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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켠서 Aug 20. 2022

보면 볼수록, 참 새롭단 말이야

도시의 맛, 프놈펜

다음날 아침.

체크아웃을 하고 PCR 검사를 받으러 가기 전 현금을 더 인출해야 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달러 인출 시 BRED 은행이나 Vattanac 은행의 현금인출기를 사용하면 수수료가 4달러라길래 두 은행을 찾아 나섰다. 캄보디아에서 ATM기기를 이용할 때마다 5달러의 수수료를 내야 하는 게 얼마나 아까웠는지 모른다. 고작 1달러 차이지만 돈 뽑는데 쓰기에는 1달러도 아까운걸.


12시에 체크아웃을 마치고 오토바이에 올랐다. 지도를 보니 BRED 은행 ATM이 그나마 가까운 곳에 있길래 거기서 현금을 인출하려고 운전해 갔는데, 없는 거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봐도 ATM기는 보이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는 종종 지도에는 있는데 막상 가보면 없어졌다거나 아예 위치 설정이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했다. 우리 둘 다 그걸 잘 알고 있는데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더위가 얼마나 살인적인지 다시 앉은 오토바이 안장이 벌써 햇볕에 달궈져 뜨거웠다.


다른 지점을 찾아갔는데 기계에 달러가 부족한지 인출이 되지 않았다. 이 더위에 짐까지 다 바리바리 싸들고 은행을 찾아다니는데 얼마나 지치던지. 오토바이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이렇게 더운 날 오토바이도 없이 은행을 찾아다녀야 했다면 진짜 대낮부터 티격태격 싸우게 됐을 거다.  


다음에 찾아서 들어간 곳은 각기 다른 은행의 현금인출기가 모여있는 곳이었는데, 운이 좋게도 거기에 BRED 은행의 현금인출기가 있었다. 수수료는 4달러. 이렇게 이 ATM기를 찾아 헤맨 이유가 고작 이 1달러를 아끼기 위해서라는 게 조금, 아주 조-금 허탈했다. 차라리 씀씀이를 줄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현금도 찾았으니 검사를 받으러 가기 전에 밥을 먹기로 했다. 지도 앱의 안내를 따라 내가 미리 검색해둔 브런치 집을 찾아갔는데 여기도 없어진 건지 주변을 빙빙 돌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주변에 있는 다른 카페로 방향을 틀었다.


'템플 커피 앤 베이커리 (Temple Coffee n Bakery)'라는 곳인데 외관부터 그 존재감이 엄청나 나중에 가보려고 저장해 뒀었다. 주차장도 있고 오토바이까지 발레파킹을 해주는 고급 카페다. 꼭대기에 루프탑이 있는 큰 규모의 삼층짜리 건물이 나무와 덩굴식물로 뒤덮여 정글같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게 멋졌다.

2층은 통창이었는데, 덩굴 식물이 커튼 역할을 대신하고 있어 식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세지 않고 은은했다.

-여기 분위기 진짜 좋다.

동선도 꼬이고 무거운 짐과 더위 때문에 기분이 언짢았던 우리였지만 그렇게 오게 된 이 카페가 정말 예뻤던 탓에 그런 짜증도 꼬깃꼬깃 접어둘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사람이 정말 많았다. 평일 낮에 이렇게 사람이 많다니. 아무래도 근처에 회사가 있는지 오피스룩의 현지인들과 미팅 중인 외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브런치도 판매하는 곳이라 다들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러 온 것 같기도 했다.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사람들도 많이 보이는 것이, 우리가 다른 도시에서 방문했던 카페들과는 사뭇 달랐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꼬질꼬질한 큰 배낭들을 메고 지친 모습으로 들어오는 우리는 누가 봐도 배낭여행객이었다.  


하필이면 사람이 몰리는 시간대인지 줄을 서서 주문을 하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안 그래도 오래 기다렸는데 내 바로 앞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무엇을 먹을지 모르겠다며 몇 분을 메뉴만 들여다보고 있던 탓에 정말 참을성이 바닥날 뻔했다. 하지만 별 수 있나, 기다려야지. 우리는 크루아상 샌드위치와 아이스 라떼를 주문했다. 가격에 비해 양이 작다고 생각했는데 다 먹고 나니 배가 든든했다.


