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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키 Oct 15. 2023

더 반짝일 수 있었을 다른 우주를 떠나서도 기어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비평문

무모하게 다정하기


‘인생을 기어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쉽게 사는 방법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써 내려가며 흠집 난 자존감을 매만진 적이 있다. 어떤 지인은 미쳐버린 세상을 살아가려면 미친년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 명제를 좌우명 삼아 살아가는 타인도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것만큼, 제정신이 아닌 채 살아가는 것 역시 온당한 세상에서 나는 기어코 다정함의 힘을 믿어보려는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한 적이 많다. 오히려 가장 이기적인 사람은, 사랑이라거나 다정함이라거나 하는 둥둥 떠 있는 형이상학에 애써 기대고자 하는 나 자신일 지도 모르니 말이다. 나는 스스로를 ‘이 세상에 흔치 않은 다정한 사람’이라고 자위하며 남들과 구분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사소한 언행도 버릇처럼 되뇌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과연 다정함을 믿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인지 고민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그렇게 무턱대고 다정해도 된다’고 언명하는 영화다. 어떤 마음가짐이 더 강하고 약한 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다정함이 무기가 될 수 있는 우주는 그 다정함을 믿는 사람들의 세상에 펼쳐질 것이라고 격려하는 영화인 것이다. 다정한 사람들로만 빼곡한 우주에는 영영 도달하지 못할지언정 그런 우주를 아낌없이 꿈꾸어도 좋다고 확신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무모한 다정함을 통해서 되돌릴 수 있는 연은 없어도 붙잡을 수 없는 연은 없다고 - 새로운 미련을 만들지 않는 방법은 다정하는 것뿐이라고 외치고 있는 영화다.




3막 구조와 빨래방


영화 속 세 개의 막은 각각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라는 부제로 구분된다. 각 막이 시작될 때마다 에블린(양자경)은 본인이 운영하는 빨래방의 세무 조사를 준비하는 동일한 상황에 반복해 놓인다. 영수증 결제 내역을 정리하고 정산하는 행위는, 에블린이 지나온 삶과 그녀가 놓쳤던 선택으로 가능했을 인생을 되감아 보는 영화의 주된 서사를 은유하는 장치이다. 국세청 관리자로 등장하는 디어드리(제이미 리 커티스)의 대사, “영수증을 보면 인생을 볼 수 있다”라는 대사는 이 주된 서사와 무관하지 않다.


1막에서 에블린은 세무 조사를 통과하지 못한다. 가게의 지불 내역이 부정확하다는 것이 반려 사유였고 빨래방 지출내역에서 노래방 기계 매입 내역이 발견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여기서 에블린의 남편 웨이먼드 왕(키 호이 콴)은 에블린이 ‘사업과 취미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서 그렇다’라며 그녀의 정산 실수를 두둔한다. 이때 에블린은 가수를 꿈꿨던 적이 있었다고 언급한다. 그녀가 다른 우주에서 다른 삶을 사는 본인을 확인할 수 있는 점프 버스(Jump Verse)를 했을 때 '가수 에블린'이 존재하기도 한다. 에블린은 빨래방 주인으로 사는 삶을 택했기 때문에 가수가 될 수 없었으며 이루지 못한 꿈을 취미로나마 갖고 있는 그녀의 설정이 ‘노래방 기계 구매 내역’으로 증명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국세청은 그 내역 자체를 문제 삼고 있으며 이는 빨래방을 운영하는 에블린의 삶을 부정하고 덜 인정받는 삶으로 규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더해서 1막 첫 번째 시퀀스에서 드러나는 빨래방 손님들의 항의는 에블린의 삶에 대한 언질을 주고 있는데 - 고장 난 기계 때문에 반환되지 않는 20달러,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분실된 세탁물은 각각 에블린이 들인 노력에 비해 마땅한 보상이 없는 삶, 그리고 어느새 방향성을 잃은 그녀의 삶과 대응하고 있다.


2막에서 에블린은 국세청의 세무 조사에 출석조차 하지 않는다. 심지어 빨래방에서 개최한, 많은 손님들이 모여있는 파티 자리에서 그녀는 그 공간을 부수는 - 빨래방은 단순히 직업적 공간을 넘어 에블린의 선택이 구축한 삶의 터전을 상징하기 때문에 - 자기 파괴적인 모습까지 보이게 된다. 포기한 선택지에 대해 미련과 아쉬움이 남아도 애써 본인의 선택에 책임감을 붙들어 오던 에블린이 허무주의적으로 변하게 된 이유는 그녀의 딸 조이 - 동시에 메인 빌런인 조부 투파키(스테파니 수) - 의 영향 때문이었다.


모녀 관계에서도 마찰을 겪었던 에블린과 조이는 사실 다른 어느 우주에서도 기본적으로 비슷한 적대 관계에 놓여 있었다. 자유자재로 점프 버스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조이는 본인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의 우주를 겪게 된다. 하지만 가능한 모든 경험을 하는 것은 오히려 남은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소멸시켜 삶의 가치를 떨어트리게 되고 결국 조이가 허무주의적인 빌런 ‘조부 투파키’가 되는 데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조이의 변화는 영화의 주요한 전제로 기능하는데 이 전제는 알파 버스에 있는 남편 알파 웨이먼드의 대사와 연관 지어 이해해 볼 만하다.


