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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Mar 07. 2024

아일랜드 교사 가문에 시집을 왔는데요.

패밀리 비즈니스: A family of teachers.

내 남편은 아일랜드 사람이고 초등학교 교사이다. 내 남편의 직업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그의 가족을 소개하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남편의 아버지 즉 시아버지는 지금 살고 계시는 지역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다. 한국에서 교장이 되는 경로와 달리, 아일랜드에서는 교장을 뽑는 공고가 나고 교장 직에 적합하다고 판단된다면 2·30대에도 교장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시아버지께서는 짧게 2년을 평교사로 일하신 뒤 30대 이후부터 은퇴하실 때까지 30년 동안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이자 한 학교의 교장이셨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7명의 자식들 중 4명이 초등학교 교사이다. 첫째와 여섯째는 아버지처럼 30대부터 교장인데, 여섯째의 아내도 초등학교 교장이다. 셋째는 우리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의 교사이고, 막내인 내 남편은 10년 넘게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직업을 바꿔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다섯째는 그의 아내가 초등학교 교사이다. 또 16명의 조카들 중 대학생이 된 5명 중 4명이 초등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 이쯤 되면 ‘교사’라는 직업을 이 가족의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명명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초등학교 교사 출신이 또 교사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가득한 집안에서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함께 모이면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진다. 먼저, 누구라도 할 것 없이 말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어린아이들에게 말하듯 부드럽고 다정하게 상대방의 단어와 문장에서 잘못된 점을 찾아내서 지적하고 고쳐준다. 사실 이런 이유로 나는 결혼 생활 초기에 가족들과 대화를 나눌 때 평소보다 몇 배 더 조심하며 말을 해야 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말을 하면 형님들이나 동서들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말을 수정하거나 더 적합한 문장을 만들어 준 뒤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런 가족들의 모습이 고마웠던 것 같다. 아무래도 서른 살이 넘어 결혼을 하고 아일랜드에 와서 살자고 하니 내 영어가 완벽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했다. 한편으로 나는 영어를 포함해서 새로운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지 배울 준비도 되어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투가 내 말투가 될 수 없듯이 문법적으로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용하는 말투를 강요하듯 끊임없이 문장을 수정해주는 대화상대를 만날 때는 아무래도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또 6월말부터 8월말까지 이어지는 여름방학 기간에는 조카들뿐만 아니라 남편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의 휴가기간도 시작되는데, 우애 좋은 남편의 가족들은 이 기간 동안 거의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한다. 특히 한여름이면 밤 11시는 되어야 깜깜해 지는 탓에 ‘차 마시며 대화하기’를 사랑하는 이 가족들의 모임은 자주 자정이 가까워서야 겨우 끝나곤 했다. 


술도 마시지 않는 가족들이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커피나 홍차를 몇 잔씩 마셔가며 온갖 종류의 대화를 나눌 때면 나는 초 집중 모드로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화의 맥락을 놓쳐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을 수 없게 되고, 만약 누군가 농담이라도 하게 되면 혼자서 웃음 포인트를 놓쳐 어색하게 입술 꼬리를 올리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여름방학이나 2주 간의 방학이 있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기간이 끝날 때쯤이면 긴장 때문인지 나의 어깨 근육은 단단하게 뭉치곤 했는데, 사실 이 기간은 가족들에게나 휴가 기간이지 내게는 마치 영어 듣기 및 말하기 집중 평가 기간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날은 시아버지께서 나에게 질문을 하셨다. 

“너는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영어로 듣고, 영어로 이해하니?” 

그래서 나는 “아니오. 누가 제게 영어로 질문하면 한국어로 번역해서 이해를 해요. 그런 뒤에 답할 내용을 한국어로 만들고 다시 영문으로 번역해서 말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라고 대답을 했다. 

“그런 것치고는 정말 빨리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럼 너의 머릿속의 영어 스위치가 언제나 켜져 있다는 뜻이구나. 어휴. 어렵겠구나.” 라며 걱정해 주셨다. 


그 날 이후 시아버지께서는 더 자주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시고, 내가 하는 행동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어떨 때는 뜬금없이 내 이야기와 소식을 다른 가족들에게 큰소리로 알려주시기도 하셨는데, 그러시는 모습이 내게는 마치 소심한 초등생을 다른 친구들과 섞이게 해 주시려는 담임선생님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어느덧 나는 이런 콜린스 가족 안에서 10년의 시간을 보내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잔뜩 긴장하며 나누었던 가족들과의 대화 덕분에 나의 영어 실력은 꽤나 향상되어 왔던 것 같다. 덕분에 동네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면, 영어를 참 잘한다는 칭찬과 함께 동네 사투리를 어쩜 그리 잘 쓰냐는 칭찬 아닌 칭찬도 듣고 있으니 말이다. 또 가족들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결혼 후 남편의 콜린스 가족을 더 빨리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그만큼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유치원뿐만 아니라 초등학생의 학부형이 된 뒤 내가 자라온 곳과 너무나 다른 교육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준비물 구입, 숙제 봐 주는 것, 친구와 잘 지내도록 하는 것 등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것들이 고민되었을 때 가족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하나씩 해 나갔던 것 같다. 


결혼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각자 수 십 년간 다른 문화,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온 배우자와 수천피스의 퍼즐을 맞춰나가듯 그와 나의 삶을 맞춰나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삶 속으로 조심스럽게 또는 노크도 없이 들어오는 배우자의 가족들을 어찌되었든 맞이해야 하는 시간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나 역시 배우자의 가족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인데, 만약 그들만의 견고한 문화가 이미 만들어져 있다면 그것에 적응하기 위해서 때로는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 남편 가족의 패밀리 비즈니스가 가족의 분위기에 미친 영향들에 적응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었던 것이 사실이고, 앞으로도 계속 적응해야 할 것들이 남아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아일랜드에서 이러저러한 일을 겪어 왔으면서도 그럭저럭 연착륙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콜린스 가족들의 직업적 특성에서 기인한 다정함과 세심함 덕분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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