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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디에도 없는 사람 Nov 10. 2021

글로벌 스탠더드 같은 소리 하네

#왜나만영어못해

#영어없는세상에서살고싶었었다


          중국어권 나라에 살면서, 사실 중국어보다 나를 수시로 압박한 건 영어였다. 그 나라에 사는 동안 받은 영어 스트레스 혹, 영어 수모를 여기서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영어에 대한 압박은 어퍼컷, 레프트 훅, 조르기, 메치기 시도 때도 없이 치고 들어와 응급 상황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니 나는 중국어를 공부하러 왔는데, 대체 왜 영어한테 이렇게 시달려야 돼?


현지 사람들도 외국인인 내가 중국어를 잘 못 알아듣고 하고픈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마음의 준비가 된 듯 너그러웠는데, 영어를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물러설 수 없다는 듯 의아해했다. 유럽 친구들은, 세계 공용어, 글로벌 스탠더드인 영어를, 어렸을 때부터 모두가 배워온 유일한 외국어 하나를 넌 왜 못 하니라고 묻는 듯했다. 의무 교육을 못 받기라도 한 거야?라는 듯. ‘우씌, 나 대학까지 나왔다고!’


          그렇다, 다른 나라에서는 의무교육을 받고, 더군다나 고등교육을 받았다면 당연히 자연스레 구사할 수 있는 언어를, 나는 입도 뻥긋 못하고 알아먹지를 못하는  영.알.못 신세였다. 첫 해외연수를 갔던 그 해부터 나의 영어는 어휘와 듣기부터 차근차근 나아지기 시작했다. 아니, 나아질 수밖에 없었다. 해외 생활에서는 영어권 국가가 아니더라 해도, 대부분의 공문서가 영문이었고, 외국인으로 살아가려면 영어 능력은 생존을 위해 필수였으니까.


          나의 초창기 영어는 먼저 대학 전과 후로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대학 전까지는 수능 네 영역 중에 외국어 영역을 가장 좋아했고 성적도 좋았다. 영어 과외도 꽤 다녔고 아이들 성적을 혁명적으로 올려놓기도 했다. 돌아보면 이 시절의 영어도 실은, 듣기와 읽기만 괜찮고, 회화와 쓰기 방면으로는 별로인 절름발이 영어였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는 중국어를 전공하면서 자연스레 영어와 평행 노선을 걷게 되었고, 사회에 나오고 나서 영어를 쓸 일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 한국은 영어 한 마디를 제대로 못해도, 불편함은커녕 밥 벌어먹고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사회인 것이다. 한류니, K-pop이니 한국 대중문화가 전 세계를 휩쓸고,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글로벌 시대라고는 하지만, 저기 외국과의 교역 최전선에서 뛰는 몇몇 분들 말고는 다들 영.알.못으로 한국어만 쓰면서도 잘들 살고 있는 것이다.


어학연수를 하던 첫 해에, 체감한 영어 충격이 제일 컸다. 어학연수 동안 자주 어울리는 친구들 무리가 대부분 고급 중국어 구사자들이었음에도, 영어가 중국어보다 편한 친구들이 많았다. 영어 모어자, 영어권 거주자 혹 영어권 유학파 등 바이링구얼(이중 언어 사용자)들이었다. 심지어, 이 그룹에는 3개 언어 이상을 사용하는 멀티링구얼(다중 언어 사용자)도 꽤 되었다.


자칫 방심하면 금세 이 무리는 영어로 빠르게 수다를 떠는데, 나는 맥락도 파악하지 못해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며 진땀을 뺐다. 위기에 처할수록 연대해야 할 동족은 쉽게 눈에 띄는 법이다. 미주, 유럽 친구들은 대부분 영어를 사용하는 데 익숙했고, 아시아에서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애들까지도 영어를 꽤 잘했다. 영어가 제일 꽝인 두 나라는, 한국, 일본이었다. 막그도나르도[1] 친구들과 내가 같은 수준의 영어라니. 좌절이다 정말. 나랑 일본 친구는, 아이들이 영어 판을 벌이면 ‘얘네 또 시작이네’ 하는 눈빛을  교환하며 서로 멋쩍어져 먼 하늘만 바라보곤 했다.


어학당 선생님들도 내가 자신의 말을 잘 못 알아들으면 영어로 다시 설명하려 들었다. ‘그러면 더 못 알아듣는다고요! 선생님ㅠㅠ’ 일석이조랄까, 덕분에 중국어뿐 아니라 대응되는 영어 단어나 표현이 무엇인지 절로 익히게 되는 부수적 효과가 있었다.   


나의 과도기 영어는 다시 대학원 입학 전과 후로 나뉜다. 대학원 입학 조건 중에, CEFR[2] B2 이상의 영어 성적이 있었다. 영.알.못.인 내게 또 하나의 시련이 닥친 것이다. 당시 나는 대학원 입학에 매우 필사적이었다. 입학 전형 마감이 코앞에 닥친 까닭에, 나는 3일 간 그때 잠시 머물던 친구 반지하 방에서 두문불출한 채 토익 문제집 한 권을 다 풀고 고사장에 들어갔다. 시험 시간이 모자라, 읽기 지문 2개는 읽지도 못하고 내리찍었던 기억이 난다. 하늘이 도왔는지, 나는 턱걸이로 B2성적을 받았고 무사히 입학 지원을 할 수 있었다. 한 번의 토익 시험은 하늘이 도울 수 있었지만, 대학원 입학 이후의 영어 폭격은 하늘도 도울 수가 없었다.


