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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aTina Mar 10. 2023

영화 속 소희를 위로하는 수많은 '유진'에게

<다음 소희> 정주리 감독

법률상 만 19세에 달하지 않은 사람을 미성년자라고 정의한다. 당연스럽게도 이들은 보호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성숙하지 못했고, 간혹 이러한 요소들이 성인만큼 충족되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인 경험이 성인보다 부족해서 올바른 판단을 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면서 온전한 성인이 되기 위한 육성 과정을 거친다.


이들을 위한 대표적인 울타리는 학교이다. 학교의 기능은 단순히 학생들이 교사의 지도에 따라 교육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미성숙한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 또한 학교에 있다. 하지만 간혹 일차적 기능에만 집중하여 가장 중요한 다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2017년 초, 특성화 고등학교 현장실습의 일환으로 대기업 콜센터에서 근무하던 여학생이 불과 5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시사고발 프로그램은 이를 취재했고, 현장실습에 참여한 학생들이 어른들마저 혀를 내두르는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고초를 겪고 있음을 알렸다. 하지만 비극적인 사건은 여전히 끊임없이 발생했다. 그 해 말에는 제주도의 한 음료 공장에 배정받은 학생이 기계를 정비하던 도중 컨테이너에 깔려 숨졌고, 3년 뒤인 2021년에도 한 학생이 여수 요트선착장에서 조개와 해조류를 제거하는 고된 잠수작업을 하다가 사망했다. 직업 교육이 목적인 학교 특성상 전공을 선택하여 배우는 것이 가능했지만, 막상 현장실습을 통해 배정받은 일자리는 학생들의 전공과는 무관했으며, 미성년자 근로기준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학교들은 오직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을 열악한 환경에 마구잡이로 내몰고 이를 좋은 기회라며 다그쳤다.




<다음 소희>는 앞서 언급했던 전주 콜센터 실습생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이다. 시린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한 소녀의 죽음은 더욱 뼈저리게 다가온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소희'의 죽음을 분기점으로 전반부는 소희의 시점에서, 후반부는 그녀의 죽음을 파악하는 형사 유진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대부분의 수사물은 형사의 의문을 시작으로 사건의 진상을 서서히 밝히는 구조이지만, 이 영화는 초반부터 소희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빠짐없이 보여준다. 이는 감독의 인터뷰에서 말했다시피, '소희의 죽음에 대해 어떠한 미스터리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감독의 배려였다. 더 나아가 소희의 죽음과 비슷한 수많은 사건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여기에서의 희생자들은 명백한 피해자라는 점을 강조한다.


영화는 실제 일어난 사건과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애완동물 관리과였던 소희는 전공과 무관한 콜센터 내 해지 방어팀에 들어간다. 이미 해지를 결정한 고객들의 마음을 돌려야 하는 일이기에 타 업무보다도 유난히 업무강도가 높다. 성인들도 맡기 힘들어하는 업무를 그대로 넘겨받은 고등학생들은 학교에 의해 그만두기도 어려워서 그저 이곳에서 버티기만 한다. 당찬 성격의 소희 또한, 일을 시작한 이후 당일 콜 수를 채우기 전까지는 집에 들어가지 못했고, 고객들의 궂은 욕설도 꾹 참아내며 일을 적응하기에 바빴다.




소희의 업무는 감정노동에 가까웠다. 실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무관하게 직무를 해내야 실적을 올리고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일에 매달려 있던 탓인지, 소희는 일 바깥에서도 감정을 숨기기 시작한다.


친구들, 남자친구, 댄스 동아리, 사원 동기 소희는 늘 누군가와 함께였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힘든 점을 온전히 터놓을 수 없었다. 영화 초반에서 불의를 참지 못했던 소희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현실을 묵인하는 소희보다도 더 안타까웠던 사실은 이러한 변화를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부모님은 그저 딸이 대기업에 갔다며 뿌듯해하고, 담임 선생님은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강조하며 실적만을 운운했다.




