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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aTina Jan 31. 2023

허무주의 속에서 장난감 눈알이 주는 해답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감독

자신의 현재 모습은 태어났을 때부터 자신이 했던 선택의 연속이다. 바꿔서 말하면, 다른 선택을 하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경우에 따라 무한대의 우주가 동시에 생겨나는 다중 우주 또한 이와 연관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는 다중 우주를 연결하는 기술을 통해 다른 선택을 한 다른 결과의 자신을 경험할 수 있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즉, 존재하는 모든 자신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떨리는 일인가! 하나의 인생만을 겪었던 내가 다른 인생을 경험할 수 있다니! 시공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우리의 정신을 연결하기만 하면, 우리는 ‘어느 것이든’ 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인생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알파 버스에 태어난 ‘조부 투파키’처럼 말이다.





알파 버스는 다른 우주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우주이다. 그렇기에 가장 발전적인 우주이지만, 동시에 이기적인 면모를 보인다. 알파 버스의 에블린은 이 기술을 처음 발견한 유능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딸 조이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극한으로 훈련시킨다. 그 결과, 무한대의 자신을 경험한 조이의 정신은 여러 갈래로 분열되면서 빌런 ‘조부 투파키’가 된다. 에블린의 아버지를 포함한 알파 버스 사람들은 그녀를 ‘목적도 욕망도 없는 순수한 혼돈의 화신’이라고 부르며 괴물 취급했고, 이곳에서의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를 막으려다 희생당한다. 결국 모든 능력을 갖춘 조부 투파키에 의해 알파 버스는 멸망하고, 무한대의 우주가 동시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영화는 이러한 위기를 해결해 줄 영웅으로 ‘빨래방에서 일하면서 세금을 내는’ 에블린을 선택했다. 이 에블린의 삶은 참으로 암담하다. 꿈은 진작에 버리고 살던 그녀는 자신을 간섭하는 아버지와 무능한 남편 웨이먼드, 반항 가득한 딸 조이를 챙기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낸다. 설상가상으로 국세청에서는 탈세 의혹으로 빨래방을 압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에블린 중에서 가장 최악의 에블린이다.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던 그녀가 어떻게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 ‘최악’이라는 이야기를 바꾸어 말하면, 더 나아질 가능성이 가장 넘친다는 의미가 된다. 최악의 에블린이 가장 많은 실패를 했기에 다른 에블린들이 성공할 수 있었고, 무엇이든 너무 못하니까 다른 자신의 능력을 가져올 수 있는 선택지가 가장 많다. 알파 버스의 웨이먼드는 세상을 구할 영웅을 찾다가 최악의 에블린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녀만이 조부 투파키를 이길 유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최악의 에블린은 쿵푸 배우, 셰프, 가수, 심지어 보통 사람들은 접근하기 힘든 ‘소시지 손가락을 가진 인류’가 되기도 한다. 모든 우주를 겪으며 잠재력이 한계에 도달한 에블린은 마침내 조부 투파키와 동일한 상태가 된다. 하지만 조부 투파키는 각성한 에블린과 맞서 싸우지 않고 모든 것을 흡수하는 베이글을 보여준다. 이 베이글에 중요한 판단이나 기준, 감정, 상황, 물건 등 어느 것이든 위에 올리면 그대로 소멸해 버린다.




조부 투파키가 다중 우주 속 모든 조이를 겪으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모순적이고, 만물들은 베이글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모든 가치들이 얼마나 허위적인지를 깨닫는 니체의 허무주의와 비슷해 보인다. 허무주의에 빠진 조부 투파키가 소멸하고 싶었던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녀는 어머니 밑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달래는 방법으로 베이글을 선택했다. 세상 만물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베이글은 오히려 조부 투파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에블린을 비롯한, 세상이 이야기하는 ‘옳고 그른’ 잣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는 다른 우주에서 자신의 상황과 무척 닮은 조이를 발견한다. 최악의 에블린의 우주에서 살고 있는 조이는 동양인이자 레즈비언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보통의 기준에 맞지 않는 그녀는 늘 우울감에 시달렸다. 또한 조이는 에블린에게 자신의 외모, 애인, 심지어 팔에 있는 작은 타투까지 간섭을 받았다. 이 세계의 조이는 조부 투파키의 상황과 무척 닮았다. 조부 투파키를 만난 이후, 에블린은 조이의 슬프고 힘든 감정들에 대해 괴물에 의해 마음이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원인은 에블린 자신이다.


에블린의 조이에 대한 간섭은 그녀가 아버지에게 받은 간섭이 대물림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웨이먼드와 교제하고 작은 빨래방을 운영하는 에블린이 탐탁지 않았다. 아버지 눈치를 보는 에블린은 자신의 딸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자신에 대해 실망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이뿐만 아니라 에블린은 늘 자신에게 닥친 상황들에 휘둘리며 살아온 인물이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후회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변화를 맞이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조부 투파키가 그러한 에블린에게 베이글을 보여주자, 그녀 역시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돌발적인 행동을 저지른다. 세금 조사관인 디어드리에게 빨래방이 압류당해도 상관없는 듯 굴거나, 에블린이 셰프가 된 다른 우주에서는 요리사 동료의 비밀을 모두에게 밝힌다. 이러한 행동들과 함께 에블린의 정신은 무한대의 갈래로 분열한다.




