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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aTina May 12. 2023

찬란한 햇빛에 가려져 눈여겨보지 못했던 것들

<애프터 썬> 샬롯 웰스 감독

누구나 어린 시절의 즐거웠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추억은 이리저리 변형되며 전혀 다른 기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카세트테이프에서 특정 구간을 자르고 남은 부분을 억지로 이어 붙인 것처럼, 강렬했던 기억은 더욱 과장되어 나타나고, 상대적으로 변두리에 있던 기억은 희미해진다.


기억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가치관이 변화되기 때문이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어렸을 때 나쁘게만 보았던 동화 속 빌런들을 이해할 수 있으면 진정한 어른이 된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유년 시절에는 크게 느끼지 못했던,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서도 이제야 그 실체가 무엇인지 파악이 가능할까. <애프터 썬>의 주인공 '소피'의 회상은 이러한 기억의 속성에 대해 다룬다.




대부분의 장면은 소피의 회상이다. 소피는 자신의 서른한 번째 생일날 자신의 아버지인 '캘럼'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녀는 20여 년 전 아버지와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이었던 튀르키예 여행을 회상한다. 그 당시의 캘럼은 현재의 소피와 동일한 31살이었고, 여행 기간 중에 생일을 맞이했다.


그 당시에 11살이었던 소피에게 튀르키예 여행은 즐거운 기억이었다. 따스한 햇빛 아래 울렁이는 파도, 자신들처럼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 밤마다 벌어지는 화려한 파티는 온종일 소피의 눈을 사로잡았다. 특히 소피는 아직 겪지 못한 어른의 세계를 동경했다. 여행 내내 자신의 또래가 아닌 청년들과 어울렸기 때문일까. 그녀는 성과 사랑에 대해 관심을 갖고, 나이 제한이 있는 페어 글라이딩을 하고 싶어 하고, 술자리에서 환타를 마시기도 한다. 호기심에 못 이겨 우연히 만난 또래 남자아이와 비밀스러운 첫 키스를 했던 경험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피는 어른의 세계를 헤아리기에는 미숙했다. 그녀는 사랑을 알고 싶었지만, 정작 헤어졌는데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여행 내내 자신을 지켜주는 어른이었던 캘럼과 온종일 놀면서도, 간혹 보이는 그의 회피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11살의 소피는 여느 사춘기 소녀와 다름없었고, 오랜만에 본 아버지와는 조금 서먹한 관계였다. 어렸을 적 같이 불렀던 노래를 더 이상 불러주지 않고, 캘럼의 고향이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 다소 어두워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소피는 낯섦과 실망감을 느끼곤 했지만, 그것들이 곧바로 의문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렇게 튀르키예 여행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은 채, 그 이면을 알지 못하고 추억 속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피는 가슴 한편에 남아있던 아버지의 낯선 모습에 의문을 가지곤 했다. 이는 제 아버지와 같은 나이인 31살이 되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소피는 그 당시에 촬영했던 캠코더 영상을 통해, 캘럼이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 당시의 소피가 새로운 일들에 관심을 갖는 동안, 캘럼은 사연이 담긴 카펫을 구매하고, 홀로 차가운 바다로 향했다.




'11살 때 아빠는 지금 뭘 할 거라 생각했어요?'


어른을 동경했던 소피는 캠코더를 들고 캘럼에게 묻는다. 하지만 캘럼은 질문을 회피한다. 그의 사연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그는 현재의 삶에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소피에게 여행의 즐거운 추억만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감췄다. 캘럼의 유년 시절의 어두운 기억들을 소피가 똑같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내일도 신날까?'라고 묻는 소피에게 강한 확신을 준다.


결과적으로, 여행 마지막 날 소피는 캘럼의 생일을 진정으로 축하한다. 소피에게 생일은 '즐거운 날'이기에 관광객들과 함께 웃으며 노래를 불러주지만, 정작 캘럼은 소피와 같은 나이였던 11살 생일 때 어두운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에 축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소피에게 좋은 추억만을 남기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자신은 여행 끝무렵 더욱더 큰 우울감과 공허함 속으로 빠지게 된다. 


두 인물의 잊지 못할 여행은 끝내 동상이몽의 형태로 마무리되었다. 그로부터 20년 뒤, 어느덧 캘럼과 같은 나이가 된 소피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며 아이를 키우게 되었다. 하지만 11살 당시의 어른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마냥 행복했던 추억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겁게 느껴졌다. 이렇게 달라진 기억 속에서 소피는 캠코더 영상을 보며 여행 속 캘럼의 흔적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아버지 역시 미숙하고 위태로운 상황이었음을 알게 된다. 




기억의 변두리에 있던 캘럼은 늘 춤을 추는 듯한 무술 동작을 취했었다. 이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소피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창피하게 여겼다. 비록 여행 마지막 날에는 캘럼의 동작에 호기심이 생겨 함께 따라 해보기도 하지만, 정작 그가 왜 이러한 동작들을 반복적으로 취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의 소피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이해한다. 번쩍거리는 조명과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31세의 소피는 31세의 캘럼을 비로소 정면으로 마주한다. 캘럼은 알 수 없는 무술 동작을 취하던 그때처럼 춤을 추고 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조명에 따라 그의 표정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울부짖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선명해지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기억은 변화되기에 수면 아래 있던 부분들도 뒤늦게 떠오르기 마련이다. 모든 것이 막연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많은 것들을 접하고 느꼈던 지금은 비로소 알지 못했던 것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피가 늘 궁금해했던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란 이런 것들이 아닐까. 환상적이고 찬란했던 시절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같은 곳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애프터 썬>은 이러한 빛바랜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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