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개의 따뜻한 기억이 가지는 힘 -
광수는 열여덟 살 고등학생이다. 부모님은 매일 같이 부부싸움을 하다 결국 이혼했다. 자신들의 문제를 처리하기도 바빴던 그들은 광수를 돌봐주지 못했다. 서로에게 아들을 떠넘기다 둘 다 집을 나갔고 광수는 홀로 남았다. 갑작스레 혼자가 되었지만 오히려 조용한 집이 좋았다. 그러나 냉장고에 남아 있던 음식을 모두 다 먹고 나자, 살 길이 막막해졌다. 광수는 배고픔에 결국 나쁜 마음을 먹고 말았다.
편의점을 털기로 했다. 다른 사람이 볼까 봐 집에서 가져온 과도는 신문지에 둘둘 말았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편의점에 들어가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편의점 주인에게 칼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돈통에 있는 돈 다 내놔!"
편의점 주인은 신문지가 칼인 줄도 모르고 덥석 잡았다. 광수는 깜짝 놀라 도망쳤다. 신문지에 말려 있던 칼이 빠지며 편의점 주인의 손바닥이 베이고 말았다. 이것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나는 이 사건을 항소심에서 맡게 되었다. 1심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받고 검사가 항소를 한 사건이었다. 죄명은 강도치상. 이상했다. 강도치상인데 집행유예라니.
강도치상죄는 형법에 '무기징역 또는 징역 7년 이상의 징역형'으로 처벌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형사재판에서 판사는 재량으로 법에 규정된 형량을 절반까지 감경해 줄 수 있다. 따라서 다른 특별한 감경 사유가 없는 한 강도치상죄는 징역 3년 6월 이상의 형이 선고되어야 한다. 집행유예는 징역 3년 이하의 형을 선고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강도치상죄는 일반적으로 집행유예가 불가능한 죄이다. 그런데 집행유예라니!
(강도치상죄는 '5년 이상의 징역'으로 규정된 살인죄보다 법정형이 높다. 강도죄는 '3년 이상의 징역', 강간죄도 '3년 이상의 징역'인데 강도치상은 '7년 이상의 징역'이고 강간치상은 '5년 이상의 징역'이다. 여러모로 이상하다. 강도치상죄에 대해 몇 차례 위헌법률심판이 있었지만 모두 기각되었다. 법정형의 선택은 입법자의 재량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1심 판결문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감경'이 되어 있었다. 술을 마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경우 형을 감경해 줄 수 있는 규정이다.
사실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감경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술 마시고 범죄를 저질렀다고 죄를 가볍게 해주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심신미약 감경은 형법상 책임주의에 근거한 규정이다. 음주나 약물, 정신질환 등으로 의사를 결정하거나, 이를 실행할 능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행한 범죄의 책임을 그 사람에게 100% 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약물이나 정신질환과 달리 술은 자기가 자의적으로 마신 것이지 않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범죄를 저지를지 알고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책임주의 원칙상 술을 마신 행위를 탓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걸 이용해 일부러 술을 마시고 범행을 저지르면 어떻게 될까? 우리 형법은 그런 경우도 대비하고 있다. 자신이 술을 마시면 다른 사람을 때릴 것이라고 예견한 상태에서(예를 들어 평소 술을 마시면 다른 사람을 때리는 습관이 있는 사람인 경우) 술을 마시고 다른 사람을 때리면 그 사람에게 100%의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감경은 책임주의라는 그럴듯한 근거를 갖추고 있지만, 실무에서는 거의 인정되지 않는다. 언론에서는 감경을 인정받은 예외적인 경우만 보도되다 보니, 자주 있는 일인 것으로 오인하는 사람이 많다. 피고인들도 당연히 감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범죄는 술을 마시고 이루어진다. 따라서 술에 취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얘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주장이고, 재판부는 거의 인정해주지 않는다. 국선전담 변호사로 1,000여 건 이상의 사건을 담당하였지만 심신미약이 인정된 경우는 3번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광수는 그 어려운 것을 해낸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이 조금 특이했다. 수사기록 어디에도 광수가 당시 술을 마셨거나 취해 있었다는 내용은 없었다. 1심 변호사가 제출한 의견서에도 광수가 술을 마셨으니 심신미약 감경을 해 달라는 말이 없다. 어찌 된 일일까? 답은 공판(재판) 기록에 있었다.
재판장 : 피고인! 당시 편의점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디에서 뭘 했어요?
피고인 :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재판장 : 변호인! 피고인이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니, 당시 술을 마셨던 것 같은데 혹시 확인해 보셨나요?
변호인 : (잠시 피고인과 상의 후) 피고인이 사건 전에 집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심신미약 감경에 대하여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판장 : 알겠습니다.
