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인말러 Jul 04. 2021

역사: 누군가를 들여다보며 나 자신을 돌아보는 학문

최태성 지음, 「역사의 쓸모」독후감

   몇 년도 더 전에 나온 드라마이지만, 최근에 나는 플랫폼 서비스를 통해<육룡이 나르샤>라는 드라마를 정말 재밌게 봤다. 지금도 공부할 때는 종종 드라마에 삽입된 ost를 듣는다. 유아인이 연기한 이방원이 양손에 다른 사람의 피를 묻히며 온몸이 떨리도록 슬퍼할 때, 그가 정말 잔인하다고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삶이 정말 기구하고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극 드라마는 그런 맛으로 보는 것 같다. 역사 책에서 배운 태종 이방원은 "킬방원"이라는 별명을 가진 정말 잔인한 사람인데, 드라마로 보니 그의 삶도 참 안타까워 괜히 공감이 가기도 했다. 드라마 그 자체로 역사 책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이방원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교수라는 꿈을 갖게 되며 공부는 결국 삶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공부든 달달 외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내 가슴에 와닿는 공부, 다시 말해 앞으로 내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목표를 심어주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역사와 철학을 공부했다. 본 전공은 경제학이지만, 나는 경제학보다 역사나 철학이 인생과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버겁고 힘들다. 우리는 많은 순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목표를 성취했을 때 그 달콤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받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많은 것들을 희생하기도 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을 만나야 그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까. 어떤 것을 목표로 해야 그 희생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내 인생을 위해서 이 질문들의 답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을 위해서 더더욱 그 답을 찾고 싶었다.


   오늘 소개할 책은 최태성 선생님의 「역사의 쓸모」이다. 지난달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을 때는 "역사학"이란 이런 거구나 싶은 느낌을 받았다. 엄청 전문적인 내용도 아닌데 왠지 심오하고 철학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최태성 선생님의 「역사의 쓸모」는 나 같은 일반인을 위한 역사 같았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들. 내 공부의 방향성과 동행하는 책 같아서 편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서평에도 내가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비교적 딱딱한) 역사가 아닌, 삶에 와닿는 역사를 전하고 싶다.



그때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할 일은 상대가 왜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헤아려보는 일입니다.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서로의 시대를, 상황을, 입장을 알게 된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도 달라질 것입니다.

- 최태성 지음, 「역사의 쓸모」, 81쪽


   앞에서 언급한 <육룡이 나르샤> 속 이방원이 가장 적당한 예시 같다. 방대한 양을 한 학기 만에 공부하고, 외워야 하는 그런 역사에는 이방원이라는 인물의 갈등과 고뇌가 담겨있지 않다. 드라마가 실제 역사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를 통해 '그랬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며 한 인물의 행위를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는 있었다. 실제로 이방원의 생모인 신의왕후가 죽고 계비인 신덕왕후만 남았을 때 이방원을 포함한 신의왕후의 자식들은 내팽개쳐졌다. 게다가 자신의 아버지와 스승(정도전)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들 모두를 살리기 위해 정몽주를 죽였는데, 도리어 그 행동으로 인해 그 둘 모두의 미움을 사고 정치에서 배제되었으니, 이방원 본인의 슬픔과 화도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한 사람의 행위만으로 그 사람 자체를 평가하는 경우가 잦다. 물론 한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는 말도 맞지만, 몇 번의 행동만 가지고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때로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폄하하기도 한다. 속으로 그 상대방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자리 잡기도 한다. 역사를 깊이 있게 공부할수록 가치 판단을 하기 전에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좀 더 유심히 지켜보고,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것들은 암기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앞에 커피라도 한 잔 놓고 느긋하게 역사 책을 읽어야 얻을 수 있는 배움 아닐까.



글을 통해 내 흔적을 남기다


또한 정약용은 자신이 계속해서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도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지금의 생각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사헌부의 재판 기록만 보고 자신을 죄인 정약용으로 기억할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끊임없이 기록하겠다는 것입니다. 출세의 길이 막혔다고, 죄인이 되었다고, 폐족이 되었다고 자포자기하여 손 놓지 있지 않았습니다. 정약용은 형조에 기록된 몇 줄짜리 글로 평가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글을 남겨 후세의 평가를 받으려 했습니다.