알파 웨이먼드는 빨래방을 운영하는 우주의 에블린이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이유는 이 우주의 에블린이 최악의 경우를 택했기 때문이라고 그녀에게 이야기한다. 현재 우주의 에블린은 최악의 선택을 했기 때문에 최악의 삶을 살고 있으나 반대로 최악의 선택을 피했던, 최선의 선택을 했던 다른 우주의 에블린들은 최선 혹은 최고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어떤 선택이 더 옳거나 나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는 가능한 경우의 수를 모두 경험해 보는 것을 숫제 해결책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겪어본 조이가 자발적인 죽음을 욕망한다는 설정은, 아직은 점프 버스가 불가능한 21세기의 관객들에게 현재의 삶은 그대들의 최선의 선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조심스레 격려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주인공 에블린은 다른 우주의 수많은 에블린들이 되어보는 과정에서 결국은 조이와 같이 허무주의적인 신념을 갖게 되고 빨래방을 깨부수는 자기 파괴를 일삼게 된다.


그런 에블린을 진정시키고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이는 남편 웨이먼드이다. 웨이먼드는 본인도 후회와 미련으로 번뇌하는 전투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하며 그 전투의 무기는 다정함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실현하지 못한 꿈, 탈락된 기회에 미련을 갖거나 더 이상 새로울 수 없는 현실에 허무해하기보다는 당장의 하루를 더 아끼고 소중히 하자는 메시지는 다소 사소하고 평범할 수 있다. 하지만 ‘다정함의 힘’이라는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하기 위해 우주만큼 넓은 궤도까지 확장되었던 이야기가 한 키워드로 집약되는 스토리라인은 멀티버스에 있을 모든 우리에게 위로를 선물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하다. 웨이먼드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에블린은 아즈나 차크라를 상징하는 인형 눈알을 미간에 붙일 수 있게 된다.


허무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조이를 구조하기 위해 에블린은 적들과 대치하게 된다. 이때 그녀는 적들의 이루지 못한 꿈을 생생하게 재현해 줌으로써 적들을 무찌르게 된다. 관통하는 메시지를 잃지 않는 맥시멀리즘 영화가 얼마나 창의적이며 풍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지막 3막에서 에블린은 또다시 국세청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딸 조이, 딸의 여자친구 베키(탈리 메델)와 모두 함께이다. 정산 결과도 훨씬 나아졌으나 그럼에도 국세청에서는 추가 보완을 요구한다. 이는 아무리 만족하고자 노력해도 일말의 후회조차 남지 않는 완벽한 삶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은유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겠다. 영화의 막이 오르고 극장의 불이 켜지고 나면 에블린이 채 완성하지 못한 그 정산은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절대 완전해질 수 없겠지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힘은 아주 조금씩 늘어날 것이고, 우리의 우주는 조금씩이지만 분명하게 확장될 것이니 - 끝이 없는 정산은 비로소 유의미해진다.




때로는 신발을 바꾸어 신거나

눈알을 붙여보자


<EEAAO>가 관객들을 불가항력적으로 웃게 만드는 코미디 영화일 수 있었던 건 인물들이 점프 버스를 하기 위해 시도했던 행동들 덕이 크다. 영화에서 에블린 등 주인공들이 다른 우주의 내가 가지고 있는 강점, 장점을 체화하기 위해서는 가장 엉뚱하고 생소한, 그래서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행동을 해야 한다. 신발의 짝을 반대로 신거나 립밤을 먹는 행동들이 그 예시이다. 이 설정은 영화의 코미디적 요소를 보완하는 것을 넘어서 주제와도 연관이 깊다.


웬만한 경우의 수는 다른 우주에서도 열려있기 때문에, 다른 차원의 세계로 뛰어들기 위해서는 드넓은 우주에 수없이 존재하는 '나' 중에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을 법한 일을 해야 한다. 따라서 영화에서 서술되는 '통계적으로 개연성이 없어'야 하는 행동들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상하고 엉뚱한 행동들이 우리 삶의 개성과 고유성이 된다는 영화의 주제 의식과 맞닿아 있다.


또한 영화의 비주얼 아이덴티티로까지 보이는 인형 눈알이 가진 의미와 울림도 크다. 영화의 맥락을 논외로 보아도 무언가에 눈알을 붙여주는 행위는 그 자체로 어여쁘지 않은가. 이는 비인간 대상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행동이다. 우리의 초점과 시선을 맞출 수 있는 '눈'을 부착한다는 것은 대상을 아끼고자 하는 의도가 여실한 일이다. 단지 색과 위치로만 구분되는 두 돌멩이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 돌들에 눈이 붙여지는 순간 돌이라는 ‘사물’이 ‘인물’로 변하게 된다.


우리에게도 사소하지만 특별한 의미를 일상에 심어두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의 인생은 수 차원의 멀티버스를 오갈 수 있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것과 다르기에 영웅물이 아닐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렇게 정형화된 영웅이 아니기 때문에 고된 수련 없이도 우주를 넘나드는 점프 버스(Jump Verse)를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은가. 짝이 뒤바뀐 신을 신어보거나 가만있는 돌멩이에 눈을 붙여볼 때, 상당히 미미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더 다정히 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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