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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um Jun 20. 2023

원형의 가변

나는 예술이 인간의 굳어진 관념과 편견이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해 해체되면서 재창조하고 인간 본연의 형태를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감각으로 공감될때 무엇인가가 변하고 회복하고 그로부터 흘러 세상에 선한 잠재테로 기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시대와 사회는 인간이 만든 사회의 엄격한 제도와 관습같은 울타리의 범주에서 대립되는 기준으로 요구하는 것이 많은데 그로 말미암은 결핍과 어그러짐의 경험이 일상이었던 수많은 차이와 모순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고민하면서 나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고 존재의 뿌리를 찾는데 관심이 많았다. 고정되고 경직된 무엇인가에서 벗어나고 탈피하는 것, 부정적 소망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무엇인가를 다시 창조하는 것 긍정적 소망이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성과 감성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공감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일상의 미학 팝아트를 탄생시킨 스즈키의 선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난 예술은 선이며 선은 가변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선은 변하려고 하는 의식을 가시화하는 것을 의식하는것이 개념화 되지 않을때 언어화할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무의식적으로 고통을 겪는 시간 또한 선이다. 그것이 창조적인 의식을 낳는다고 본다. 주체와 대상과의 만나는 교집합 영역에서 (교차점)구심점들을 조형언어로 풀어 놓은 것이다. 두 영역의 필연성에서 확연하게 보여지는 의도가 아닌 타자로 하여금 재단 될 수 없는 연속성으로 표현해야한다. 주체의 우연적인 저항과 다른 주체나 대상이 가지고 있는 외부의 우연적인 저항이 만났을때 진동하는 파동은 보이지 않는 실상에서 보이는 실체로의 울림이다. 주체의 권력화가 아니라 타자와 비대칭으로 매개되었을때 질서가 되고 공명가운데 흐르는 울림에서 가시화되는 과정인 것이다. 울림은 표면적으로 변화를 하고 내면적으로는 무한을 지향하고 있다. 무한은 일정한 범주로 규정되어진 본질이 아니고 생명 이전과 죽음 이후의 상태를 존재하게 하는 무한이다. 의식이 생명에 존속되듯이 본질은 무한에 종속된다. 무한에서 오는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정신(Geist)은 가장 실제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자 힘이다. 감각적 아름다움이나 유희, 현실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성적 존재로서 정신의 자유롭고 무한한 가능성을 감각적으로 현실화 시키는 활동이다. 창조주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인간의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정신인 것이다. 자연이라는 대상을 비자연적 정신으로 추출하고 이를 감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사유와 감각을 매개한다. 자연속 정신이 외형이 아닌 내면의 것과 매개할때 감각이 작용하여 물질이 된다. 보이지 않는 실상이 보이는 실체가 되는 과정에서 정신과 함께 자유적 의지나 힘은 울림을 흐르게 한다. 아우라는 이 정신과 자유로 생성된다. 자연과 인간은 찰나의 고유의 아우라로 현실화시킬때 예술과의 일치를 이룬다. 그와 더불어 사회에 기여하는것이 창조이다. 절대정신이 물질화되어서 점점 진화해서 다시 절대정신으로 돌아가는 정신인 것이다. 개인의 주관적 정신과 공동체의 객관적 정신이 종합될때 절대정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


레비나스는 <전체성의 관념보다 무한의 관념이 우위에 있으며 타자를 맞아들이는 환대로서의 주체성 속에서 무한의 관념은 비로서 완수된다> 타자를 외재성이며 그중에서 대타자는 신이고 소타자는 사회적 약자이다. <무한성으로서의 타자는 나의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윤리의 대상 섬김의 대상이다. 상처입을 가능성 있는 연약한 감성만이 바로 그 명령을 들을 수 있는 윤리의 근원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다>


