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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자라는알라씨 Jul 20. 2022

엄마도 되고 싶은 게 너무너무 많아

엄마의 꿈 이야기


한때 자주 가던 소아과 지하에는 마트와 서점이 있었다. 소아과 진료를 마치고 마트에서 장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점을 지나야 했는데 우연히 지나가다 카운터를 보니 ''서점에서 책 빌려드립니다''란 문구가 쓰여있는 걸 보았다. '이게 무슨 말이야? 서점은 책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라 책을 팔아야 이윤이 남는 곳 아닌가? 어떻게 서점에서 책을 빌리지?'란 생각을 했지만 나의 관심은 그때뿐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집에 도착해서도 서점에서 책을 빌려준다는 사실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해 우리 가족은 하노이로 출국했고 그날 서점에서 마주친 문구는 내 기억에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3년이 지난 작년 겨울에 아이들과 나는 남편보다 먼저 한국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코로나 시절 집콕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종종 서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어느 날 3년 전에 보았던 문구를 또 마주쳤다.


<<서점에서 책을 빌려드립니다.>>


'어? 맞다. 이거 내가 오래전에 알아보다가 말았던 거지? 새 책을 빌려준다니 마다할 일이 없지.'라고 생각하며 책을 빌리는 방법이 적힌 메시지를 사진으로 저장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집에 와서 찬찬히 알아봤다. 내용인즉슨 그 제도는 '희망도서 바로 대출' 서비스로 내가 사는 지역 도서관에 회원으로 가입하면 그 회원을 대상으로 도서관에 없는 책을 동네 서점에서 빌려주는 제도였다. 서점에서 대출을 하고 다시 반납하면 나중에 도서관에 비치되는 것 같았다. 소비자들이 동네에 있는 소규모 서점을 이용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려는 시의 의도가 담겨있어 좋은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좋아하는 나로서 이렇게 좋은 제도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가족 모두가 도서관 회원이 되면 한 사람당 2권씩 빌릴 수 있기에 총 8권의 새 책을 빌릴 수 있는 기회였다. 그동안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볼 때마다 종이 냄새 가득한 새 책의 향기와 매끈한 첫 페이지를 넘길 때의 뻣뻣함이 항상 그립곤 했다. 이 제도는 그런 나의 욕구를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 제도를 알게 된 후 동네 서점이나 인터넷 서점, 혹은 신문 기사에서 신간 책을 수시로 검색하는 버릇이 생겼다. 읽고 싶은 책이 도서관 앱에서 검색되지 않으면 무조건 '희망도서 바로 대출 서비스'를 신청했다. 나와 남편의 아이디로는 어른 책을, 아이들 아이디로는 아이들 책을. 특히 아이들 책을 고를 때에는 책의 제목에 더욱 신경 써서 골랐다. 기존에 알던 작가의 신간 책이 나오면 무조건 신청했고 제목에서 도전과 용기의 메시지를 주는 책을 주로 골랐다.


며칠 전에 방문한 서점에서 <<나는 되고 싶은 게 너무너무 많아!>>란 책을 발견했다. 제목 밑에는 그네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말괄량이 삐삐 같은 여자아이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얼른 도서관 앱을 열고 책이 도서관에 있는지 검색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아직 도서관에 들어오지 않은 책이 아닌가. 그래서 바로 '희망도서 바로 대출 서비스'를 신청했다. 삼일 정도가 지났을까. 서점에서 책 준비가 되었다는 알림이 왔다. '아이들도 나와 같이 새 책을 보면 좋아할 거야'란 희망적인 바람을 안고 동네 서점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얘들아 오늘 엄마가 너희들을 위해서 새 책을 빌려왔어. 너희들이 처음 보는 책이야. 우리 어서 재미있게 읽어보자!"


이럴 때 아이들의 반응은 항상 시큰둥하다. 아직 새 책이나 도서관에서 손 때 묻은 책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란 마음인가 보다. 

''너희들도 크면 알 거다. 빳빳한 종이를 처음 넘길 때의 느낌이 얼마나 좋은지.''

라며 아이들을 양옆에 끼고 책을 읽어나갔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여자 주인공은 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매일 다른 꿈을 꾸는 아이였다. 월요일에는 대통령, 화요일에는 수영장의 안전 요원, 수요일에는 우주 비행사 등. 이런 주인공의 이야기를 듣고 이 책을 읽는 친구들도 다양한 꿈을 꾸길 바란다는 아주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난 책을 읽어주면서 감이 왔다. 질문하기에 딱 좋은 책이란 것을. '책을 다 읽으면 요일별로 되고 싶은 게 뭔지 물어봐해야지'라고 생각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다행히 아이들도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꿈들에 호기심을 보였고 첫째 아들은 곧바로 스스로 다시 읽기 시작했다.


