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세계
나도 어느새 장년을 넘어 중년을 향해 가는 마당이다 보니, 유행에 한창 민감하질 못하다. 언젠가 뉴스에서 자꾸 메타버스를 언급하는 걸 보면서, 가상현실이 뭐 얼마나 발전했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기사 내용을 보니, 요즘 10대들의 경우에는 벌써 메타버스 안의 삶에 상당히 익숙해진 듯했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는 '행복동'이라는 게임이 있었다. 엄밀히 게임이라기보다는 싸이월드 미니미만한 캐릭터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이야기도 하고 거기서 모은 재화로 캐릭터를 꾸미는 채팅 프로그램이었다. 생각해 보면, 어떤 사냥이나 퀘스트 시스템도 없이 그저 채팅을 위한, 그리고 캐릭터를 꾸미기 위한 행복동이 내가 겪은 최초의 메타버스였지 않나 싶다.
그리고 거기서 내가 얻은 교훈은, 아무리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고 그 세상이 우리의 삶에 인접한다 해도, 결국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싶어 하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동에서 채팅 후에는 결국 만날 약속을 잡고 로그아웃했었으니까.
멀티레이어 - 먼 미래, 지구는 기후변화로 인해 물에 잠겨버리고, 한 대기업의 제안으로 인류는 세컨드 서울이라는 메타버스로 향한다. 일정 시간 이후 지구의 기후가 안정화되면 다시 현실로 보내준다는 약속과 함께. 그러나 약속한 100년이 경과한 뒤에도 운영자 측은 로그아웃을 시켜주지 않았고, 사람들은 메타버스 안에 갇히게 된다.
그런 도중에 일부 로그아웃을 강제로 하려는 움직임이 생기는데, 로그아웃론자들이다. 그들은 로그아웃혁명단이라는 이름으로 관리자들의 아지트인 푸른 집에 침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와중에 썩은 물, 테스터부터 참여해 세컨드서울에서 온갖 버그와 이스터에그들을 알고 있는 정민에게 침투를 도와달라고 문의한다. 하필 그 혁명단에 자신의 수양딸인 수현이 포함되어 있었고, 결국 못 이긴 척 도와주지만 결국 작전은 성공의 코 앞에서 우유부단한 리더 베르테르의 망설임으로 실패하고 만다.
작전 실패 후 베르테르는 사라져 버렸고, 혁명단에 대한 관심 역시 희미해진다. 하지만 수현의 로그아웃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진다. 정민과의 감정의 골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 문제를 느낀 관리자 인클루드의 도움으로 다시 한번 푸른 집에 침투를 시도한다. 결국 탈출에 성공하는 정민의 앞에 펼쳐진 것은...
구여친 연대 - 미현은 한때 양다리를 걸쳤던 현준 덕에 소리, 유리, 경윤과 친밀하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다 삶에 치어 관계는 소홀해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유리의 연락을 받는다. 모두 사진과 연관된 그들은, 유리가 메타버스 안에서 발견한 콜라주 미술작품이 소리의 사진을 도용한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여러 사진을 겹쳐 만들어낸 미술품에서 다수의 소리 사진을 발견하고, 이를 현준이 오울이라는 명칭을 쓰는 한 회사에 팔아넘긴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소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사실도.
소리의 죽음과 그 사진을 돈벌이로 악용한 현준. 그리고 도용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 없는 회사에 분노한 그들은 힘을 합쳐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다시 소리의 사진을 돌려받기 위해 연대한다.
바람과 함께 로그아웃 - '도깨비'는 원래 메타버스 내의 사막에 고래똥에서 금조각을 모아 메타버스 때문에 의식불명이 된 누나의 치료비를 벌었다. 그러던 중 이스터에그인 거대한 황금덩이를 발견하고, 관리자들에게 선택되어 임무를 부여받는다.