이 시대는 공감으로 이해하고 자유의지로 스스로를 변화할때 혼돈하는 세상에서의 회복과 창조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모든 고통은 관념이 굳어질때 생기는 것이다. 예술에서는 굳어지는 부분이 타락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을 해체하는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 예술의 메시아라는 것이다. 문제의 고통을 직시하는 문제의식을 바라보는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존재한다고 보는 매개 작용에서 일어나는 실재나 상황이 현실적인 일상 등을 의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감각과 체험을 통해서 대상과 하나가 될수도 있지만 이것을 통해서 본질을 정화시키는 상태로 객관적인 작용으로 볼수도 있다. 나의 작품은 레비나스와 스즈키의 철학을 바탕으로 미학적으로 해석하고 조형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근간은 삶의 한 부분에서 생성되어졌다. 이 작품은 쓰레기가 대상화된 복합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나의 가정은 아버지의 정신적인 분열증으로 인한 가정의 어그러짐으로 가족들이 불안과 우울이 많았다. 나의 친할머니와 삼촌 나의 아버지, 2세대 2명이 되물림된 저장강박증으로 살아가는 가족들의 실체를 봤을때 20대의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혼란과 두려움으로 트라우마로 남게되었다. 그들 중 나의 아버지는 지성인의 삶을 추구하는 명문대 법대를 졸업하고 타의 모범적인 삶과 더불어 그 당시 독재 정권에 맞써 저항하는 정의를 구현하려는 사람이었지만 결국 가족들과 본인의 삶 조차도 황폐하게 만들었다. 고통의 종류 중에는 스스로 죄를 지어 만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죄책감을 동반하는 것이라 양심이 살아있는 자에게는 평생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난 고통은 심연을 동반한 또 다른 죄라고 생각한다.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 사람한테 준다는 뜻인 고통의 총량의 무게가 무거웠다. 죄로 인한 심연을 경험하는 처절함을 겪어봐야 알게되는 나의 연약함과 나약함을 위로하기 보다는 나를 자책하면서 살아가야 함으로 날 죽이고 살리는 선과 악을 존재케 하는 대상을 찾아 끝없는 터널속 탈출구를 만나기를 희망했다. 난 이런 환경에서의 건강한 삶의 지향점을 찾기 위해 선택한 것은 가족과의 단절과 동시에 한계가 있는 인간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위로와 사랑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생명 이전의 존재에 대한 근원에 대한 의문으로 사유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다. 인간의 사랑은 페르소나적이고 위선적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본질의 탐구를 하게 되었다. 난 보이지 않는 세상 속 관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조악한 영과 가장 선함의 전운의 고조됨에 언제나 그랬듯 선함으로 고취시켰다. ‘세상은 그렇고 그럴 수도 있어’라고 누군가는 뜻 모르는 동정으로 불쌍하다 여길수 있지만 가여워 할 수 있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신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세상을 만든 보이지 않는 실상은 실체가 되기 전 끊임없는 전쟁을 하지만 짙은 농도의 선은 악을 이긴다고 믿는다. 난 농도가 진하고 심연보다 깊고 우주보다 넓은 선을 바라본다.

<“우리는 우리 안의 에고의 특성인 부정적 결과를 맞이하면 과거의 결과를 수정하지 않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계속 부정적인 결과만 나오는 길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몰입 상승효과 부른다>

아버지의 부재는 일상이 되었고 당신의 선택으로 가족이 없는 고독함을 택하신 것이다. 난 가장은 있지만 가장의 울타리 부재로 인한 가족들이 받을 적대적인 적막함을 무시하기로 한것이다. 아버지의 에너지는 가족들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주머니 속 칼로 변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 무소식으로 살아가도 되는 그런 가족이었다. 나의 존재는 순리에 거스르는 책임을 회피한 선택으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은 그저 우주를 있게한 완전한 존재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해야하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때론 나의 자아를 양도해야만 성장할 수 있는 고통에 감사해야 하는 아이러니를 바라보게 하고 나의 성향과 상관없이 거슬러 순종해야만 하는 순수한 의지도 바라보게 하였다.

하이데거는 말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사고를 한다. <아무리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해도 나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세상이 없으면 나도 없다. 주변 세상은 내 안으로 들어와 있다.”>

