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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돌이한의사 Sep 02. 2021

행복은 성적순이잖아요

공부하다 생긴 병 (수험생직업병)

 1989년에 나온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는 그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시대를 살았던 학생이라면 이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그 인기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오래전 일이라 영화 내용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 영화제목과 주연배우였던 이미연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 영화를 계기로 이미연은 하이틴 스타로 떠올랐고 그 당시 모든 남학생들이 선망하는 책받침 여신이 되었다.


  이런 제목으로 영화가 나올 정도로 그 당시에도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는 대단했다. 성적에 대한 부모의 과도한 관심, 성적이 떨어지는 아이들에 대한 선생님의 무시와 차별 등등. 사회적으로도 상당히 이슈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 때와 별반 달라진게 없는 듯하다. 이후로 입시와 교육제도가 여러번 바뀌었지만 사회에서 성적을 중시하는 건 여전하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행복은 성적순이다.


 학창시절에 성적이 좋으면 여러가지로 혜택을 누린다. 선생님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모범생 이미지가 생겨 임원이 되기도 쉽다. 선생님이 보호해주기 때문에 일진 같은 애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 성적이 좋으니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가 있고, 좋은 대학을 나오면 대기업에 취직이 잘 된다. 승진할 때도 플러스 알파가 있다. 성인이 되어서까지 학벌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물론 과거만으로 현재를 평가하는 건 불공평한 면이 있다. 좋은 대학에 갔더라도 놀기만 한 사람과 처음에 조금 안좋은 대학을 갔지만 마음잡고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있다면 후자가 인정을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런 특수한 경우보다는 학창시절 성적대로 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어릴 때 공부를 열심히 했던 친구들은 열심히 하는 습관이 몸에 베어 있어서 어딜 가든 열심히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좋은 대학교에는 선배들이 다양한 곳에 포진되어 있어 취업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를 들을 수 있고, 주변 친구들이 열심히 공부하기 때문에 그 분위기에 따라서 열심히 하게 된다. 그래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교과서만 열심히 봤어요’


 해마다 대학입시가 끝나면 수능만점자가 등장해서 하는 말이다. 신문에 인터뷰 기사가 실리고 TV에 출연해서 공부법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어떻게 공부했느냐는 질문에 항상 저 대답이 나온다. 솔직히 교과서만 봐서는 수능에서 만점 받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아마도 과외나 학원에 의존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그랬고 당시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알아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면 자기주도학습을 잘하는 친구들이었다.


 간혹 주위 분들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공부를 잘 할 수 있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곰곰히 생각해본다. 딱히 공부를 잘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한 것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공부방법을 가지고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매일 꾸준히 멈추지 않고 한 것 밖에 없다. 과외도 별로 안했고 학원도 거의 안다녔다. 독서실도 별로 안다니고 학교 야자시간에만 공부했다. 


 생각해보니 공부를 잘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3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목표는 세우되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점수를 높이려고 노력했지만 꼭 여기를 가야한다거나 이번 시험에 전교 몇등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성공하려면 목표가 있어야 한다. 확실한 목표가 있다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울 수 있고 슬럼프가 와도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장점이 된다. 그런데 자칫 목표가 비현실적이거나 목표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심리적 압박감으로  불안하고 쫒기게 될 수가 있다. 꼭 서울대를 가야한다거나 이번 시험에 반드시 100점을 맞아야한다는 생각이 크게 자리잡으면 목표가 오히려 부담감으로 작용해서 공부가 안된다. 


 둘째, 불평불만이 별로 없었다. 모범생들의 속성 중 하나가 비판없이 순응한다는 점이다. 또래 친구들 중에 저 영화처럼 사회나 교육에 비판적인 친구들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나는 별로 그런 생각을 안했던 것 같다. 무언가에 집중하려면 잡념이 없어야하는데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자체가 잡념이 되기 때문이다. 비판적이고 따지는 걸 잘하면 지적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다. 물론 건설적인 비판은 필요하다. 건설적인 비판은 대안을 제시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머리와 입으로 하는 비판은 불평불만에 지나지 않는다. 불평불만의 시간이 지나면 후회만 남는다. 