임무는 요굴에 위장잠입, 보스인 피터팬에게 도청을 심는 것. 메타버스를 운영하는 AI 오라클이 엄청난 규모의 테러를 예견했고, 그 원인이 바로 요굴에 있다는 것이다. 거대한 보상금에 결국 수락한 도깨비는 요굴이 현실에서 법으로 처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아바타를 빼어난 해킹기술로 납치, 복수를 돕고 대가로 돈을 버는 것을 알게 된다. 일부 응당 벌을 받을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국 오버도스 상태인 누나를 생각하며 반감을 이어가는 도깨비. 열심히 요굴에서 입지를 굳혀가며 보스를 만나지만, 미션은 성공이 요원하다. 관리자의 다른 방책으로 영원히 로그아웃하지 않는 2인자 후크의 집에 잠입해 알아보지만 그저 요나라는 아이의 아빠일 확률이 높다는 사실만 알아낸다.
결전의 날, 이미 잠입한 도깨비의 정체를 알고 있던 피터팬은 작전을 함께하는 대신 누나를 영원한 로그인 상태로 만들어준다는 달콤한 제안을 하지만, 결국 요굴은 벤투스라는 마약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집단인 것을 알게 되고, 이들의 음모를 깨부순다.
일본 이야기는 아니고.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가깝다는 것은 물리적인 거리를, 멀다는 것은 심리적인 거리를 말한다. 책의 제목에서 보듯이 가까운 세계는 바로 메타버스다. 이미 어느 정도 개발된 메타버스의 세상, 즉 기술의 발전이 이만큼 성큼 다가왔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메타버스가 결국엔 얼마나 우리 현실과 가까운 것인지에 대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거기에 붙인 '먼 우리'라는 표현은 분명 현대에 이르러, 그리고 미래로 나아갈수록 멀어지는 우리 서로 간의 거리를 말하는 것이지 싶다. 가상세계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지만, 여전히 현실에 한 발을 담그고 있는 우리는 가상세계에서의 거리감을 실제의 거리감으로 느끼진 못할 거라는 뭔가 서글픈, 그리고 허무한 진리.
구여친 연대를 제외하면, 마치 옛날 유행했던 게임판타지를 읽는 느낌이었다. 즉, 아무래도 여성독자들에게는 생경하게 다가올 수도 있는 작품. 하지만 메타버스를 그 소재로 하고 있고, SF라는 장르적 성질을 따지고 본다면 정말 착실한 소설이지 싶다. 되려 구여친 연대의 경우는 도용된 작품을 발견한 곳이 메타버스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좀 그 궤가 너무 다른 느낌이라 이질감도 느껴졌다.
어쨌든, 게임판타지와 다른 점이라면, 이들의 메타버스가 결국은 현실의 불합리 혹은 현실세계의 멸망, 위기에 맞닿아있다는 것이다. 우연히 두 편 모두 현실의 기후변화, 특히 물난리를 그 배경으로 뒀는데, 이 부분에서는 조금 상투적인 소재가 아닌가 싶다.
거기에 매트릭스가 개봉한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절대다수의 인간이 캡슐 안에서 가상세계를 산다는 설정은 어찌 보면 메타버스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지 않을까. 약간은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세계를 메타버스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라는 개인적 의구심이 더해진다.
하지만 멀티 레이어에서 말하는 구세대와 현세대간의 입장차이, 구세대의 책임과 현세대의 희망이 맞부닥치는 갈등이나, 바람과 함께 로그아웃에서 가상세계에서마저 팽배한 물질만능주의와 치외법권이 되어버린 돈과 권력의 응징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신선했다.
게임판타지가 그 시초라고 할만한 이런 소재는 예전에는 오로지 오락적인 요소, 즉 주인공이 기연을 만나 갑자기 강해지고 세상을 뒤바꿔버리는, 그리고 그 영향으로 현실도 바꾸는 약간 영웅적 스토리가 주류였는데, 이런 심오한 주제까지도 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만큼 가상세계에 대한 인식자체가 많이 변했고, 기술도 발전했으며 우리와 이미 가까운 세계가 되어버렸다는 방증이지 싶다.
어릴 적 게임판타지를 접해본 사람이나, 메타버스 세계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 아닐까.
본 서평은 서평단 참여로 출판사로부터 서적을 증정받아 작성하였으며,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로 적었음을 밝힙니다.
개인 블로그 : https://blog.naver.com/uyuni-sol
※ 블로그 셋방살이 중입니다. '작가의 서재' 방만 제 관할입니다. ㅠㅅ ㅠ
개인 인스타 : https://instagram.com/jeakwangy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