나를 갉아먹는 여러 감정들을 관조를 한다. 새로 경험하는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들은 이성과 수많은 감각으로 채워져야 하는 공간들을 차지해서 읽고 보고 판단해서 보관해야 하는 곳을 잠식하기 시작할 때면 잠시 쉼호흡을 하고 감정 덩어리가 감정의 골을 만드는 심연 속으로 밧줄을 타고 내려가 본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의 근저에는 내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어 나오지 못할까 봐 나를 구해주는 조커를 밧줄로 만들어 나를 묶는다. 나의 건강을 해치는 감정들은 나를 부정해야만 하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어서 곧 세상의 PARADOX에서 줄타기로 팽팽하게 만들었고 그 주위에서 비관적이지만 분석적이고 합리적이지만 긍정적인 경계선을 언제나 타고 있었다. 때(상황)를 상기하면서 세상에서의 인간의 존재는 불완전하고 모순으로 똘똘 뭉쳐져 있는 그런 존재라고 터부시 되는 과정을 겪는다고 들여다보고 끄집어내는 과정을 관찰한다. 진정한 자아와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어른 아이는 내적 갈등이 갈증을 해소하는 대상을 찾아 헤매는 그런 결핍 덩어리로 30대 초반 난 독일행을 결심하고 반도피 반도전으로 유학의 길에 몸을 싣는다. 난 독일의 창의적인 사고방식을 배우면서 내 삶을 수정해야 한다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고, 이방인의 삶에 도전해보리라 결심하고 아니 이렇게라도 도피를 하게 되는 것을 도전이라고 또 나의 탈로 희석시켜버린다. 하지만 내면은 언제나 나를 찾고 싶어 하기만 하였다. 가치는 자신의 의지로 성장시킬 수 있고 그것이 열매가 맺을 때 좀 더 의미가 있으니깐 말이다. 타국에서의 삶은 때론 나로 하여금 상대의 비뚤어진 시선을 쓰다듬을 수 있는 관대함을 배우게 하고 포용하게 하고 더 지각 있게 훈련시킨다. 어떤 형태에서 오는 대립과 갈등이 있는 벼랑 끝은 때론 전쟁터이다. 몸이 상하거나 정신이 온전하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는 건 그만큼의 시간들을 견뎌왔고 새로운 기쁨과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철저한 외로움과 고독의 벼랑 끝에서 순간의 여유를 배우기도 하고 이성적으로 고립된 생각에서 오는 감정에서 벗어나려는 또 다른 인격수양을 한다. 전쟁터에서 나의 자아를 지켜야 한다는 발버둥과 아우성으로 버틴다. 이방인이란 다른 나라에서 오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는 하나 내포된 의미는 이질감이 동반된다. 난 고향에서도 가정과 사회에서도 이방인으로 소외감을 느껴봤기 때문에 이질감에서 오는 묘한 경이감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문화에 익숙할 때까지는 새로운 사람들의 대접을 누려도 된다는 안도감이 경이감보다 앞섰다. 이런 표면적인 친근함이라도 달아날까 봐 난 새로운 것을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혼자만의 시간으로 잠시 들어가지만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나를 해치지는 않겠다는 안도감이 나의 육감을 곧 풀어헤쳐버린다. 그러다 나의 말을 경청해주는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과 사고를 전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림이나 작품과 함께 전달하는 건 나를 격앙되게 하면서 살아있게 만들었다. 작품이 또 다른 나이기도 하지만 벌거벗겨 버린 내가 세상에 다 보여줘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내 안의 에너지가 점차 크다는 의미이므로 세상에 이로운 존재로서의 또 다른 기쁨이 나를 황홀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힘과 의지가 나로 하여금 흘러 멈추지 않는 것은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썩어져 버린 나의 상처를 심폐 소생하여 살리기라도 하듯 난 나를 해치지 않는 법을 담담하게 습득하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삶에서의 이방인의 이질감을 즐기기로 하였다. 한국에서의 이질감은 상처를 동반한 내면에서의 거추장스러운 두려움이 나의 후미진 감각의 구석까지 스며들어가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무단히도 페르소나 같은 탈을 쓰면서 진실을 외면했었다. 독일 사람들의 나와 다르게 생긴 것에 대한 이질감은 독일 사람들의 올곧음과 철학적 깊이로 나를 바라봐주는 시선들로 나의 내적 갈등은 사라져갔고 원활한 소통으로 유창하지 않은 말솜씨에 귀를 기울여주면서 나의 작품을 바라봐주는 관대함과 관심으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의 순수미술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난 여러 한국인 유학생들과의 예술적 담론의 소통의 관계에서 동화도 어려움이 많았다. 난 철저하게 나의 감각을 자유롭게 해주는 독일식 창의적 시간을 나의 잠재테를 끄러올려 줄것이라고 믿고 나의 사유체계에만 집중하고 관찰해보았다. 예술의 세계는 경이로우면서 오묘하다. 작품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소통의 연결고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곧 나의 잠재력과 간헐적으로 몰려오는 괴로움들은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언제 튀어나올지 괴로움 때문에 나의 영혼의 발자취에 쇄기를 박아버린다는 심정으로 에너지의 근원인 사랑 그 자체인 대상을 경외하게 되었다. 온전히 흡수시켜 버리는 느낌으로 나를 내려놓는 온 감각적인 자율 행위는 그것으로 언제나 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빛을 쫓아가는 길은 협박이 아닌 회유와 거친 형태가 아닌 회복에서 오는 사랑을 사유한다.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끊임없는 선(인내와 연단)과 악(슬픔 또는 고난에서 부딪히는 부정적인 형태)을 맞부딪혀 약한 자의 마음으로 이끌려 간다. 악은 선을 이기지 못함을 굳게 믿고 있음을 언제나 의식한다.