- 최태성 지음, 「역사의 쓸모」, 75쪽


   조선 후기 정조는 지나친 환국 정치로 불안해진 조정을 회복하기 위해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인재들을 규장각으로 불러들였다. 규장각은 그야말로 조선 왕실의 신설 도서관이었고, 이때 뽑힌 인재들이 모두 37세 이하의 과거 시험 성적 우수자들이었으니, 정조가 얼마나 개혁 의지가 깊었는지 알 수 있는 사례다. 그런데 정조가 죽자 개혁도 물거품이 되고 정약용 본인의 앞날도 가리기 어려워진다. 정조가 죽자마자 정약용은 천주교 집안이라는 이유로 유배를 당한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구절대로, 정약용은 집안이 몰락한 와중에도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도리어 실학을 집대성하고 여러 학문서, 편지, 회고록을 남겼다. 사헌부에 남긴 자신의 재판 기록 몇 줄을 이겨내기 위해 그 많은 글을 썼다. 패가망신한 범죄자로 억울하게 남지 않기 위해 오히려 유배 당한 후일 수록 글을 그토록 많이 썼다. 책장을 넘기는 내 손끝에서 괜한 울림이 느껴졌다. 글이 한 사람의 평가를 뒤바꾸는 역할도 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어쩌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그와 비슷하지 않나 생각했다. 내 행동만으로 내 생각이 모두 드러나지 않는다면, 내가 노력하는 이유와 내가 남기고 싶은 가치를 글로 남겨놔야 하지 않을까.


   한 사람의 글을 통해 그 사람의 그릇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 글을 잘 쓰지는 못해도, 글을 많이 읽고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매번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 사람만의 결이 느껴진다. "이 사람은 남을 사랑할 줄 알고 자기 자신을 챙길 줄 아는 사람이구나"라고 느껴지는 글이 있다. 아직 내 글은 그 경지에 이르진 못했지만, 천천히 그릇을 키워가는 중이라고 믿는다. 조금이라도 글을 더 써보면, 누구든 읽으면서 공감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내 글에는 다 걸러내고 두 가지 문장, 두 가지 메시지만 남았으면 좋겠다. 첫째, 삶이라는 게 원래 버겁고 힘들다고. 그러니까 누구든 힘들 수 있고, 당신이 힘든 것은 당신이 잘못해서가 아니라고. 그리고 두 번째, 언제든 원할 때에 다시 일어나자고. 그게 언제고 좋지만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몇 시간이면 충분히 다 읽을 수 있는 이 짧은 책에서, 내가 가진 (인생에 관한) 질문들에 모두 답할 수 있을 것 같은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최태성 선생님 본인의 삶의 깊이 같기도 했고, "역사"라는 과목 그 자체가 가진 통찰력 같기도 했다.


오랜 시간 동안 존경받아 온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나다 보면 자긍심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나 만나지 않잖아요. 역사가 증명한 사람들을 만나는 겁니다.

- 최태성 지음, 「역사의 쓸모」, 242쪽


   마치 성경이 그랬듯이, 오래된 책일수록 불필요한 내용은 삭제되고 필요한 내용은 추가되는 정밀한 수정(修整) 기간을 거친다. 역사 자체도 그렇게 깎일 부분은 깎여 나가고,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다시 기록된다.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면 가차 없이 삭제된다. 그런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 아니 가치와 소망을 남긴 사람들의 삶이 이랬구나를 이 책을 통해 느꼈다. 「역사의 쓸모」라는 책은 어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간절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의 역사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읽는 팝업북같이 그들의 소망을 고스란히 펼쳐 보여주었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지, 내가 어떻게 기록되는지는 내가 어떤 소망을 갖고 있는지에 달렸다고 믿는다. 정말 간절한 소망이라면 결국에는 그게 역사에 남는 가치가 되는 것 아닐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부지런한 글쓰기(는 어렵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