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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성훈 Mar 06. 2023

그 가족을 가족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영화 <어느 가족>을 보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을 보았다. 2019, 2020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관람이었다. 영화는 10시에 끝이 났는데,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해서 이를 모두 풀어내고 나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지금부터 그 간 밤의 생각들을 풀어내보고자 한다.



세 번째 관람인 만큼 스토리는 이미 알고 있어서 세부적인 대시와 연출에 집중하며 봤다. 그럼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빠져서 봤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여섯 명의 가족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전남편을 살해한 다음 같이 묻었던 노부요와 오사무. 할머니랑은 어떻게 만났었을까? 아키도 돈을 내야 한다는 오사무의 말에 할머니가 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며 이유로 들었던 “계약”은 누구와 누구의 계약이었을까? 노부요, 오사무, 할머니, 아키, 그리고 쇼타와 린까지 그들은 어떻게 만나 가족이 되었을까?




노부요는 엄마로 불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녀가 린과 쇼타에게 마음을 주었던 것은 진심이었을까, 자신이 그리는 엄마로서의 역할을 할 대상이 필요했던 걸까. 그녀는 끝내 조사관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다. 그녀는 쇼타가 친부모님을 찾길 바라며, 쇼타를 주워왔던 장소를 알려준다. 그녀가 “안녕”이라고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쇼타에게 던지는 마지막 인사였을까? 다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그동안의 기억들을 즐거운 기억으로 남겼다는 것.


영화 속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를 꼽자면 바로 이것이다. 

아빠는 이제 아저씨로 돌아갈게


오사무는 극 중에서 쇼타에게 “아빠”라고 불러보라며, 그리고 린을 “여동생”이라고 불러보라며 가족의 형태로서 살아가길 원한다. 하지만 그는 쇼타가 다치고 나서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다. 쇼타도 그걸 물었고, 그는 맞다고 솔직히 말한다. 그때가 오사무 자신이 이 아이에게 진짜 가족, 진짜 아빠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마치 사람인 척하지만 아침이 되면 녹아내리는 눈사람처럼.


할머니는 아키 할아버지의 전부인으로 나온다. 아키는 그 관계를 몰랐었지만 할머니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손녀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피는 섞이지 않았겠지만. 그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지냈을까? 왜 아빠는 아키가 호주에 있다고 했을까? 가출을 한 것일까? 극 중에 모든 해답이 나오진 않는다. 다만 할머니는 아키의 발의 온도를 느끼고 “무슨 일 있냐”라고 물어볼 정도로 손녀에게 관심이 많았고 아키 또한 옆에서 자려고 할 정도로 잘 따랐던 것 같다. 둘의 관계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할머니는 마지막 해변가에 놀러 가서 노부요에게 예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멀리서 그들을 향해 “고마웠어”라고 이야기한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그녀에게 이 가족은 어떤 가족이었을까? 자신의 다리에 있는 검버섯을 보면서 어떤 생각에 잠겼었을까? 과연 나는 그 나이가 되어서 멀리서 가족들을 바라보고 있는다면 어떤 감정이 들까?


쇼타가 다치게 되면서 이 ‘어느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분명 시간을 함께 하고, 친가족보다도 서로에게 정을 주었지만 말이다. 그들은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었을까? 할머니가 죽었을 때 돈을 먼저 찾는 장면에서는 오로지 “돈”이 그들을 연결하는 아주 약하디 약한 연결고리 같아 보이기도 하고, 서로를 끌어안는 모습에서 그들은 어느 가족보다 더 가족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가 그들이 가족이었냐고 물으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혈연 상의 가족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선택했었다. 린은 남는 것을 선택했었고, 할머니도 노부요를 선택했다. 하지만 반대로 쇼타는 다른 선택을 한다. 린이 도둑질을 하는 것을 보고 그 굴레를 끊고자 스스로 붙잡히는 선택을 한다. 노부요의 말대로 쇼타에게는 이제 새로운 환경이 필요할 때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의 시간은 쇼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인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정립해 나간다. 노부요와 오사무가 부모가 되고 싶었던 것처럼, 아키에게는 서로의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처럼. 그리고 반대로 쇼타에게는 자신을 이끌어줄 아빠가 필요했던 것처럼, 린에게는 자신을 아껴줄 엄마가 필요했던 것처럼. 각자의 필요로 인해 이들은 가족이 되었던 것일까?


린은 더 이상 엄마가 옷을 사 줄 테니 오라는 말에 순순히 오지 않는다. 엄마가 아파할 것 같아 예전에 노부요에게 했던 것처럼 그리고 노부요가 그랬던 것처럼 살을 맞대지만 돌아오는 것은 오히려 냉랭한 반응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린은 뛰어내리려고 했던 것일까? 쇼타가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신이 속한 환경을 새로 정립했던 것처럼 린도 그러길 바랐던 걸까?


<이제 그만> 노래를 들으면서 후기 작성했다. 노래 가사를 다시 보니 오사무가 떠올랐다. 더 이상 아빠가 될 수 없는 오사무. 쇼타가 탄 버스를 잡으려 달렸던 장면에선 가사처럼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이 흩어져 날아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쇼타가 나지막이 그를 아빠라고 불렀듯이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이 흩어져 날아갈지라도 아주 조금은 그들의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들이 가족이었던 순간들이 마음속에 남아 새로이 마주할 세상을 다시 힘차게 살아낼 수 있길.


우리는 이제 우리가 아닌걸
알아가고 있었어요
담겨있던 우리의 시간이
모두 흩어져 날아가요.

그만그만 이제 그만
이제 조금씩 흐려지네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게
오늘도 달려가고 있어요

이제 그만, 김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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