수업 전에 읽어가야 하는 수많은 자료, 논문이 다 영어였다. 15년 가까이 의절했던 영어는 마치 아무리 때려도 죽지도 않는 좀비 같았고,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나를 향해 적토마를 타고 달려오는 적장 같았다. 중국어 자료도 아직 벅차서 빨리 읽지 못하던 그때에, 생각지 못한 영어 스트레스까지 엄습하자 가슴 깊이 울분마저 느꼈다. 왜,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나. 대학원 가기 전에 영어 공부해야 한다고.


그 당시의 영어 실력으로는 수업을 따라가기에 무리였다. 결국 나는 첫 학기에, 수업 자료가 100% 영어인 수업 하나를 중도에 포기했다. 여러 날 밤을 새워 읽어도 수업 전에 완벽하게 소화해서 갈 수가 없었기에, 부족한 지금의 실력을 인정해야 했다. 어떨 때는 영어가 중국어랑 짬짜미를 하고 합으로 나를 괴롭힐 때도 있었는데, 가령, 영어 자료를 읽고 중국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는 경우였다. 물론, 교수님은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해도 된다고 하셨지만, ‘그건 제게 옵션이 아닙니다, 교수님.’


미국 친구랑 언어 교환도 해보고, 대학원 영문과 기초 수업도 들어보았지만, 대체 나의 영어는 어디서부터 다시 손봐야 할지 모를 정도로 불균형이 심각했다. 읽고 듣는 것은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지만, 가장 기본적인 말하기가 원점에 있었다. 영어권 친구들이 나를 많이 도와주려 했지만, 아는 건 많은데 말을 하지 못하는 이 병신 같은 상황을 다들 안타깝게 지켜보다 떠나갔다. 자구책을 찾아야 했다. 나는 일단, 쉴 때 영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한 권씩 격파해나갔다. 그리고 영드, 미드를 영어 자막으로 보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대사나 문구는 따로 메모해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꺼내서 외웠다. 학교 공지사항 등 중문과 영문이 같이 제시된 경우에는 영문을 먼저 읽어보려 했다.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이 되자, 예전만큼 영어가 무섭지 않아 졌다. 지난 4년간, 나의 영어는 얼마큼 달라졌을지 궁금했다. 논문 파이널 심사가 끝나고 난 여유 시간 동안 아무도 그러라고 하지 않았지만, 호기롭게 자비로 토익 시험을 신청하고 보러 갔다. 4년 만에 들어선 토익 시험장. 꽤나 긴장을 했다. 외국에서 토익을 보니 낯선 것이 꽤 되었다. 시험이 시작되자, 세상에, 듣기가 쏙쏙 다 들리잖아? 읽기는 마지막 지문까지 다 읽고 답을 체크하고 나자, 시험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땡 울렸다. 어머, 나 만점 받으려나 봐. 웬일이야. 룰루랄라 김칫국을 여러 사발 ‘드링킹’하며 발걸음도 가벼웁게 집에 돌아왔다.


그래서, 이 영알못의 고생은 토익시험 만점으로 막을 내렸는가? 세상은 그렇게 플롯이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다. 나는 고작 4년 전 시험 점수에서 40점 밖에 오르지 못한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그 일로 심한 낙담에 빠졌다. 듣기 영역에서만 45점이 올랐고, 읽기 영역에서는 심지어 5점이 떨어진 아이러니. 나는 그리고 며칠 뒤, 서점에 갔다. 이 책 저 책 아무리 뒤져봐도, 내 회화 수준은 왕초보였다. 뭐여, 왕초보라니! 이 책을 들고 계산대에 가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계산대에 계신 저분을 두 번 다시 볼 게 아니니 결국 사서 돌아왔다. 그리고 교재 표지에 ‘왕초보’ 글자 위에 큰 스티커를 붙였다. 그렇지 않으면 지하철이나 버스, 카페에서 도저히 이 교재를 꺼내지 못할 것 같았다.


나의 처절한 영어 도전기는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영어 공부를 한다. 듣고 말하고 또 말한다. 다음엔 말하기 영역이 있는 토익 스피킹이나 아이엘츠를 볼까. 기초를 닦은 후, 다시 영어 말하기 모임에라도 얼굴을 내밀어봐야겠다. 코로나가 끝나서 해외에 여행이라도 가게 된다면, 이렇게 연습한 영어를 하나씩 다 시험해볼 거다. 대체 언제쯤이면 이 지긋지긋한 글로벌 스탠더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실은, 이제 영어를 쓰고 공부하는 게 약간 즐거워졌다고 하면 너무 변태 같나?


      

[1] 맥도널드의 일본식 발음.

[2] Common European Framework of Reference for Languages. 유럽연합 공통 언어 표준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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