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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내는살림 Oct 18. 2023

놔두면 쓸 줄 알았지

6개월 동안 있는지도 몰랐던 베이킹도구들을 정리하며 한 생각들

그래, 비움이 답이다!라는 생각으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것들을 바라본다.

아깝지도 않고 감흥도 없는 것들을 비울 때에는 1초도 고민하지 않지만 문제는 아직 멀쩡한 물건. 특히 비싼 가격을 주고 산 것은 특히 더 미련이 남는다. 어딘가에 쓸 것 같은 느낌으로 평소에는 발휘하지 않았던 창의력을 발휘하지만 굳어버린 머리는 아무것도 생각해내지 못한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언젠가는 쓰겠지'하는 마음으로 미래의 나에게 선택권을 넘겨버린다.


지난주에는 주방 정리를 하면서 친정에서 가져온 베이킹도구들을 찾았다. 아이들 간식용으로 식빵도 만들고 파운드케이크도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으로 가져왔는데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다. 베이킹을 배우지 않았지만 만들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그리고 이 도구들이 있다면 만들어내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했었다. 문제는 그 시간이 언제인지 나도 알지 못한다는 것?!


 몇 개월 전 정리하며 그래도 놔두면 써먹을 때가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비우지 않았지만, 다시 몇 개월이 지날 동안 한 번도 꺼내지 않은 채 햇빛도 들지 않은 곳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베이킹 도구가 없어도 되는 물건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존재 자체가 생각나지 않았고, 빵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도 없었으니 말이다.


'베이킹 도구들 언젠가 쓰겠지'라는 말에는 나에 대한 기대가 담겨있었다. 빵을 만들어 먹을 거라는 것, 지금은 아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럴 마음과 능력이 생길 거라는 기대. 고소한 빵 냄새가 집안 가득 퍼지고 앞치마를 두른 채 아이들에게 직접 만든 빵을 간식으로 내어주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은 바람도 있었다. 베이킹 도구들을 비우면 그런 기대와 바람이 사라질 것 같은 마음에 당장 사용하지 않더라도 두고 싶었나 보다.


빵을 만들어 먹고 싶은 마음, 직접 만든 빵을 간식으로 주는 엄마의 이미지

vs

베이킹 도구가 차지하는 자리에 필요한 다른 것을 두거나 여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텐데, 그걸 볼 때마다 '해야 하는데..' 은근히 내가 나에게 주는 스트레스


무엇이 나에게 좋은 것일까 두 가지를 저울질해 봤다.

맛있는 빵은 사 먹으면 되고, 빵은 직접 만들진 못하더라도 맛있는걸 사서 간식으로 줄 수 있고!

공간을 여유롭게 사용하면서 스트레스 '덜'받는 내가 되고 싶어서 나름 과감히 비우기로 결심했다.


결혼 전 일할 때 사용했던 만들기 재료들.

구형 청소기 거치대

결혼 전에 입었던 블랙원피스

희망찬 마음으로 샀던 유아전집


'언젠가 쓰겠지'하는 마음속에는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없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과 지금은 하지 않는 일이지만 언젠가 다시 할 수 있지도 않을까 하는 미련, 쏟아부었던 과거의 시간과 노력을 잊고 싶지 않은 마음,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추억, 좋은 것을 주고 싶은 엄마의 바람이 있었다. 한자리 차지하는 물건들을 보며 비울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이런 마음을 마주하고 해결하는 과정이었다.


정리하는 과정이 단순히 물건을 정리해서 여유로운 공간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나를 알아가고 인생을 정리하는 거라 말하고 싶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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