아침도 먹었으니 이제 PCR 검사를 받으러 갈 시간이다. 마침 검사를 받으러 가려고 찾아둔 병원이 우리가 오토바이를 빌렸던 업체와 가까워서 검사 후에 잠깐 들리기로 했다. 원래 4일 전에 오토바이를 반납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체납된 금액이 있었다. 안 그래도 미리 업체에 연락을 드리고 양해를 구해 대여기간을 늘려두기는 했다.


병원 앞에 도착하자 경비아저씨들이 오토바이를 주차할 곳을 알려주셨다. 인터넷에서는 줄이 되게 길 수도 있다고 했는데 막상 가보니 그렇지 않았다. 오전에 검사를 받을 경우 당일에 확인서를 받을 수 있어 오히려 오전에 대기줄이 길고 그다음 날 확인서가 발급되는 오후 시간대 검사는 상대적으로 한가한 듯했다.


대기장에는 외국인 두 명이 앉아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셔츠가 다 젖도록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이 시간대 검사를 받으려면 타는 듯한 더위를 견디며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다들 오전 검사를 선호하는 건가 싶었다. 캄폿보다 프놈펜이 훨씬 더 덥게 느껴졌다. 물론 캄폿이랑 캡도 정말 덥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이날의 더위는 정말 살인적이었다.


쭈뼛거리며 검사소 쪽으로 다가가는 내게 직원이 다가오더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책상에서 서류를 작성하라는 듯한 그의 몸짓을 따라 의자에 앉은 뒤 볼펜과 종이들을 건네받았다. 앞장을 읽고 뒷장으로 넘겼는데 '코로나 검사를 위한 동의서'가 눈에 띄었다.


영어로 적힌 항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데 뭔가 이상했다. 마지막 항목에 이런 문장이 있는 것이다.


"내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렸다가 회복되었다는 걸 음성 확인서를 통해 증명한 후에도 추가로 14일을 더 격리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이게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람. 코로나 완치자에게도 이런 식이면, 나는 시설로 보내지는 거 아냐?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미 격리도 했지만 출국 전까지 PCR 검사가 양성으로 나올 것 같아 미리 확진 확인서를 떼고 10일을 기다린 후에 한국에 들어가려고 검사를 받으려는 건데, 이제 와서 시설로 보내지면 어떡해?


당황스러웠다. 급하게 A를 불렀다. 내가 잘못 읽은 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의서에 적힌 항목을 읽어본 A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 나가자.

A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 다시 올게요.

안내를 해 주시던 직원분께 양해를 구하고 검사센터를 빠져나왔다. 정신이 얼얼할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이때 PCR 검사에서 양성이 나왔더래도 격리시설에 끌려들어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백신 접종이 시작되기도 전에 만들어진 동의서 양식을 계속 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캄폿 병원의 의사 선생님도 일주일까지는 호텔에 머무르라고 했지 시설 격리에 대한 말은 일체 하지 않았을뿐더러 대사관에서도 자가치료를 하라고 말씀하셨으니까. 게다가 나는 이미 알아서 격리도 끝냈고 간질간질한 목 때문에 새어 나오는 잔기침 이외의 다른 증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세계 각국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걸어 잠궜던 국경을 다시 풀고 있었고 그건 캄보디아도 마찬가지였다. 이날로부터 며칠 뒤 캄보디아 정부는 해외 입국자의 입국 제한을 대부분 해제한다는 발표를 했다. 우리가 입국할 때까지만 해도 PCR 음성 확인서는 물론이고 공항에서 신속항원검사를 받은 뒤 음성이 떠야 격리를 면제받을 수 있었는데 그런 조건들이 다 폐기된 것이다. 그만큼 캄보디아 정부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에 관대한 태도로 대응 중이라는 게 엿보이는 소식이었다.  