독일에서 시작된 제로웨이스트 rrr(Reduce:쓰레기 줄이기, Reuse:재사용, Recycle:재활용)운동으로 쓰레기로 인한 지구 온난화와 기후 위기에 현 시대 문제 의식을 모티브한 작품이다. 이것은 소재로 쓰인 접착제와 함께 표층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접착제는 다시 심층적 의미(가변)와 포층적 의미로 나누어 진다.

이 작품은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젯거리이자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쓰레기’가 대상화되었다. 작품에서의 쓰레기를 형상화한 형태는 접착제가 도포하면서 조명이 비춰 반짝거린다. 작품을 보는 타자들은 감상하면서 순간적이지만 자연을 연상할 수 있는 그림에 아우라를 느끼게 되지만 잠시뒤 가까이에서 보는 접착제에 희미하게 비치는 쓰레기들을 마주 대할때 붕괴를 겪는다. 대상인 쓰레기와 소재인 접착제는 작품에서의 표면적인 원근법을 직접 나타내기 보다는 타자의 참여를 유도한 원근법을 공간에서 시선의 대비를 주어 관점의 전환을 추출하였다. 이 작품을 통해 아버지와 쓰레기의 강박이 주었던 압박감으로부터 해방을 찾았다. 관조할 수 있는 인간의 영역에서 끄집어낸 쓰레기들과 나의 자율성을 가두어 놓은 쓰레기의 형태를 접착제 안에 나열시켰다. 이것은 채움으로 인한 내면의 비움이다. 결핍으로 인한 혼돈으로 작가의 내적인 필연성과 요구하는 시대정신의 저항포인트가 만나면서 굳어진 물질은 매개하는 작용과 매개되는 존재가 다시 존재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무한을 조명한것이다. 또한 쓰레기를 대상화하여 인간이 경계해야하는 관념이 가변적인 준거영역을 함축하는 접착제를 사용해 그 물질의 변색으로 퇴색되어가는 과정을 조형화한 개념미술 작품이다.


