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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Dec 29. 2023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한 사회복지학생의 비닐하우스 방문기

그날도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책상에 앉아 부지런히 논문을 쓰고 있었다. 정신없이 녹취를 풀고, 통계 데이터를 정리하다 보니 배가 고파졌고, 시계를 보니 2시 30분이었다. “어휴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되었나? 점심으로 뭘 먹지?”라는 생각을 하며 등지고 앉았던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며칠 전 LED 백열 형광등으로 교체한 뒤 방안이 대낮같이 밝아진 것 때문인지 고개 돌려 바라본 창문 밖은 기대했던 햇살 가득한 대낮이 아니라 칠흑 같은 어두움이 내려앉은 새벽 2시 30분이었다. 나는 옥상으로 나가서 아직도 환한 도심의 불빛을 바라보며, 이렇게 시간이 깊은 줄도 모르게 공부하는 계기가 된 목화꽃 할머니의 그 새벽을 또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나와 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던 나는 그야말로 ‘고학생’이었다. 반드시 장학금을 받아야 했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나는 전공과목이었던 ‘사회복지학’에 꽤나 진심이었기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기도 했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동생들이 취업과 군복무를 앞두게 되자 다행히 한숨 돌릴 수 있게 되면서, 당장이라도 취업을 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겠지만 대신 나는 대출을 받아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교과목에서 ‘빈곤론’을 발견하고, 내가 빠져버린 ‘가난’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헤쳐 나올 수 있을지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실로 ‘궁핍’ 따위는 경험해 본 적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이 강의실에 앉아 벌이는 ‘빈곤’에 대한 허울뿐인 논의들 안에서 나는 그 어떤 답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논문학기가 시작되었다. 놀라운 일도 아니었지만 나는 논문을 진행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해 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에 체력적으로 한계가 오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게다가 그즈음에 한 선배가 공부는 먹고사는 것을 고민하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나에게 궁핍하게 살면서 공부할 거면 차라리 그만두고 어울리는 일을 찾아보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날 충고를 빙자하며 그 선배가 날린 비난의 말은 나의 자존심을 바스러지게 했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삶에 대한 의욕마저 꺾이게 했다.

‘도대체 나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몸도 마음도 황폐해져 가던 나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학과 방침 상 당장 현장실습 준비를 해야 했다. 연구실 동기들은 모두 국책 연구원이나 국제기구로 실습지를 선정했지만 웬일인지 나는 그쪽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빈민 운동을 하는 단체에서 실습생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결국 그곳을 실습지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후 나는 6개월 간 쪽방 마을, 달동네의 다세대 주택들, 비닐하우스 마을 등을 다니며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도우며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어느 날, 가정방문 간호사님과 비닐하우스 마을을 방문하였다. 그곳은 이전에 화훼용으로 사용되던 비닐하우스 안에 수십 개의 칸막이를 막아 방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월세로 임대를 해 주고 있던 대단위의 마을이었다. 간호사님의 방문 계획에 따라 여러 세대를 방문한 뒤 마지막 세대에 도착했을 때 입구의 문을 두드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어둑한 방 한가운데 하얀색 앙고라 카디건을 입고 곱게 넘겨 쪽을 진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마치 목화꽃 같은 모습의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다.  할머니께서는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전혀 손을 대지 않으신 것 같은 밥상을 가리키며 우리에게 더운데 수박을 먹어보라고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그 집을 나온 뒤 간호사님이 할머니의 사정을 말씀해 주시길, 며칠 전 간병사인 딸이 야간병원에 일을 나갔을 때, 당뇨로 시력이 약하신 할머니께서 공동 재래식 화장실에 혼자 가셨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셨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화장실에서 빠져나오시려 발버둥도 쳤지만 소용이 없었고, 소리쳐 도움도 요청하셨지만 밤새도록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아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발견되셨다고 했다. 그 충격으로 그날 이후부터 할머니는 화장실을 가지 않으시려고 저렇게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방안에만 계신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실습을 끝내고 옥탑 방으로 돌아가면서 내내 창문도 없는 비닐하우스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수많은 노인들과 특히 목화 꽃 할머니의 사연을 생각했다. 그녀의 가난한 처지를 닮은 구덩이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빠져나올 수 없었던 할머니의 좌절감을 생각했다. 또 밤새도록 소리쳐 봐도 구하러 오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할머니가 느끼셨을 절망의 그 새벽을 상상해 보았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기 위해 절식을 결심하고 죽음이 방문을 두드리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왜 죽음이 두렵지 않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존엄함도 누릴 수 없는 현실이 너무나 부당하게 느껴지면서 가득한 슬픔을 느꼈다. 그때 나는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스스로에게 말했다.


 “먹고 입고 공부할 수 있으면 됐지, 이제 그만 투덜거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자.”     

 


그날 이후 나는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일자리에 집중하고 공부하며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또 친한 친구들을 설득하고 모아서 구룡마을(타워 팰리스 옆, 비닐하우스 마을)에서 공부방을 시작한 뒤 아이들과 함께 놀고 숙제도 함께 하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논문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공부방을 시작한 나는 별 수 없이 잠자는 시간을 줄이는 등 더욱 효율적으로 시간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렇게 되니 몸은 더 힘들어졌지만, 어찌 된 일인지 늘 나를 지배했던 곤궁한 내 삶에 대한 원망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의 절망은 나를 치열하게 희망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가슴에 품고, 내가 가진 유일한 자산인 '시간'으로 가난한 사람과 연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내가 했던 이 일들이 마치 절망에 빠져있던 목화꽃 할머니의 새벽으로 들어가 누군가 할머니를 구하러 가고 있다는 발소리를 들려드리는 일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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