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gelsuho Jul 12. 2024

서운해서 어떡해.

2024년 4월 14일 일요일





서운해서 어떡해.


작업실 이사를 하고 2주가 흘렀다. 지난 14일간 많은 일들을 처리했다. 그동안 한 일들은 그야말로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전입신고를 하고, 와이파이를 설치했다. 냉장고를 샀고, 도시가스를 연결했다. 특히 지난 목, 금요일에는 이케아에 가서 책꽂이 세 개와 책상 하나를 사 온 다음 조립했다. 여기에 친구들이 선물로 보내준 의자 네 개까지 더해 일주일간 열 개 가까이 되는 가구를 조립했다. 장갑을 끼고 드라이버로 나사를 돌렸다.


집안일은 끝이 없다. 이사한 직후는 더욱더 그렇다. 분리수거할 재활용 쓰레기는 퇴근 때마다 양손 가득 날라도 어디선가 계속 나온다. 금요일 밤에 박스를 한가득 버렸고 토요일 밤에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세 봉지정도 버렸는데, 아직도 처리하지 못한 박스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쯤 되니 기본 1년 계약으로 들어온 작업실을 온전히 쓸 수 있는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또 한 번 의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점. 나는 이렇게 그림 외의 다른 일들을 장기간 처리하다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데 이게 참기 힘든 지경까지 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그림책 작업이 있으면 그림을 먼저 끝내고 보정, 조판등의 작업으로 넘어가는데, 이 후반 작업이 길어지면 그동안 그림을 못 그리니까 너무 괴롭다. 지금도 마찬가지. 정리를 비롯해 행정적인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그림에 손을 못 대 미칠 지경이다. 어쨌든 해야 하는 일들이니까 천천히 하나하나 해나가고 있다. 








그 많은 일들을 처리하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이 있다. 4월 8일, 구 작업실 계약이 만료되어 임대인분을 만나 뵙고 열쇠를 돌려드리러 갔다. 구 작업실의 임대인은 연세가 꽤 많은 어르신이었다. 만날 때마다 살갑게 대화를 나누곤 해서 임대인이라기보다는 주인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헀다. 부동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나에게 첫 계약이냐며 축하해 주시기도 했다. 


중간중간 건물 앞에서, 올라가는 계단에서 마주칠 때마다 인사했고 가끔은 몇 마디를 더 나누기도 했다. 잘 아는 사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만나면 인사하는 사이. 첫 부동산 계약을 좋은 분과 하게 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여러 번 생각했다. 안 그래도 부동산 계약 관련해서 시끄러운 일들이 많이 생기는 시대 아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나는 그 자리에서, 떠나는 임차인인 나에게 과분할 정도로 정감 넘치는 덕담을 해주셨다. 그게 앞으로도 계속 너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서운해서 어떡해"라는 말만 세 번. 앞으로 볼 일이 있으면 또 보고, 아니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이 동네 사니까, 오다가다 보자고. 그리고 꼭 잘 되라고. 무조건 잘 되라고.


나는 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씨앗을 심고 물을 주듯.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