미리 이 소식을 알 수 있었더라면 그 무시무시한 주의사항이 붙어있었더라도 검사를 받았을 텐데.


그렇지만 그때 우리는 '만에 하나 혹시'라는 게 중요했다. 더 이상의 걱정거리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국인도 아닌 데다가 크메르어도 못하고, 게다가 너무 당황스러웠기에 우리끼리 상의라도 해보자는 심산으로 일단 자리를 뜬 것이었다.


계획이 꼬여버린 것 같아 마음이 착잡했다. 가족들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했다. 이제는 출국 전 받을 PCR 검사에서 음성이 나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방법밖에 없었다.


새로운 숙소에 체크인을 하기 전 오토바이 렌탈 업체에 먼저 들렀다. 원래 반납일보다 4일이 늦어졌기에 체납된 요금을 치러야 했고 혹시 더 좋은 오토바이가 있으면 그걸로 새로 대여를 하기로 했다. 친절한 직원들과 마스코트나 다름없는 강아지 시루는 여전했다.


내가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A는 직원들과 함께 다른 오토바이 두 대를 운전해보고 돌아왔다. 어떠냐고, 좋은 게 있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원래 우리가 타던 오토바이를 계속 타는 걸 선택했다. 확실히 손에 익기도 했고 훨씬 튼튼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친절한 직원들은 흙먼지에 때가 잔뜩 탄 수키(우리가 붙여준 오토바이의 애칭)를 물로 잘 씻겨주기까지 했다.


체불금을 포함해 출국일 전까지의 대여료로 80달러를 계산하고 계약서도 다시 작성했다. 여행 내내 헐거워 불편해했던 A의 헬맷도 더 잘 맞는 헬맷으로 바꿔 빌렸다.


사실 이번에 새로 예약한 숙소는 내가 프놈펜에 처음 왔을 때부터 눈독 들이고 있던 곳이었다. 로드트립을 마치고 프놈펜으로 돌아왔을 때,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묵으면 좋을 것 같아 생각해 둔 곳들 중 하나였다. 북유럽풍의 깔끔한 실내 인테리어에 통창으로 보이는 엄청난 뷰까지 너무나 마음에 들었지만 다른 숙소들보다 가격이 비싸서 고민이 됐다. 그럼에도 여기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세탁실이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 당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세탁기였다. 정말 간절히 빨래를 하고 싶었다. 자가격리를 했던 숙소들은 세탁기가 없었기 때문에 시아누크빌에서 했던 빨래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2주 내내 직접 옷을 빨아 입는 수밖에 없었는데 흙먼지가 잔뜩 낀 옷들은 손빨래로만으론 쉽게 깨끗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숙소를 고를 때 가장 중요했던 건 세탁기의 여부였다. 게다가 이렇게 좋은 곳에서 묵을 수 있다니 일석이조잖아!


물청소를 받아 한껏 깨끗해진 오토바이와 함께 렌탈 업체에서 나온 우리는 안내된 주소를 따라 이동했다. 전날 밤에 방문했던 공원과 프놈펜 독립기념탑을 지나 야경이 예뻤던 빌딩들이 즐비한 동네로 들어가고 있는데 뭔가 기시감이 들었다. 주위로 높게 세워진 빌딩들은 모두 중국어로 된 광고판이나 간판을 달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여길 지나가면서 캄보디아가 아니라 싱가폴 같다고, 프놈펜에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다며 크게 놀랐었는데 환한 대낮에 보니 시아누크빌의 잔상이 느껴졌다.


물론 시아누크빌처럼 텅 비었다거나 기이한 느낌은 아니었다. 프놈펜에도 차이나타운이 있구나. 이렇게 깨닫고 보니 중국 가게들과 카지노, 건물들까지 중국 자본으로 세워진 빌딩들이 정말 많이 보였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왜 몰랐지?


-여기 우리가 아는 프놈펜 맞아?

