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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키 Oct 05. 2022

[영화감상 013]<한산: 용의 출현>(2022)

Simple is the best

<한산: 용의 출현>은 모든 인물과 이야기가 오로지 '한산 대첩'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영화이다. 전투 서사의 곁가지가 될 수도 있는 인물 개인의 가정사, 과거 등의 서사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으며 전투 승리를 위해 왜와 조선이 각자의 전략을 수립해나가는 과정이 병행되어 진행되면서 영화 전반부를 구성하고 있다. 영화의 플롯이 '전투의 승리'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수렴되는 이 구성은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구성이었고 동시에 전작인 <명량>과는 대조되는 <한산>의 가장 큰 장점이 되었다.


플롯과 인물 설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대사량, 출연 분량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이순신(박해일 배우)보다 일본 장수 와키자카(변요한 배우)가 더 주인공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보통이라면 이순신에게 실려야 할 비중이 네임드 배우들(안성기 배우, 손현주 배우 등)이 맡은 여러 장군의 역할에 분산되다 보니, 오히려 강조되는 인물은 조선이 상대해야 할 적군 장수 '와키자카'다. 애초에 영화는 조선과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오겠다는 와키자카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며 전투 전략을 세우면서 발생하는 일본의 파벌 싸움과 갈등은 되려 와키자카의 조선 정벌 욕망을 부각하고 다른 왜구 세력이 아닌 누구보다 정복욕이 강하고 기지가 있는 그가 전투를 이끌어야 하는 당위성을 돋보이게 만든다.


이로써 영화가 ‘이순신’을 중점적으로 조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객은 당연한 의문이 들 수 있다.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한국영화가 한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역사적 인물을 강조하지 않고서 내용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인가? 이때 와키자카의 욕망과 그에 따른 플롯을 다시 복기해보자. 일본은 궁극적으로 조선이 아닌 ‘명국’이 목표임으로 조선은 그저 통로일 뿐이다. 그렇다면 되도록 빨리 여러 전쟁에서 승리해 조선의 의지를 꺾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이미 육지 전투에서 패배한 전적이 있는 조선은 이미 최전선에 몰려있고 일본은 조선이 바다 위의 대첩마저 밀리게 되면 남은 희망마저 잃고 민심도 약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때 일본이 용인 광교산에서 거둔 육지 전투의 승리가 계속해서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와키자카가 용인 전투에서 이긴 방법을 한산 해전에서 반복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용인과 한산도는 육지와 바다라는 지형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넓고 광활하다는 형태적 유사성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와키자카는 전략에 변화를 꾀하지 않는다. 이는 명백한 '승자의 오만'이다.

반면 이순신은 꿈에서 스스로가 왜군의 입장이 되어보는 체험을 한다. 일차원적으로 보면 '악몽'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적의 입장을 미리 상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 꿈속에서 공성전을 체험해봄으로써 이순신은 한산 대첩 승리의 결정적인 전략이 되는 '학익진 전법'을 구상하게 된다. 결국 이는 적의 입장이 되어보는 객관적인 사고방식을 할 줄 아는 장수와 같은 승리를 반복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주관적인 믿음에 함몰된 장수의 싸움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와키자카가 맞다. 그리고 이순신은 그가 넘어서야 할 목표로 설정된다. 이순신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오히려 이순신에 대적하는 적장의 역량을 보여주고, 승리에 대한 적장의 욕망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이순신은 더 절제된 캐릭터로 나타나 인물 간의 대비가 이루어진다. 역사 영화가 시도하리라고는 예측하기 어려운 구성이기에 더 신선하고 탁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로써 대립되는 한 쌍의 인물이 한산 대첩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구성이 완성된다.


하지만 달성해야 하는 큰 목표가 있는 스토리에서는 상대적으로 배우와 캐릭터가 지워질 수도 있다. 실제로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한산>을 두고 배우나 캐릭터가 빛나는 영화는 아니라고 평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내가 이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든 캐릭터가 있는데 바로- 김성규 배우가 같은 *항왜 준사 역이다. <명량>의 주제가 '충'이라면 한산은 '의'를 주제로 다루는 영화인데 조선과 왜구 간의 전투를 나라와 나라의 싸움이 아닌 의와 불의의 싸움으로 해석한 것이 인상 깊었다. 이와 같은 주제의식을 강화하는 데에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편에 서서 투항한 왜군인 항왜 준사(김성규 배우)의 역할이 컸다. 이러한 주제의식 덕택에 <한산>은 역사영화가 가진 고질적인 문제인 신파 요소를 확실히 덜어낼 수 있었고 역사가 가진 교훈이 현대에 이르러서 어떻게 해석되고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새롭게 제시할 수 있었다. 특히 김성규 배우의 연기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에서도 인상 깊게 보았는데 그는 앞으로 더 큰 배우가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든다. 그에게서는 발화, 행동으로 보여주는 연기뿐만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를 체화해내는 힘이 느껴진다. '연기'가 보이기 이전에 실제로 존재했을 한 명의 인물을 보는 느낌이랄까.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배우다.


더불어 거북선 설계자 나대용(박지환 배우)을 비중 있게 다룬 점이 흥미로웠다. 영화에서 거북선은 충파할 때 용의 형상을 한 발포 부분이 적군의 배에 걸려 빠지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나대용은 그 문제점을 보완할 테니 해전에서 거북선을 사용해달라고 이순신을 설득한다. 짧은 장면이었지만 박지환 배우의 연기력이 인상적이었다. 나대용이라는 관객의 뇌리에 박히는 캐릭터가 있었기에 거북선이 마치 하나의 캐릭터처럼 등장해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장면이 더욱 힘 있게 느껴졌다.

반면에 옥택연 배우, 김향기 배우가 맡은 임준영, 보름 역은 너무 소모적인 인물이 아니었을까. 장군, 병사와 같이 최전선에서 싸우지 않고도 전투에 이바지하는 소시민을 그리고 싶었다면 해당 인물의 배경을 설명하는 스토리가 있었어야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 테다.


프로덕션 디자인의 측면에서 보자면 '용'의 모티브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용면와, 용두 등 용의 인상과 형태에 관련된 더 다양한 소품과 배경을 디자인하는 것이 재밌지 않았을까? 장군들이 전략을 세우는 천막에 단순화된 용의 형태가 패턴으로 들어간다던가 용의 뿔과 이빨 같은 날카로운 형태를 모티브로 하는 무기를 디자인한다던가 말이다. '용의 출현'이 부제인 만큼 장식적으로 보이지 않는 선에서 용과 관련된 형상을 활용하면 주제의식을 시각적으로도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형식적인 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해전 장면에 한국어 자막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한산>은 액션 장면이 영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아무래도 액션 장면에서는 독백과 같은 대사는 잘 들리지 않고, 대사를 전달하는 오디오 자체가 한국영화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액션 신에서의 대사 전달력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한국어 자막을 기입한 것을 기발하고 효과적인 아이디어였음이 분명하다.


*항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편에서 투항한 왜군을 지칭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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