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naTina Feb 17. 2023

무수한 데이터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을 외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 감독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다니엘의 항고 내용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는 매우 빠르다. 현대인들은 변해가는 세상에 발맞춰 움직이느라 바쁘다. 이러한 사회에서 쉽사리 적응이 어려운 이들이 있다. 심장병으로 인해 의사에게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소견을 받은 '다니엘 블레이크'가 그렇다. 요즘의 디지털 시대에서 그는 아날로그의 삶을 살아왔다. 목수로 평생을 일해 왔으며, 무언가를 작성할 일이 생길 때는 연필을 고집한다. 그는 자신의 삶에 크게 불만이나 욕심을 가진 적이 없었던 평범한 시민이다.


다니엘은 질병 수당을 받기 위해 조사관을 찾는다. 질병 수당 자격에 관한 질문은 '자명종을 맞추는 건 가능하세요?'와 같이, 심장병과는 조금 동떨어진 듯한 질문이었고, 조사관은 자신을 정부가 고용한 의료 전문가라 자칭한다. 결국 그는 지극히 상투적이고 기계적인 방식에 따라 조사관이 제시하는 조건에 부합하지 못했고, 질병 수당에 대해 부적격 판정을 받는다.


다니엘은 질병 수당을 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복지 시스템은 그를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벼랑 끝으로 내몰기 바쁘다. 판정에 대해 항고하기 위해서는 재심사 과정을 거쳐야 하고, 재심사를 하려면 심사관의 통보 전화를 기다려야 하며, 신속한 요청을 위해 다른 담당자를 부르고 싶어도 일이 있다는 말만 반복하는, 그야말로 황당한 상황이 그대로 펼쳐진다. 다니엘은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인터넷도 켜보지만, 평생을 연필 시대로 살아왔던 그에게 디지털 방식은 미지의 영역일 뿐이다.




쓸데없이 복잡하고 경직된 시스템에 혀를 내두르던 주변인들은 그를 만류하지만, 다니엘은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을 전혀 할 수 없는 상태인 그에게 구직 수당 신청과 이력서 작성 특강을 권유하고, 그가 내민 빼곡히 적은 수기 이력서와 도서관 출입증을 증빙 자료로 받아들이지 않자 다니엘은 무력감에 빠진다. 시스템에 의해 순식간에 제재 대상이 되어버린 그는 무관심에 맞서 건물 외벽에 스프레이로 글씨를 써 보이지만, 이마저도 경찰에 의해 제재를 받는다. 단지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요구했을 뿐인데, 그는 어느새 공공기물을 훼손한 전과자가 되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최소한의 생활을 국가가 보장한다는 의미의 슬로건이다. 하지만 국가가 모든 이들에게 형평성을 제공하기 위해 도입한 시스템은 아이러니하게도 부당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빠르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미리 정해 놓은 대응 방식과 지극히 합리적인 매뉴얼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모순적이다. 인간의 생활은 특정한 척도로 결정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 질병이나 사고가 발생해서 순식간에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개인의 상황은 특수하고, 예측할 수 없으며, 변수가 많다. 하지만 이를 전부 고려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시스템은 수많은 사례를 몇 가지의 숫자와 데이터로 변환하여 하나의 결과로 일단락시킨다.




다니엘의 삶은 이러한 개인을 표상한다. 영화는 그가 질병 수당을 받기 위한 고군분투 외에도,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케이티가 보조금이 끊겨 난방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창문에 단열재를 붙여 방 안을 덥힌다. 아이들에게는 목재 모빌을 만들어 주고, 어려운 생계에 의해 무력해진 케이티에게는 따스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조건 없이,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자신만의 방법으로 말이다.


제재 대상이 되어 모두 포기한 듯한 다니엘에게 손을 내민 것은 케이티 가족이었다. 다니엘은 케이티의 도움을 받아 항고 준비를 다시 시작한다. 항고는 승산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재판을 앞두고 다니엘은 돌연 화장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은 심장병에 의한 것이었지만, 기본적인 생활조차 영위하지 못하는 현실의 암울한 결과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장례식장에서 케이티가 대신 전하는 그의 목소리는 남아있는 '개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회적 약자인 그에게 모든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 전까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이웃들을 사랑했다. 케이티에게 자신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했으며, 그녀의 아이들이 언제까지나 천진난만함을 유지하도록 정서적 안정을 제공했다.


영화에서 노골적으로 부당함에 대한 메시지를 드러내거나, 부유한 사람을 등장시켜 대조하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어떠한 자극적인 요소 없이 담아낸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어쩌면 개인이 시스템에게 요구하는 것 또한 기계음 소리가 아닌 인간적인 대우였을지도 모른다. 친절한 말 뒤에 숨은 날 선 불편함이 아닌 솔직한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니엘의 상황에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는 듯이, 거리에 나와있는 사람들은 외벽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아날로그의 방식에 무척 열광한다. 무수한 데이터가 끊임없이 생성되는 세상에서, 그는 무사히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세상을 향하여 요구한다.




I DANIEL BLAKE, DEMAND BY APPEOL DATE BEFORE I STARVE AND CHANGE THE SHITE MUSIC ON THE PHONES!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상담 전화의 구린 대기음도 바꿔라.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aver?code=150376


매거진의 이전글 불가능이라는 구분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