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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어학연수] prevent

by 다락방

레벨 4에서의 첫 테스트를 치렀다.

라이팅도 어려웠지만, 이번엔 무엇보다 리딩이 어려웠다. 지문 해석의 어려움보다는 질문 이해에 어려움이 더 컸다. 알지 못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러다보니 그 문장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거다. 리딩 시험을 치르고난 후 답안지를 제출하자마자, 나는 prevent 의 뜻을 찾아보았다. 분명 언젠가 보았던 단어이긴 하지만 뜻을 알 수 없는 단어였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 단어 뜻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레벨4로 오면서 모르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고 그래서 기억하려고 시도해보았고, 그러다보니 기억하게 된 단어도 있고 또 그렇지 못한 단어들도 있지만, 이 단어 prevent 는 이번 학기에 수업중에 본 단어는 아니었다. 언젠가 어디선가 보았던 단어, 그런데 뜻을 모르는 단어인거다.


prevent 가 질문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였다. 주어진 지문은 '치즈'에 대한 것이었고, 치즈는 fat 하게 만든다는 소문과 달리 건강에 좋다, 칼슘과 인이 포함되어 있어 충치를 생기지 않게 하고 이빨과 뼈를 튼튼하게 한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문제에 prevent 가 나왔는데, 이 단어를 모르니 지문을 이해하도 답을 할 수가 없는거였다. 나는 이것이 치즈의 긍정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한 단어라고 생각했고, 그래 그렇다면 build teeth 를 쓰자, 라고 해서 답을 제출했다. 답안지 제출후 찾아보니 prevent 는 '예방'이란 뜻이었고, 그걸 알자마자 하... 망했다, 싶어졌다. 그렇다면 답은 cavity 였구나... 하아-


테스트가 끝나자마자 L 이 내 자리로 왔다. 평소 우리가 톡으로 얘기를 나누기는 하지만, 이렇게 직접 내자리까지 그가 오는 일은 없었는데, 이번엔 와서는 '엄청 어려웠지?' 하고 묻는거다. 아마도 나에게 어렵다는 답을 듣고싶은것 같았다. 그러니까 어려운 것을 다른 학생도 동의하는지 알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그렇다고, 너무나 어려웠다고, 특히 리딩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다른 학생들도 그렇다고 했다. 저 단어 말고도 단어의 뜻을 몰라서 제대로 답하지 못한것 같은 문제가 더 있을것 같은데 기억나진 않고, 이번에 리딩은 어려웠고 잘 보지 못했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채점된 결과가 나왔다.


이 midterm test 는 다음 레벨로 가는데 영향을 주는건 아니고, 그저 단순한 테스트였기 때문인지, 선생님은 학급 아이들의 각 영역별 점수를 칠판에 띄워두셨다. '니네 점수 확인해라' 하고. 그래서 공개된 내 점수는


스피킹 23, 리스닝 21,5 리딩 16 라이팅 17 이었다.


학급 아이들 중에 리스닝을 20점 넘은 학생들이 한 명도 없었다. 리스닝 점수는 내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리딩도 다른 학생들 점수가 너무 낮아서 점수만으로 단순 비교를 해보면 내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리딩에서 16점이라니 수치스러웠다.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라이팅은 한자리 점수를 받은 학생들이 많아서 17이 역시 못한건 아니지만, 제일 잘한 것도 아니었다. 학급에 제일 잘한 애가 18점 이고 딱 한 명 있었다. 나는 그 18점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또 몹시 싫었다.


사실 점수가 내가 대부분 압도적으로 높은 편이어서 무심히 보는데, 저기 뒤에 있는 학생중 하나가 리딩이 21점인걸 확인했다. 헉! 게다가 스피킹도 21, 라이팅도 16인가 되어서 아주 높은 점수였다. 독보적이었다. 나는 얼른 그 학생의 점수를 연습장에 적어두었다. 그리고 다 더해보았다. 그 학생의 토털 점수는 74점 이었다. 그리고 나는? 77.5 였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얘기하면, 내가 이번 레벨의 첫 테스트에서 1등을 한 건 맞았다. 그렇지만, 2등과의 점수차가 고작 3점 이었다. 답안지 받아서 체크하고 보니 정답이 station 인데 내가 그렇게 썼는데 1점이 아니라 0.5를 받았기에 선생님께 이거 왜 이런 점수냐 물어보니, 내가 n을 n처럼 보이지 않게 썼기 때문에 감정시켰다고 했다. 아.. 내가 너무 막썼구나. 사실 좀 억울하긴 했지만, 이건 테스트이기도 하고, 이렇게 해야 내가 다음번에 똑바로 쓰는 걸 훈련하게 될테니, 받아들여야 할 결과라고 생각했다. 평소 성실하게 열심히 준비하던, 그러니까 라이팅에서 독보적으로 혼자서 18점 받았던 친구의 총점은 65 였다. 사실 1등인 나와 2등인 학생의 점수차는 아주 적지만, 그 다음 학생들과의 점수차는 좀 많이 났다.


나는 기분이 아주 안좋았다. 아주아주 안좋았다. 우선, 내가 리딩이 16점이라는 사실이 너무너무 싫었다. 내가 치른것인데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답안지를 보니 예상했던 충치 문제도 틀렸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것에서도 많이 틀렸더라. 대부분 '아, 이거 아니면 이건데' 하다가 고른 답들이 틀렸다. 뭐가 됐든 틀린게 맞다. 다른 학생은 맞히는 문제를 나는 틀린거였다. 레벨3에서 첫 midterm test 는 리딩이 만점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점수가 확 떨어질 수가 있을까. 수치스럽다.