A도 나도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처음 프놈펜에서 머물 때 우리가 느꼈던 도시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주위의 풍경에 그저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 당시 국립 박물관 주변에서 지낼 때에는 오히려 주변에 유럽식 레스토랑과 건물들이 많아 색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5분 떨어진 이 동네에 오니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전날 본 야경

아무튼, 구경도 구경이지만 얼른 짐을 내려놓기 위해 체크인을 해야 했다. 문제는 적힌 주소대로 잘 찾아오기는 했는데 도대체 호텔이 어디 있다는 건지 모르겠는 거다. 잠시 오토바이를 세우고 지도를 A에게 넘겼는데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A가 우리 바로 옆에 있는 거대한 빌딩을 가리켰다. 이 빌딩 안에 있나 본데?


A가 가리킨 빌딩은 정말 그 자체로 거대했다. 서울에서도 보기 힘든 규모의 건물이었다. 위로도 높을 뿐 아니라 가로로 넓게 펼쳐진 모양새가 웅장한 느낌까지 들었다. 심지어 여러 호텔들이 이 건물 안에서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았다. 큰 건물인 만큼 출입구도 많아서 어디로 들어가야 우리가 예약한 숙소를 찾을 수 있을지 막막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건물을 빙 둘러보는데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경사로를 발견했다. 자동차 전용 주차장과 오토바이 전용 주차장이 분리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주차료 차이가 꽤 컸다. 오토바이 주차요금은 하루 종일 세워도 1-2달러 정도인데 반해 자동차는 시간당 그 정도 요금을 받는 듯했다. 오토바이 전용 층은 훨씬 위에 있어서 주차장 경사로를 끊임없이 올라가야 했다. 언제라도 자동차가 튀어나올까 봐 초긴장 상태인 나와 달리 A는 경사로가 평평해서 운전이 엄청 부드럽다며 신나 하더라.  


10층을 넘게 올라가고 나서야 오토바이 전용 주차장을 발견한 우리는 티켓을 끊고 주차를 마친 뒤 엘리베이터를 찾아 탔다. 몇 층 인지도 모르고 탔는데 다행히 버튼 옆에 숙소 이름이 붙어 있었다.


무거운 짐을 반나절 내내 메고 돌아다니느라 땀범벅이 된 우리는 겨우 겨우 체크인을 하고 드디어 숙소에 들어올 수 있었다. 방은 기대보다 더 멋졌다. 통창으로 화사하게 들어오는 햇빛,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 차분하고 아늑한 느낌의 인테리어까지! 엄청나게 고층인 데다가 메콩강이 보이는 뷰가 너무 멋진 곳이었다. 우와. 이렇게 높은 곳은 되게 오랜만이었다.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 풍경을 볼 수 있다면 하루쯤 묵어볼 만한 곳이다.

수영장도 있고 헬스장도 있다길래 숙소 카운터에서 키를 받아 쪼르르 구경도 다녀와봤다. 세탁실은 꽤 구석에 있어 찾는데에 애를 먹었지만 오랜만에 드디어 빨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별 거 한 것도 없는데 빨래를 끝내고 나니 저녁때가 다 됐다. 나는 또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았다. 확실히 코로나를 앓고 난 후 쉽게 피곤해졌다. 저녁은 배달을 시켜먹기로 했다. 주변이 차이나타운이나 다름없다 보니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이 많은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중식이 아니라 햄버거 세트를 시켜먹었지만 말이다. 음식을 받으러 1층까지 다녀온 A는 사람이 너무 많아 배달기사를 찾기가 힘들었다며 투덜거렸다.


나는 그렇게 아팠던 이후 후각을 잃었다. 흔한 코로나 후유증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막상 냄새가 맡아지지 않는다는 건 정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분명 한식당에서까지는 냄새가 맡아졌던 것 같은데. 아는 맛, 아는 냄새로 덧씌워진 내 착각이었나.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치킨버거는 꽤 슬픈 맛이었다.


사실 이날 나는 마음이 되게 복잡했다.

