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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꾸 Sep 26. 2022

시간이 흐르면 계절은 돌아온다.

 9월 초부터 10월 초까지 연천에서는 해바라기 축제가 열린다. 오늘 날씨가 또 기가 막힌 것이, 하늘은 파랗게 떠있고 작은 구름들이 느긋하게 떠다닌다. 어제자로 작성된 네이버 블로그를 보니 아직 해바라기들이 짱짱하게 태양을 향해 있었다. 해바라기의 꽃말은 역시나 '일편단심'이다. 4 송이라면 '언제, 어디서라도 당신만을 바라본다.', 999송이의 해바라기는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바라본다.'라는 의미를 가졌다. 오늘은 바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으나 999송이의 해바라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간접적으로 선물할 수 있는 그런 날이다. 


 유명한 관광지에 차를 타고 놀러 가면, 주차 전쟁에 필연적으로 참전하게 된다. 내가 가냐 네가 가냐 하며 닿을락 말락 하는 자동차 범퍼 밀어 넣기의 싸움에서 나는 보통 패배한다. 선두를 빼앗긴 뒤에 나는 분을 삭이며 앞 차의 번호판을 잘근잘근 곱씹었다.


 송소녀는 마음씨가 참 곱다. 기다란 주차 대기줄을 지루하지 않게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전부 송소녀 덕분이다. 라디오의 사연에 잔뜩 몰입한 채 조잘조잘 개인적인 의견을 내기도 하고, 어디서 여자 아이돌들의 노래와 춤을 배워와 가지고는 상큼한 재롱을 떨기도 한다. 함께하는 즐거움이란 이런 것일까?


 곧 도착한 공원 앞에서, 노란색이 잘 어울리는 송소녀의 머리에 꽂아 줄 해바라기 조화 한 송이를 구매했다. '웰컴 투 동막골'의 민들레를 꼽은 여일의 모습을 기대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우리는 곧 황금빛으로 물들었을 아름다운 해바라기 밭을 고대하며 해바라기 상점을 지나쳤다


안녕 해바라기야.


 벼가 익는다는 가을 햇빛, 강렬한 햇살 아래 해바라기는 그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바다로 여름휴가라도 다녀온 걸까. 마치 어느 시골 마을 열심히 괭이질을 하시며 밭을 갈고 계시는 마을 어르신 들게 "새참 드세요!"하고 소리쳤을 때 마주 할 법 한 구수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헤헤"하고 웃으며, 옷소매로 이마의 땀을 슥하고 닦아낼 것 같은 비주얼이다. 옆에 서있는 송소녀의 눈치를 살폈다. 실망하지 않았다면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송소녀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 웃음은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불 꺼진 노란색 신호등 같은 해바라기 앞에서 살짝 실망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금방 초록빛 해바라기를 즐겼다. 줄기 옆에 쪼그려 앉아 작게 피어난 황금빛 해바라기를 사진에 담기도 하고, 막전에 산 해바라기 조화로 예쁜 해바라기 사진을 만들기도 했으며, 누가 씨를 뽑아 만들어놨는지 모를 해바라기들의 표정을 잔뜩 징그러워하며 즐거워했다. 호로고루 공원에는 해바라기 이외에도 코스모스, 호로고루 언덕, 임진강 같은 볼거리들이 많고, 특히 잔디에는 사진 찍기 좋은 토끼 조형물이 있다. 송소녀는 토끼 조형물을 보자마자 자기를 닮았다며 방방거렸다. 


 해바라기 밭 옆에는 작은 표지판이 서 있었다.

[해바라기는 9월 초에 핍니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함께 여행을 할 사람이 송소녀라는 것이 행복하다. 그녀가 뿜어내는 긍정적인 에너지는 기대한 만큼 돌아오는 실망감을 금세 감춘다. 하지만 송소녀 자신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 포인트 ㅎ 


 사랑은 해바라기처럼 늘 한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라 한다. 늘 그렇게 바라보다 보면 자연스레 웃고, 우는 그 사람의 여러 가지 감정을 함께 공유한다. 송소녀의 웃는 모습에 행복을 느끼고, 아파 울면 따뜻하게 감싸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사랑은 사실 해바라기처럼 따뜻한 노란색일지도 모르겠다.


 송소녀가 철 지난 해바라기 여행에 실망하지 않고 신나게 돌아다녀준 덕분에, 오늘은 황금빛 해바라기를 보지 못해 아쉬웠던 날이 아닌, 웃긴 표정의 그을린 해바라기를 만났던 행복한 추억이 되었다. 이것은 아마 송소녀와 나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닌, 매일매일 행복하고만 싶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만들어내는 시너지가 아닐까 싶다.


 실망스럽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자, 어차피 해바라기는 9월 초마다 다시 돌아온다.


 현생 사랑은 999송이의 해바라기보다는 4송이의 해바라기처럼.


해바라기는 시들어도 행복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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