 마지막으로 건강이다. 어머니께서 건강관리에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 건강하게 타고난 체질이 아니라서 그런지 학창시절 주기적으로 체력이 딸렸다. 특히 시험기간이 되면 많이 힘들었다. 계속해서 머리를 써야했기 때문에 늘 피곤했고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이다보니 체기와 두통, 과민성 대장증후군, 비염 등이 재발해서 문제가 되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서 음식도 신경써 주시고 때마다 보약도 챙겨주셔서 끝까지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 한의원에 찾아온 다연이도 전형적인 모범생 아이였다. 중고등학교 성적도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했고 미래에 하고 싶은 꿈도 있었다. 그런데 수능 당일에 갑자기 배가 아파서 시험을 망쳐버렸다. 그래서 자기가 원했던 대학을 가지 못했다. 원치 않던 대학생활은 즐겁지가 않았다. 자기에 대한 기대치와 남들의 시선들이 의식돼 우울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나니 다시 꿈을 향해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휴학을 하고 다시 수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시험 볼때 지난번처럼 배가 아파서 시험을 못보면 어떻하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안좋은 생각이 불쑥불쑥 떠올랐고 그로 인해 공부에 집중이 안되고 불면증까지 생기게  되었다. 


 수능시험장에서의 갑작스러운 복통이 트라우마로 작용해서 이런 상황까지 온 것이다. 닥치지도 않은 걱정과 불안때문에 공부는 손에 잡히지 않았고, 모의고사를 볼 때면 극도로 긴장이 되서 배가 아프고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멘탈을 아무리 강하게 가지려 해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고 점점 심해져만 갔다. 피곤한 날이면 시험을 망치는 악몽을 꾸고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깨기도 했다.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절망적이었다. 


 ‘멘탈을 강하게 가지면 돼.’

 힘든 상황을 이야기할 때마다 주위에서 흔히 하는 이야기다. 멘탈을 강하게 하고 싶어 의지를 다지는 유튜브도 보고, 불안감이 밀려들 때는 불안을 이겨내는데 도움을 주는 심리서적도 읽어보지만 그때뿐,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불안해진다. 


 몇년전 우리나라 학생들의 성적과 행복과의 연관도를 조사한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학생들 70%가  행복은 성적과 상관이 없다고 했지만, 성적이 상위권일수록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답했다. 겉으로는 행복과 성적은 상관이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학생들의 행복은 성적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부모님도 아이들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아이의 행복은 곧 부모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이 골고루 갖춰져야 한다. 아이의 의지, 아이한테 잘 맞는 선생님,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심리적 안정감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베이스에는 가장 중요한 건강과 체력이 깔려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갖춰져 있더라도 아프면 한번에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행복은 아직도 성적순이다. 


그리고 성적은 건강순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더라도 몸이 아프지 않아서 공부하는데 지장이 없고, 몸이 안좋더라도 머리는 맑아서 책을 보기만 해도 이해가 쏙쏙 된다면 정말 좋을텐데, 왜 조물주는 이렇게 몸과 마음을 연결시켜 놓았을까. 그 깊은 뜻은 알수 없지만 우리 몸이 그렇고 자연의 원리가 그러하다면 불평불만만 하기보다 모범생들처럼 그 뜻에 순응해보자. 머리를 맑게 하기위해 속을 먼저 편안하게 하고, 심리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신체를 먼저 튼튼하게 해보면 어떨까. 건강해져서 손해보는 건 없으니 도전할만한 시도가 아닐까?


 해부학적으로 살펴보면 뇌와 대장은 미주신경이라는 10번째 뇌신경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미주신경을 통해 뇌와 대장이 직접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장으로부터 오는 정보가 미주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고, 뇌에서 만들어진 명령은 미주신경을 통해 대장에 전달되는 매우 정교한 통신 시스템을 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트라우마나 지속적인 스트레스는 미주신경을 약화시키고 뇌와 대장간의 통신 시스템에 오류를 일으킨다. 과민성대장증후군의 경우 뇌에서 일어나는 작은 불안감이나 별거 아닌 생각이 미주신경을 통해 증폭되어 대장을 자극하게 되고, 이때 대장근육이 수축하거나 과긴장하면서 배가 아프고 대변이 마렵게 된다. 


 미주신경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신경성 증상들은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한다. 증상이 나타나지 않으니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예기불안도 사라진다. 원인을 알수 없어 답답했던 신경성 질환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조금만 일찍 오지 그랬니.”

3개월간의 치료가 끝나고 활짝 웃는 다연이를 보며 말했다. 

‘다연이가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어땠을까?‘

치료 시간은 더 줄어들었을 것이고, 그러면 그간 마음고생도 덜 하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텐데.


참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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