산업혁명 이후 플라스틱의 대량생산은 존재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물건으로 인간의 삶에 견고하게 고정화 되었는데 접착제는 대상을 체계적으로 범주화시키고 고정된 의미로 파악하게 하는 인간의 지성을 이용해 다른 한편의 사회적 아우성을 굳게 만드는 고정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시그니처라고 볼 수 있다. 경직된 관념이나 ’고정화‘적인 언어나 태도는 나와 타자를 울타리 쳐서 식민화시켜 경계를 세우고 고유의 기능이 상실되면서 파편적인 불협화음으로 나타난다. 혼란의 시대에서의 이런 실체들이 추구하려는 더 이상의 아우라는 가짜이다. 제로웨이스트 운동을 모티브한 작품으로 접찹제를 사용해 재구성하면서 왜곡된 생각과 근시안적인 인간의 실태를 반추하는 메세지를 담고 있다. 형태를 일정한 크기로 평면화하면서 색과 선으로 묘사후 굳어지면 표면이 보일수 있는 접착물질을 각각의 형태위에 도포하면서 질감을 나타내었어요. 이 질감으로 인해 조명의 각도에 따라 표면의 형태들이 반짝이는 상태로 보이는데 멀리서 감상하면 마치 빛나는 자연을 연상하며 아우라를 잠시 느끼겠지만 가까이에서 보는 실체는 아우라의 붕괴를 느끼게 되는 우리가 쓰다버리게 되는 쓰레기를 보게되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이 이 작품의 첫번째 포인트이다. 그리고 나의 생각들을 일기처럼 써놓은 글자들을 캠퍼스에 다양한 색으로 프린팅하였다. 글자들은 보편적인 진리와 앎(지)을 개념화하는 작용이다. 굳어진 접착제와 빛을 받으면 천천히 바뀌는 접착제 변색의 과정은 매개하는 작용과 매개되는 존재가 다시 존재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무한(절대정신)을 조명한것이다. 절대정신이 물질화 되어서 진화하는 과정에서 퇴색되어진 관념이나 이념이다. 식민지나 폭력을 유도하는 사상의 표상인 지성이자 제도, 질서이다. 도포된 접착제는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진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시간에 따른 변화는 지속적인 의식으로 시간안에 종속되는 것이다. 접착제는 빛을 받으면 접하는 색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색이 변하는 것은 공감과 포용의 메타포이다. 실제의 문제를 접착제의 색이 변색되어 바뀌면서 무가치와 사라짐을 산출하면서 해체를 강조하고자 한다. 그로 인해 카오스의 가장자리에서 자기조직화가 이루어져서 혼돈에서 창조가 일어난다. 변하는 색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타자(대상)를 의미하기도 알수 없는 무한을 의미하기도 한다. 접착제의 변색은 허무주의적인 해체가 아니라 타자를 포용하고자 하는 섬김으로, 죽음을 파괴가 아닌 다른 이데아로의 지향의 경계를 바라보게 하면서 앞으로 변하게 될 물질을 환대하고 포용하자는 원형의 가변성을 현재 시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물건을 붙이는 고정하는 접착제를 사용해 인간이 경계해야하는 관념이나 실체를 지향하는것과 동시에 가변적인 준거영역을 함축하는 접착제와 그 물질의 변색으로 물질의 자연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언어를 통해서 소통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인식된 세계가 있고 보이지 않는 실제 세계에는 우리가 붙잡을 수 없는 그런 신비한 세계가 있다. 양자 물리학에서는 하나의 파동과 같은 상태로 존재하는 우주는 진공 상태고 파동만 존재한다. 텅 비어 있는데 파동이 시스템화가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개체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 개체도 붙잡을 수 없이 계속 변해가고 있다. 우리의 인식은 하나의 통일체로 세계를 이해하려고 고정된 것으로 붙잡으려고 한다. 언어를 만들어 어떤 움직이는 존재에 이름을 붙여서 개념화시킨다. 존재는 동사적이지만 우리의 인식은 명사적이라고 본다. 결국 인간은 만들어 놓은 협소한 인식에 갇혀 있는 한계를 언제나 느낀다. 거기에 갇혀 있는 인간은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다시 보이지 않는 실제 세계를 느끼고 싶어 인식의 확장이 이루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그런 고정된 갇혀 있는 그 상태를 지속하기 때문에 하나의 감옥 같은 상태로 되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노력은 실제와 가까이 가고자 하는 실제와 일치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래서 실제와 일치된 그 상태가 곧 종교적 이상, 우주와 합일 또는 신과의 합일된 상태, 직관적 느낌을 통해서 협소한 인식의 세계와 신비한 실제 세계의 간극을 좁혀주는 상태를 타자로 하여금 이 작품이 지향하는 것이다.




고통을 동반한 실제의 문제는 무가치와 사라짐을 산출하면서 해체가 모호하게 기능한다. 창조는 카오스의 가장자리에서 자기조직화가 이루어져서 혼돈과 함께 모호하게 생긴다.   삶과 예술과의 모호한 경계에 따른 변화는 지속적인 의식으로 시간안에 종속된다. 나와 타자는 모호하고 규정지을수 없는 시간, 마치 해와 달사이의 보이지 않는 실상을 환대하고 포용하는 실체로 현재 시점에서 해석되어지고 연속된다.

이 작품의 포지션은 신표현주의 작품이다. 알레고리적인 심층 의미와 표층 의미가 분리된 이 작품은 분열증적이고 복합적하고 다층적인 저항포인트를 함축한다. 화용론적 관점에서 볼때 지칭되어진 속성의 자율적 변화로 고의적이든 고의적이지 않든 찰나의 순간에 머무르지 않는 순수 의식을 깨워 인간 본연의 원형의 존재가 어떻게 변화하고 창조되어가는가를 의식하게 될것이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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