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의 기획은 왜 이다지도 '오만'하게 느껴질까?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목적이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걸작 중 한 작품인 『죄와 벌』에는 독특한 신념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삶의 자유를 보장해주겠다'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수단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고 그 정의는 오직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주인공 말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실제로 '벼룩과도 같은 존재'인 노파 알료나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과연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이하 로쟈)는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 성공했을까?
로쟈의 계획은 처음부터 성공하지 못했다. 시작부터 계획에도 없던 알료나의 동생, 리자베타를 살해하게 되었으며 스스로의 감정을 추스르는 데에도 실패했다. 결국 그는 자수를 통해 자신의 사회 실험이 철저히 실패했음을, 그리고 그것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오만한 통찰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한다.
얼마 전 마블의 영화 'Guardians of the Galaxy Vol. 3'를 보며, 문득 라스꼴리니코프가 떠올랐다. 사적인 신념을 가진 개인들을 우주의 'Guardian'으로 내세우는 마블의 기획이 로쟈의 사고방식과 상당히 닮아 있다고 느껴졌기에.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스스로를 'guardian'이라 칭하며 우주를 지켜야만 하는 자신들의 임무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친구인 로켓을 살리기 위해서, 다음에는 과거에 자행되었던 끔찍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또 다음에는 불쌍한 생명체들을 살리기 위해서... 용서도 처벌도, 모두 정의의 수호자인 guardian들의 판단에 의해서 행해진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사용되는 폭력은 이러한 숭고한 목적 하에서 끊임없이 정당화된다.
그러나 그들의 신념이, 그들의 정의가 절대적인 선임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너의 검엔 수천의 피가 묻었다. 너에겐 적이었으나 그 또한 신의 피조물.
홀로 불멸을 살며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지켜봐라.
그 어떤 죽음도 잊히지 않으리라.
전쟁터에서 적으로 칭해지는 상대를 죽이는 것, 그것은 군인에게 당연한 행위이자 유일한 도덕이다. 그렇기에 전쟁터에서 상대를 죽인 것으로 처벌을 받는 군인은 아무도 없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적은 절대적 악인가? 우리 편에게는 절대 악일지라도, 상대 편에게는 그저 자신과 함께 전쟁터에 끌려온 존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전쟁에서 군인들이 상대편을 죽이는 것이 군인 개개인의 잘못임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렇게 선과 악의 분명한 구도로 나눌 수는 없음을, 그리고 내가 절대적인 정의라고 믿는 것이 때로는 매우 알량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회의 악으로 여겨지는 존재를 제거한다.' 는 생각은 상당히 위험하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악도 절대적인 선도 존재하지 않으며, 설사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를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악을 제거한다고 해서 '선의 세상'이 도래하는 것 역시 아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러한 위험한 전제들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념을 실현하는 데에 항상 성공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은연 중에 그 전제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러한 나의 감상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며, 내가 지나치게 마블의 기획을 확대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마블의 영화를 소비하면서, 이러한 사적 정의의 실현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해지지는 않았는지 한 번쯤은 생각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이만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