아직까지 멋대로 튀어나오는 잔기침에 사람들 눈치가 보이기도 했고 급격히 약해진 몸이 적응이 되지 않아 쉽게 지치고 짜증이 났다. 게다가 6일 남은 출국날짜가 불안했다. PCR 검사에서 음성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루 종일 이것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답답한 내 마음을 아는지 A는 나의 잦은 짜증과 칭얼거림을 꽤나 묵묵히 받아주었다.


내가 침대에 누워 쉬는 동안 A는 밀린 공부를 해야겠다며 노트북을 들고 와 앉았다. 학기 중인 A는 어제도 오늘도 평일이면 늘 아침에 한국 시차로 수업을 들어야 했다. 본인도 피곤하고 지칠 텐데 일찍 일어나기 싫다고 작게 불평할 뿐 어제 그 긴 시간을 운전하는 데도 짜증 한 번 내지 않는 그애가 대단했다. 가끔 수업을 켜 두고 조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저녁을 먹고 쉬던 우리는 드라이브를 다녀오기로 했다. 어쩜 이렇게 새롭지? 캄보디아의 첫인상과는 너무 다른 이 도시의 모습이 신기했다. 다만 무분별하게 유입된 중국 자본에 의해 유령도시가 된 시아누크빌이 자꾸 생각나 프놈펜의 이런 이면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어제는 우리 둘 다 프놈펜이 보여주는 색다른 모습에 매료되었었지만 그래서 오늘은 조금 착잡하기도 했다.


중간에 중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과일가게에 들러 생과일주스도 한잔 사 먹었다.

제출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며 A가 커피를 마시고 싶대서 주변에 카페가 있나 찾아보는데 시간이 늦어서인지 다들 문을 닫았다. 저녁 8시에 테이크 아웃이 가능한 카페가 없다니. 결국 '칩몽 노로 몰(Chip Mong Noro Mall)'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리기로 했다. 캄보디아에서 스타벅스는 처음 가보는 건데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이었다. 라떼 한 잔에 4달러나 냈으니 지금 환율로 따지면 한국에서 사 먹는 스타벅스 커피보다 비싸다.


A가 마실 커피를 포장해서 나온 뒤 우리는 스타벅스 바로 옆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봤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구경이라도 하려고 별생각 없이 들어간 건데 규모가 되게 크다. 잠깐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A를 못 찾을 뻔했다. 그런데 엄청난 걸 발견했다. 아이스크림 코너가 몽땅 한국 아이스크림들로 채워져 있을 줄이야! 심지어 한국에서도 보지 못한 다양한 맛의 아이스크림들을 보자 신기하고 반가워 저절로 신이 났다. A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아이스크림도 있어 그걸 두 개 산 뒤 다시 숙소로 향했다. 저녁까지 푹푹 찌는 날씨에 혹시 가는 길에 다 녹아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살짝만 녹았다. 방으로 돌아온 A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침대맡에 기대 과제를 하는 동안 나는 그 옆에 누워 쉬었다. 그러다 살짝 심심해져 옆에 있는 빈 종이에 우리가 좋아하는 동물들을 끼적거렸는데 내 그림이 엄청 마음에 들었는지 과제 중이던 A가 자기도 그려보고 싶다며 연필을 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연필을 넘겨준 뒤 그애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평화롭다, 정말. 한껏 집중했는지 연필이 종이를 사각이는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기침약이 졸린 걸까, 자꾸 잠이 쏟아졌다.


내가 이 편안함 속에서 졸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A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가끔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면 나는 하나도 안 졸린 척 뭉개지는 발음으로 대답을 하려고 애썼다.


그림을 다 그린 A가 웃으며 내게 그가 그린 카피바라를 보여주었다. 그림에 집중했는지 내가 조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이렇게 그림을 그려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며 A가 배시시 웃었다. 꽤 재밌었는지 그는 이번엔 노트북에 고양이 사진을 띄워두더니 고양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피곤했던 그날 밤, 함께라서 차분하고 따듯했던 기억의 조각은 그래도 꽤나 선명하게 남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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