이제 남은 일은 에블린이 조부 투파키와 함께 베이글에 들어가는 것이다.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우주에서 작은 돌이 되어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세상으로 말하다.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가 돌이 된 세상은 평온하다. 인간은 결국 아득한 세상 앞에서 아무 의미 없는 존재인 것일까.


심연에 빠진 둘을 건져내는 인물은 웨이먼드이다. 에블린이 베이글에 빨려 들어갈 무렵, 그녀는 디어드리를 부드럽게 설득하는 웨이먼드를 발견한다. 동시에 다른 세계에서는 서로 싸우려는 사람들을 향해 호소하기도 하고, 에블린에게 전하지 못한 진심을 말하기도 한다. 다소 어리숙한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지만, 그는 어디서나 항상 낙관적이고 다정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정함은 웨이먼드가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에블린의 돌발적인 행동을 단번에 수습한다.


다들 무섭고 혼란스러워서 싸우려는 거 알아요. 나도 혼란스러워요. 하루 종일..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왠지 다 내 잘못 같아요.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거라곤 다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나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022> 웨이먼드의 대사




초반의 에블린은 웨이먼드가 없는 자신의 미래가 무척이나 근사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를 만난 것을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에블린이 보았던 모습은 자신이 TV를 보면서 소망했던,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쿵푸 배우로 활약하는 자신이었다. 에블린이 쿵푸 배우가 된 우주의 웨이먼드 역시 더욱 성공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 세계의 웨이먼드가 간절히 바랐던 것은 의외로 최악의 에블린이 원망했던 ‘함께 빨래방을 운영하며 세금을 내는 삶’이었다. 이와 함께, 모든 세계의 웨이먼드는 모든 세계의 에블린을 여전히 사랑했다.


매일 자신에게 닥친 일에 집중하느라 가족들을 무시했던 에블린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는 조부 투파키가 강조했던 ‘무의미함’이 아니었다. 에블린은 가족과 함께한 순간들이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누구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소중한 가치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삶을 살아가기엔 충분하다. 이를 깨달은 에블린은 오직 조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간다.




에블린이 이마에 붙인 장난감 눈알은 사소한 것을 의미 있게 만드는 웨이먼드의 평소 습관이다. 동시에 베이글에 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베이글의 생김새를 그대로 반전시킨 겉모습뿐만 아니라, 가장 ‘쓸모없고 하찮다는’ 점에서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가장 위대한 베이글과 대조된다. 하지만 남이 볼 때 쓸모없는 것이라도 어떤 이에게는 소중한 가치가 될 수 있기에 장난감 눈알은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무기가 된다. 에블린은 웨이먼드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맞서는 사람들을 대응한다. 릭의 무기를 죽은 아내가 쓰던 향수로 바꾸고, 충돌 증후군을 보이는 남자에게는 가장 필요로 하는 마사지를 해준다. 또한, 에블린이 셰프인 우주에서 울고 있는 동료에게 라따구리를 되찾게 한다. 에블린은 자신의 인생과 비슷한 디어드리에게도 사랑스러운 점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모두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되찾아준 에블린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간섭의 대물림을 끊어버린다. 그녀는 자신의 엉망인 삶을 그대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조이의 삶도 인정한다. 이와 함께 모든 세계의 에블린은 모든 세계의 조이에게 달려든다. 베이글로 뛰어드는 조부 투파키의 손을 있는 힘껏 잡아주고, 돌이 되어 절벽으로 굴러 떨어지는 조이를 따라 자신도 절벽으로 떨어진다. 동시에 에블린은 조이를 두 팔 벌려 안아준다. 결국 많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되고, 모녀가 삶의 가치를 찾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극복 서사로 끝이 난다.




"난 어디든 갈 수 있는데 뭐 한다고 너랑 여기 있겠니? …난 언제까지나 너랑 여기 있고 싶어."

"나머지 문제들은 무시할 거야? 뭐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잖아. 왜 그런 곳으로 가지 않은 거야? 엄마 딸의 모습이 안 이런 곳. 이곳은 그래봐야 상식이 통하는 것도 한 줌의 시간뿐인 곳이야."

"그럼 소중히 할 거야. 그 한 줌의 시간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022> 에블린과 조이의 대사


다른 선택에 의한 다양한 결과들을 보면 결국 ‘최선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에블린이 쿵푸 배우가 된 우주의 웨이먼드는 최악의 에블린이 원망하던 삶을 꿈꾸고, 가장 뛰어난 알파 버스의 에블린은 가장 먼저 희생당했으며, 최악의 에블린은 가장 다정한 방법으로 세상을 구했다. 최선과 최악은 무척 주관적인 것이기에, 우리는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최선으로 여기며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인생의 진리를 찾을 수 없다. 또한 다양한 선택지에 비해 하나의 선택만 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은 멀리서 보면 아득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가장 최선이라고 여기는 단 하나의 가치를 우선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 있지 않을까 싶다. 생각보다 엉망이고 남들이 보기에는 하찮은 것이라도 모든 것을 사랑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것이 삶을 살아갈 원동력이 된다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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