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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장흐름 Dec 20. 2021

냉장고 속 수박이나 전기장판에서 흘러나오는 것들

가장 가까운 곳에 놓아진 사랑이었다.

우리 엄마는 나의 아기 시절을 떠올리면 떠오르는 과일이 있다고 하신다.

바로 "수박"이다.


내가 유아기 때부터 수박을 우걱우걱 씹어먹어서 기억하시는 건 아니다. 물론 내 식성은 예나 지금이나 위대한 편이지만, 젖니도 없는 아기가 수박을 들고 먹을 수는 없었을 거다.


수박을 썰어두면 그릇에 고이는 빠알간 국물, 그걸 먹여주면 내가 방긋 웃으며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의 나는 "엄마"라는 단어를 배우기도 전이다. 표현이 적은 우리 아버지께서도 내가 수박 국물을 좋아하는 건 기똥차게 기억하신다. 엄밀히 말하자면 국물이 아니라 과즙일 테지만, 우리 집에서는 예전부터 수박 국물이라 부르곤 했다.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여름이 되면 냉장고 한 켠에는 깍둑썰기 된 수박이 놓여있었다.

언제라도 내가 원하면 꺼내 먹을 수 있도록 말이다.


내게 필요한 건 오로지 포크 하나. 아 참, 재미난 티비 프로그램도 필수다. 소파에 앉아 적당한 채널을 골라놓고, 어느 수박을 먼저 먹을까 고민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딱딱한 수박씨는 뱉어놓고, 만만한 녀석은 씹어 먹으면서. 그릇을 기울여 수박 국물까지 맛나게 들이키면 그걸로 내 행복은 10점 만점에 10점이었다.






수험생활을 하던 추운 겨울,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면 내 방 전기장판에는 빨간 불이 늘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예열을 해주신, 따뜻한 밤을 빌어주는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식당 일을 마치고 늦은 밤에 귀가하는 아버지께서는 행여 엄마와 내가 잠에서 깨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들어오셨다. 늦게까지 일하시느라 고된 몸이셨을 텐데, 힘든 내색 한 번 안 하셨다.


당시에는 고마운 줄 몰랐다.

부모님이 나를 챙겨주는 것은 역할에 합당한 모습이라고 여겼다.

부모님의 배려는 의무라고 오해했다.


그 무렵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부모님의 보호 아래 살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믿었고, 온실 속 화초처럼 무탈하게 지내면서도 온실을 만들어준 부모님께 감사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부모님께 의지하는 아들인 것은 다름없다.)


내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심통을 부렸다. 왜 이것밖에 못해주시냐고 버릇없고, 이기적으로 굴었다. 부모님께서는 이미 사랑으로 대해주고 계셨는데도, 나는 대단한 사랑을 알아챌 눈치가 없었다.


수박은 원래부터 깍둑썰기 되어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전기장판이 아무리 좋아도 내 귀가 시간에 맞춰

스스로 구동되는 기능은 없다.


살금살금 들어오시는 발걸음이 아니었다면

나는 잠을 설쳤을지도 모른다.


책을 얼굴 앞에 바로 갖다 대고서는 글자를 읽을 수 없는 것처럼, 너무 가까이에 있기에 사랑인 줄 몰랐던 건 아닐까, 그 문단에는 "사랑"이라고 정확히 써져 있었는데 말이다. 아기 때는 웃음으로라도 좋아하는 티를 냈을 텐데, 학생 때는 웃어드리지도 못했다.


이제는 그 헌신이 대단한 사랑이었음을,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랑이었음을 느낀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의 질문으로 시작한 심리학계의 연구는 감사하는 마음이 행복에 가장 빨리 이른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명상이나 요가, 따뜻한 차 마시기나 클래식 음악 감상 등, 여타의 긍정성 증진 활동보다 "감사한 일을 생각할 때" 뇌파와 심장 박동수가 가장 이상적인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11월부터 감사일기를 적기 시작한 나는 감사함 일을 기억하는 습관이 놀라울 만큼 행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체험하고 있다.


불편하지 않도록 문을 잡아주었던 친구의 손길, 심심하지는 않을까 내게 말을 건네준 상냥함, 아침은 어땠는지 물어봐주는 소중한 연락, 나에게 일을 맡겨도 좋겠다는 선배님의 믿음, 맛있는 반찬에 지어진 미소, 서울은 벌써 눈이 온다며 보내준 사진, 언제 휴가 나올 거냐며 날아든 관심과 추울 텐데 일할 때 따뜻하게 챙겨 입으라는 아버지의 자상함까지.



이 가운데 감사하지 않은 게 어디 있으랴. 돌아보면 감사하지 않고서는 끝내기 아쉬운 하루가 되어있다. 보통의 하루에 고마움을 더하면 찬란한 하루가 되고, 감사한 일을 하나씩 기억할 때, 마음속부터 차오르는 편안함은 누구도 앗아갈 수 없다.



고마운 것에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표현해보는 건 어떨까. 감사한 순간에 바로 표현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뒤늦은 인사가 닿지 말라는 법은 없다. 조금 쑥스럽다면, 연말의 분위기를 핑계로 연락해보자. "그때 그일, 너무 감사했어요.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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