게다가 막연하게 '나는 잘할거야' 라고 생각했던 글쓰기도 정말이지 만만찮았다. 고작 17점 이라니, 게다가 학급에서 가장 잘쓰는 학생이 내가 아니라니, 이거야말로 또 너무나 부끄럽고 싫었다. 리딩도, 라이팅도 너무 화가 났다. 왜 이것밖에 못하지? 어떻게 해야 여기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지? 게속 집착하게 됐다. 무엇보다,


2등과의 점수차가 고작 3점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신경이 쓰였다. 곧 있을 mock test 에서 내가 1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해야 하는걸까. 그 학생은 조금만 노력하면 1등이 될 수도 있을터였다. 그 학생이 1등이 된다는건, 내가 1등을 하지 못한다는 걸 의미했다. 이런 생각들을 반복하고 또 이 점수와 등수에 집착하면서, 나는 나에게 크게 놀랐다. 내가 이런 나의 고민과 신경쓰임, 스트레스에 대해 얘기하자, 내 여동생이 그랬다.


"언니, 그렇게 점수와 일등에 집착하는 사람인 거 그동안 전혀 몰랐네?" 라고.


당연하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내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와 나 이거 못하네' 하고 말았고, 내 등수에 대해서 그렇게 집착하는 사람도아니었다. 잘하고 싶은거야 모든 학생들의 공통적 바람일테지만, 그걸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스스로의 점수를 받아들이지 못해 화가 나는 그런 사람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공부를 잘하는 학생의 특징 같은 것을 나는 전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야, 내 자식뻘인 학생들과 공부하는 지금에서야, 내 점수와 등수에 집착을 하고 있는 것이다. 1등을 빼앗길까봐 너무나 불안하고, 읽기와 쓰기의 낮은 점수가 너무너무 부끄럽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압도적인 1등을 하고 싶닥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이, 내가 이렇게 성적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내 스스로도 너무나 낯설다. 그래서 자꾸만 생각하게된다. 내가 어릴 때 이런 성향의 사람이었다면,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었을텐데... 뒤늦게 이게 뭐람?


너무 내 머릿속에 성적과 등수에 대한 생각이 가득해서, 이런 마음을 좀 털어버리고자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가도 불쑥불쑥, 어떻게 읽기를 16점 받을 수 있지? 이러면서 또 어이가 없는데, 엊그제는 갑자기,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데 한글로 되어있는 문제도 틀리는데, 영어로 된것도 틀리는게 당연하잖아?'


그렇게 내 마음을 조금 다스리고 있다. 아 그런데도 너무나 속상하다. 내 읽기 점수가 속상하고, 그래서 걱정이 된다. 다음 테스트에서 잘할 수 있을까? 내 라이팅 점수가 짜증나고 그래서 걱정이 된다. 내가 다음번 테스트에서 라이팅을 잘 할 수 있을까? 내 리스닝과 스피킹은 지금처럼 높은 점수를 유지하는게 가능할까? 떨어지면 어떡하지? 이런 불안감을 안고 지내고 있다. 그래서 스트레스다.


사실 통과만 하면, 5레벨로 갈 수 있는데, 통과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까, 그냥 마음 편하게 먹어도 되는데, 그런대 왜이렇게 짜증이나고 신경이 쓰이는걸까. 왜 자꾸 높은 점수를 받고 싶고 왜 1등하고 싶을까. 왜 1등 뺏기기 싫을까. 진작 이렇게 학창시절에 1등하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으니.. 도대체 왜, 하필, 지금, 왜.....



그 날 저녁, 집에 가서 저녁에 싱가폴 폰을 확인해보니 L 로부터 톡이 와있었다. 나 점수가 너무 낮아, 하고 걱정하는 톡이었다. 나는 일단 급한대로 레벨4가 너무 어렵지, 나도 어려워. 우리는 좀 더 열심히 공부해야해, 라고 보내놓고 나서 안되겠다, 얘 도와줘야겠다 싶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나는 교재를 들고 L 에게로 갔다. 그리고 뒷부분을 펼쳐 보이면서, 너 여기에 듣기 스크립트 있는거 알아? 했더니 몰랐다고 했다. 이거 읽어. 이거 분명히 테스트에 도움이 돼. 그리고는 너 폰 꺼내봐, 했다. 그래서 그는 폰을 꺼냈다.


자, 유튜브 열고 BBC 쳐봐, 했다. 그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재생시킨 다음에 여기 cc 보이지, 이거 눌러봐, 그러면 영어로 자막이 떠. 그러자 그는 오! 했다. 이것도 들어. 이것은 너의 리스닝에 도움이 될거야, 라고. 사실 그렇게 말하는 나도 그걸 하는건 아니었지만, L 에게 공부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긴 해야했다. 그는 내게 고맙다고 계속 말했다.


아, 성적에 대한 내 집착이 싫다. 무엇보다 이게 이렇게 늦게 찾아온 게 싫다. 이런 마음가짐, 어릴 때 학교 다닐 때 있었으면, 중학교때 그리고 고등학교 때 있었으면, 그랬으면 전교1등도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것까진 무리였을까.


아무튼 빡센 레벨4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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