소희를 포함한 어린 직원들을 보호했던 인물은 팀장 준호였다. 직원들이 업무를 하면서 겪는 성희롱과 농담 섞인 조롱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수위였고, 준호는 그럴 때마다 앞장서서 고객에게 화를 냈다. 이는 언뜻 보면 불의를 참지 못하는 소희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회사는 사원들의 심리적 충격보다는 고객의 불편을 우선시하며 도리어 준호를 탓했다. 결국 무력감을 느낀 준호는 고발장과 함께 차 안에서 숨을 거두고, 소희는 흉흉한 소식이 새어나갈까 봐 직원들을 입막음하는 회사의 지속적인 압박에 의해 쥐 죽은 듯 사실을 묵인해야만 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일을 재개하는 다른 직원들을 보며, 소희는 회사에서 그토록 지향하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미친 듯이 일을 한다. 하지만 소희는 곧 자신에게 돌아올 인센티브가 늦게 지급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를 꾸짖는 새로운 팀장과의 다툼으로 징계를 받는다.




무급휴가를 보내면서 슈퍼마켓에서 체념한 상태로 술을 먹던 소희에게도 말을 걸어주는 이는 없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마주한 것은 슈퍼 문틈 밖에서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한 줄기의 빛이었다. 마치 어딘가로 인도하려는 듯이, 자신의 발끝에 슬며시 닿는 빛을 보며 소희는 죽음을 결심한다. 정확히 말하면, 깨진 유리를 손목에 그었던 것에 뒤이어 두 번째로 죽음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강가는 아름다웠고 햇살은 따스했던 풍경 속에서 소희는 덤덤하게 물가로 걸어간다. 차가운 물에 점점 잠기며, 소희는 그 안에서 천천히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의 이야기는 형사 유진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그녀는 댄스 동아리에서 소희와 우연히 스쳐 지나갔던, 가장 연관성이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동시에 누구보다도 소희를 진심으로 위로했다. 전반부에서는 홀로 조용히 감정을 삼켰던 소희 개인의 현실을 보여주었다면, 후반부는 유진의 조사를 통해 책임 소재가 비단 한 명의 학생에게만 있는지 의문을 가지며, 전체적인 시스템과 배경에 대해 비판한다.


소희의 죽음 이후, 그녀의 학교를 포함한 여러 기관들은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합리화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안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고, 이들은 이를 변명삼아 한 개인에게 낙인을 찍는 방법을 선택했다. 유진은 이러한 기관들의 대척점에 서서 울부짖으며 그들을 원망한다. 그리고 우연히 발견한 댄스 영상을 시작으로, 소희가 마음속으로 간직했던 취미와 작은 희망에 대해 알아간다. 조사가 끝난 뒤 유진이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곳은 슈퍼마켓이었다. 그녀는 소희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소희가 바라보던 한 줄기의 빛을 마주하며, 소희의 아픔을 뒤늦게 위로한다.




영화에서는 유진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카메라는 유진의 동선을 묵묵히 따라간다. 이를 통해 한 소녀의 죽음 뒤의 수많은 연결고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소희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에도 함께한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고, 개인이 해결하기 어려울 정도로 암담했지만, 적어도 현실에서는 다음 소희가 나오지 않기 위한 도약이 되지 않았을까.


감독은 이 사건을 다른 장르가 아닌 영화로, 그중에서도 드라마 장르로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무거울 수 있는 소재에서 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한 사람의 죽음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슬픈 감정만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이 문제가 소희를 비롯한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상기한다.




영화의 결말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시도 자체만으로 더 이상 비극이 아니게 된다. <다음 소희>라는 제목의 의미는 영화 속 피해자 소희를 비롯한 수많은 어린 학생들에 대한 위로이자, 더 이상 일련의 사건들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한 염원이다. 2017년 사건 당시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긴밀하게 취재를 하며 대중들에게 드러냈던 것처럼, 이 영화 또한 관객들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방법으로 사건에 대한 기억 장치가 되기를 자처한다.


영화에서는 단 한 명의 뒤늦은 후회로 끝이 났지만, 현실에서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아직도 불공정한 노동 환경에서 근무하고 있는 수많은 소희들을 위해, 영화를 본 수많은 '유진'이 끊임없이 앞장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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