평소 질문을 싫어하는 아이들이지만 이때다 싶어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 얘들아, 우리도 서로 되고 싶은 거 생각해 볼까? 이 주인공처럼 월요일에는 과학자, 화요일에는 화가 이런 식으로 말이야."

다행히도 아들과 딸은 내 질문에 호기심을 보이며 각자 되고 싶은 게 뭔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케이. 내 의도가 적중했어'라고 내적 환호를 지르며 아이들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고심 끝에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여섯 살 둘째가 먼저 입을 뗐다.

"엄마 난 월요일은 공주, 화요일은 발레리나, 수요일은 가수, 목요일은 춤추는 사람, 금요일은 아이스 스케이트 선수, 토요일은 배드민턴 선수, 일요일은 화가가 될 거야.

이에 질세라 첫째도 거들고 나섰다.

"난 월요일은 수영선수, 화요일은 축구선수, 수요일은 탐험가, 목요일은 과학자, 금요일은 서핑보드 선수, 토요일은 곤충 관찰자, 일요일은 가수 할래."

아이들의 대답이 내가 예상한 것과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자 '내가 그래도 아이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구나'란 안심이 들었다. 그때 자기 대답을 마친 아들이 나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그럼 엄마는? 엄마는 뭐가 되고 싶은데?"

"엄마?"

이 질문이 나에게도 되돌아올 줄은 미처 몰랐다. 아이들의 관심 직업만 듣고 바로 다른 책으로 넘어가려던 나는 갑자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띵해졌다. '내가 되고 싶은 거라...... ' 한 개도 아니고 요일별로 일곱 개를 말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월요일은 작가, 화요일은 수영선수, 수요일은 뮤지컬 배우, 목요일은 요리사......" 나는 점점 끝으로 갈수록 되고 싶은 직업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별 관심도 없는 요리사를 시작으로 점점 이상한 직업으로 대충 마무리 지으려 안간힘을 썼다. 겨우 대답을 마치고 생각해 봤다.

'나도 학창 시절에는 요일별로 나열할 수 있을 정도로 되고 싶은 게 많은 소녀였는데......' 언제부턴가 꿈들은 풍선 터지듯 하나씩 터지더니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한 가정을 꾸리고 아내가 되고 사랑스러운 두 아이를 가졌지만 분명 내 꿈은 엄마가 아니었다. 그 많던 꿈을 향한 열정은 다 어디로 간 걸까.


하노이에서 가졌던 독서모임에서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는가? 어릴 때 되고 싶은 꿈은 무엇이었나?' 우리 4명 모두가 엄마였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노이에 오게 된 경우라 '내 삶에 만족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그리 긍정적인 답이 나오지 않을 거란 건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한 언니의 대답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난 솔직히 지금 내 모습은 내가 꿈꿔오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요. 나는 원래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다양한 외국문화를 체험하며 외국인 친구도 사귀면서 사는 게 꿈이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그냥 애 엄마네요."

그 언니의 한숨에는 인생에 대한 한탄 섞인 아쉬움도 함께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날 모인 우리는 현재의 인생이 내가 꿈꾸던 인생과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나도 한 때 꿈을 위해 전부를 올인하고 그 꿈을 달성한 시절이 있었다.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던 내가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다시 수능을 봤고 교육대학을 갔고 임용고사를 통과해 지금은 꿈에 그리던 선생님이 되었다. 거기까지는 내 목표를 충분히 달성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힘들고 못나 보일 때 그런 일련의 과정이 큰 부심으로 작동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다. 그다음이 없었다. 교사란 목표를 이룬 지 이미 십 년이 지났지만 난 아직도 그때의 환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난 꿈을 이뤘어. 됐어. 이제 된 거야.' 한동안 이런 상태였던 것 같다. 꼭 왕년의 스타가 현재의 성과 없이 과거의 영광만을 되풀이 이야기하며 그 시절을 못 벗어나는 것처럼. 내가 꼭 한물 간 스타처럼 느껴졌다. 나를 완전히 올인할 수 있는 그다음이 있어야 했지만 난 다음 꿈을 세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엄마가 된 후로 아이들이 무슨 꿈을 꿀 지, 내가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이젠 그건 아이들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나는 더 이상 서포트의 역할이 아닌 함께 꿈을 이뤄가는 롤 모델로 아이들에게 기억되고 싶다. "엄마 내 꿈은 잘 돼가고 있어. 엄마 꿈은 어때?" 하고 대화하는 그날을 상상해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진다.


만약 내가 작가라는 꿈을 이룬다면 그리고 책을 쓴다면 <<엄마도 되고 싶은 게 너무너무 많아>>라고 제목을 지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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