'이라는 독특한 학설을 펼친다. 물론 이이가 주희의 의도를 몰랐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는 자신만의 생각이 있었고, 그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주희의 성리학을 과감하게 재해석했다. 그러나 누가 그런 그에게 '원문 해석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다'라고 비판할까? (물론 그의 숙적들은 그렇게 비판했겠지만,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므로 넘어가도록 하자.) 현대에서 이이 철학을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이가 기존의 해석에 얽메여 자신의 생각을 제한하지 않았기에 그의 학설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만약 그가 기존의 그의 사상은 담습하는데 그쳤다면 그의 사상은 퇴계학파와 구분될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조선 후기를 아우른 율곡 학파의 등장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 말이 생각없이 아무 주장이나 던지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생각의 시간을 늘리자. 책을 읽고 난 뒤, 나의 생각이 정형화된 해석에서 벗어날까봐 전전긍긍하며 바로 해석집을 보기보다는, 그 책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생각해보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쓰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끊임없이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내가 가진 것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가공하고 표현하는 것에 집중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나의 생각이 꼭 정형화된 생각과 일치해야 할 필요는 없음을 스스로에게 일깨워준다면, 마침내 우리에게 배움이 '생각을 제한하는 틀'에서 '확장의 도구'로 전환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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