쉽게 말해 판사가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술을 먹인 것이다. 눈치 빠른 변호사가 잘 대응해 준 점도 칭찬(?)할만하다. 아무리 술에 만취해서 범행을 저질러도 심신미약을 인정해주지 않는 판국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실 이 사건은 재판을 받기 5년 전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편의점 주인은 사건 당시 신고를 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고, 사건은 그대로 묻히는 듯했다. 그런데 5년이 지나 우연히 범인이 검거되었다. 잡고 보니 광수는 이 사건 이후 정신을 차리고 건실하게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편의점 주인에게도 직접 찾아가 사과하고 피해배상까지 하여 이미 용서를 받은 상황이었다. 광수는 결혼하여 3살 된 딸과 아내, 몸이 아프신 장모님까지 모시고 작은 투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회사 대표와 동료들이 적극적으로 광수의 선처를 법원에 탄원했다. 심지어 피해자인 편의점 주인은 1심 재판에 자진해서 증인으로 출석하여 피고인을 선처해 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사실 이 사건은 그 외에도 선처를 받을 만한 포인트가 많았다. 그러나 그것이 법률상 감경사유가 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① 광수는 사건 당시 미성년자였다. 사건 당시 바로 붙잡혀 재판을 받았으면 소년범으로서 감경을 받을 수 있었으나 5년이 지나 성인이 된 후 검거되는 바람에 감경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범행 당시 소년이어도 재판을 할 때 성인이 되었으면 소년범 감경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대법원 판례의 입장이다).
② 편의점에서 아무것도 훔친 물건이 없었으므로 강도는 미수에 그쳤다. 우리 법상 미수는 형을 감경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판례는 강도가 미수라도 그 과정에서 상해를 입힌 경우 강도치상죄는 미수가 아니라 기수가 된다고 보고 있다. 역시 이를 이유로 감경을 받기는 어려웠다.
③ 편의점 주인이 손에 입은 상처는 심하지 않았고 별도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도 않았다. 우리 판례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고, 그대로 두면 자연스럽게 치유될 정도"라면 상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다. 하지만 칼에 베여 피가 난 사진이 있었고, 진단서까지 제출되어 있어 상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④ 마지막으로 우리 형법은 범행을 자수한 경우 형을 감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광수는 사건 이후 편의점 주인에게 스스로 찾아가 범행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으므로 자수로 형을 감면받을 수는 없었을까? 안타깝게도 자수는 '수사기관'에 하는 경우에만 인정된다. 광수는 피해자에게 자수하였으므로 자수 감면을 받을 수도 없었다.
이렇게 모든 법률상 감경사유들이 아슬아슬하게 광수를 비켜간 것이다. 1심 판사도 고민했을 것이다. 실형을 선고하기에는 너무 안타까운데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만 법정에서 광수에게 술을 먹이고 말았던 것이다(심지어 광수는 사건 당시 고등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검사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왜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을 인정했냐며 항소를 했다. 굳이 이걸 또 항소한 검사가 얄밉기도 했지만, 검사는 검사의 일을 한 것뿐이었다. 항소심에서 이 사건을 받은 나 또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기록상 광수가 술을 마셨다는 증거는 전혀 없었다. 5년이 지난 지금 그런 증거를 찾아내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없는 증거나 증언을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일. 오히려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술을 마셨다고 변론하는 것이 양심에 반하는 것은 아닐지도 고민이었다.
나는 광수에게 그날 정말로 술을 마셨는지 묻지 않았다. 만약 광수가 "사실은 술을 마시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법정에서 술을 마셨다고 변론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사건이 5년 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지금 와서 술을 마셨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따라서 이런 경우 제반사정을 통해 음주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변론하였다. 의견서에는 여러 양형사유들과 안타까운 사정을 구구절절 적었다. 특히 피고인이 사건 이후 5년 동안 성실히 살아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보통 어린 나이에 범죄를 한번 저지른 사람은 범행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광수는 5년간 아무런 범죄 없이 성실히 살아왔다. 적어도 광수는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에게 재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난 그런 광수에게 뒤늦게 징역형을 선고하는 것은 오히려 국가가 나서서 재범 가능성을 키우는 일이라고 썼다.
공판기일에 광수의 아내와 아이를 방청석에 출석시키는 필살기(?)까지 썼지만, 광수는 징역 3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었다. 안타까운 결론이었지만, 그렇다고 항소심 판사를 탓할 수도 없었다. 판사는 사실 법대로 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검사가 검사의 일을 하였고, 변호사가 변호사의 일을 하였듯, 판사도 판사의 일을 한 것뿐이었다. 불만이라면 법정형을 너무 높게 설정해 놓은 강도치상죄를 탓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광수는 징역 3년 6월의 형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아내와 어린 딸을 바깥에 두고 긴 세월을 교도소에서 보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지난 5년간의 삶을 통해 광수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물론 3년 6월의 시간을 견뎌냈다고 하여 끝은 아닐 것이다. 아픈 엄마를 모시고 3살 된 딸을 홀로 키워야 했을 광수 아내의 삶과, 20대 후반에 전과자가 되어 출소하게 될 광수의 남은 삶 또한 결코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광수가 다시 범죄의 길로 빠지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담담히 받아들이던 청년의 모습에서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굳은 다짐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라기로는 부디 광수가 항소심에서 받았던 3년 6월의 엄정한 형보다는, 법정에서 갑자기 술을 먹여가면서까지 해 주었던 1심 판사의 따뜻한 선처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덤으로 광수를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던 항소심의 국선변호사까지도.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한 개의 따뜻한 기억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광수가 그 기억으로 삶의 고단함이 주는 일탈의 유혹을 이겨내고, 어딘가에서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