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험한 글쓰기의 세계
최근 브런치에 발행했던 글 한 편을 오마이뉴스에 송고했는데 덜컥 기사로 채택되었다.
기자님의 기사가 방금 채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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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에서 일로 만난 사이... 동료, 동무? : http://omn.kr/1y09j
기사를 송고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내가 쓴 글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였다. 어쩌다 운이 좋아 다음 포털 메인에 노출이 되는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기회를 얻지만 그렇지 않은 글은 조용히 묻힌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쁘다고 하는 것처럼 손끝으로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모든 글들이 소중한 탓에 주목받지 못하면 어쩐지 쓸쓸하다. 두 번째는 시민기자로 활동하는 작가님들이 멋져 보였다. 글 말미에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립니다.'라고 덧붙이는 문장을 나도 한 번 써보고 싶은 동경과 호기심이 용기로 이어졌다. 세 번째는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오마이뉴스도 언론사인 만큼 아무 글이나 채택할 리 만무할 터. 기사로 채택이 되는지 안되는지에 따라 내 글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기회가 될 것 같았다. 일단 송고를 하고 기다렸다. 만 하루가 지나고 일요일 저녁 기사에 채택되었다는 알람과 기사 링크가 전달되었다. 와! 내가 쓴 글이 기사가 된다고?
기쁜 마음도 잠시, 누군가 기사에 '화나요' 버튼을 누른 것이 아닌가? '화나요'이모티콘의 붉은 얼굴만큼 내 얼굴도 화끈 달아올랐다. 당혹스러움과 창피함이 몰려들었다. 더군다나 기사가 실명으로 발행된 것이다. 발가벗겨진 채로 내몰린 기분이었다.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얼마 후 댓글이 하나 달렸는데 내용이 참담했다. 극혐이라는 두 글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야말로 '오마이갓!, 오마이뉴스!' 인 상황이었다.
편집부에 1:1 상담 신청을 남겼다. 처음에는 실명이 아닌 필명으로 수정 요청을 했고 두 번째는 아예 기사를 삭제해 주면 좋겠다고 썼다. (둘 다 안 된다는 답변을 들었다. 1. 실명 발행 2. 채택된 가사는 삭제 불가)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동료 사이를 넘어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는 동무가 될 수는 없는지에 대한 고민이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된 것에 마음이 데이다 못해 심한 화상을 입은 듯 쓰리고 아팠다. 그간 온실같이 따뜻한 브런치 세상에서 살다가 한 순간에 매서운 야생으로 내쳐진 기분이었다. 작가님들의 공감과 격려가 쉴 만한 물가이자 기댈 수 있는 그루터기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 목적은 달성되었다. 1,400분이 기사를 읽어주셨고, 기사가 '버금'등급으로 채택되어 15,000원의 원고료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원고료는 5만 원 이상이 되어야 청구가 가능하다고 하니, 앞으로 기사를 송고하지 않는다면 내 생애 첫 원고료인 15,000원은 영영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시민기자가 되는 길은 생각보다 멀고 험난한 여정임에 틀림없다.
사실 엄지손가락과 휴대폰, 시간만 있다면 글쓰기는 언제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글의 질(퀄리티) 일 게다. 어떤 글을 쓸지에 대한 고민은 발행되는 글이 많아질수록 깊어진다. 유익한 정보를 주지도,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조언을 해 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들게 할 감성 에세이를 쓰지도 못하는 나는 생활밀착형(직장이나 가정) 글감이 대부분이고, '공감'을 주 무기로 삼는다. 주 무기인 공감을 얻지 못하는 글은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녹이 슬어서 결국은 버려지는 검과 같다. 공감 가는 글, 사람들이 찾아 읽고 싶게 만드는 글은 어떻게 쓰는 걸까? 알맹이 없이 자극적인 제목으로 글의 조회수를 올리거나, 브런치 구독자를 늘리려는 목적으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그런데 솔직히는 어떻게 글을 써야 브런치 구독자가 늘어나는지 모른다는 말이 조금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사는 게 조금 느슨하고 시시해졌을 때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읽은 책 중 한 권이 은유 작가님의 <쓰기의 말들>이다. 프롤로그를 읽는데 무릎을 탁 치게 만든 문장을 만났다.
프롤로그_글쓰기를 좋아하는 것과 글쓰기로 돈을 버는 것은 다른 세계의 일이다. <은유, 쓰기의 말들, 유유 출판사, 2015>
가령 일기를 쓰는 일이라면 나의 온갖 감정에 취해 글을 쓴다한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글을 읽어줄 누군가(그렇다, 독자들이다)를 생각하며 글을 쓸 때는 혼자만의 감성으로 일방통행을 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내 글에 있어야 한다. 글을 읽는 동안 그들의 시간이 내 글 안에 스며들게 해야 한다. 기꺼이 시간을 내어 글을 읽는 이가 마음에 담을, 문장 하나쯤은 글 속에 잘 보이도록 숨겨두어야 한다. 보물찾기 하듯 설레며 글을 읽을 수 있도록 말이다.
직장인으로서 일을 잘하기 위해 무엇을 노력해야 할지 고민하는 만큼 브런치 작가로서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훈련할지에 대해 매일 되묻는다. 그전에 '내가 작가로 불려도 될까?' 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히고 만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난 직후에는 혼자만 조용히 글을 썼다.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처음으로 글이 메인에 소개가 되고 나서야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다음(daum) <직장 IN>에서 보인다고 삼십년지기 4명이 속한 단체 카톡방에 자랑 같은 고백을 했다. 친구 하나가 드디어 내 주변에도 작가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드라마 속 주인공 직업이 작가여서(드라마는 바로 <이번 생은 처음이라>, 와 <멜로가 체질>이다.) 친구들이 주인공을 작가님이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듣기가 좋더라며 나를 ‘작가님’이라 불러주었다. 벅찬 마음이 눈물로 차올랐다.
작가란 무릇 사람들을 홀리는 글솜씨를 타고난 고귀한 존재라서 나 따위는 감히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부정했던 시간들에 대해 최근 답이 될 만한 단서를 찾았다, 정여울 작가님의 <끝까지 쓰는 용기> 속에서.
들어가며_저는 아직도 습작생이랍니다. 제가 엄청나게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매일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뻐합니다. 작가란, 단지 책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매일 글을 쓰며 나 자신을 조금씩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가고, 식물의 나이테처럼 조금씩 자신을 갱신하여, 마침내 언젠가는 깨달음의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아름드리나무로 자라게 될 사유의 묘목을 키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여울, 끝까지 쓰는 용기, 김영사, 2021>
책은 참 고마운 존재이다. 글쓰기라는 거대한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 중인 나 같은 사람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손을 내밀어준다. 유명 작가님이 자신을 습작생이라고 자칭하며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좋아요'를 눌러주고 댓글을 남겨주는 독자님(겸 동료 작가님)들의 정성 어린 손짓과 새 소식을 전해주는 브런치의 민트색 알람이 주는 안도감으로 오늘도 글을 쓸 용기를 얻는다. 잘하고 있다고, 너의 글을 계속 쓰라고 등을 토닥여 주는 것 같다.
평범한 직장인에서 이제야 햇병아리 브런치 작가가 된 나는 과연 시민 기자로 거듭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