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MBTI 유형은 ADHD

ADHD 진단을 받았다. 어쩐지 기뻤다.

by 토리


1. 나는 왜 이렇게 덜렁거릴까?


올해 초의 일이다. 그 무렵 나는 지독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이직한 직장의 동료들은 너무나 근사하고 훌륭한 사람들이었고, 가르치는 학생들도 성실해서 나무랄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가는 게 영 팍팍하게만 느껴졌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내 자신의 문제 때문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지 3년, 이 업계에서 일을 한 지는 5년 차에 접어 들었는데도 나는 실수투성이였다. 피해를 보는 것이 나 혼자였다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동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언제나 무언가를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렸고, 가르치는 것 이외에도 온갖 서류 작업을 해야 하는 직장 환경에서, 나는 소위 말하는 '구멍'이 되고 말았다. 바로 그 사실이, 참을 수 없는 자괴감에 빠져들게 했다. 좋은 동료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장 뛰어나진 않아도 무난한 동료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도 내가 아주 덜렁거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직장인이 되고부터는 꾸준히 수첩(디지털이든 실물이든 간에)에 메모를 했고, 내 휴대폰 바탕화면의 달력 위젯에는 언제나 스케줄들이, 가장 사소한 것부터 가장 중요한 것까지 가릴 것 없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곤 했다. 출퇴근 시간과 수업이 시작하고 끝나는 시간, 회의가 시작하는 시간을 비롯해 온갖 '시간'을 알람 설정해놨고, 그러고도 좀 걱정이 되어서 포스트잇 따위로 눈에 보이는 곳마다 할 일을 써 붙여 놓곤 했다.


그래도 나는 계속 덜렁거렸다. 절망적이었다.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나는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걸까? 나는 구제불능인 걸까? 또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엄습해 올 즈음에 나는 문득 인터넷 너머에서 '성인 ADHD 자가 진단' 리스트를 발견했다. 총 18개 문항이 있었고, 놀랍게도 한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에서 '매우 그렇다'를 선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것은 '뭐, 다들 이렇게 사는 거 아냐?'라고 안일한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절실했다. 스스로와 자가진단에 대해 얼마쯤 불신하고 있으면서도 정식 진단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그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 또한 ADHD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였다.



2. ADHD 검사를 받으러 가다


나는 집 근처의 신경정신과를 찾아갔다. 의사 선생님에게 내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내가 회사 생활을 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는데도 자꾸 실수를 하고, 그럴수록 너무 자괴감이 든다고. 내가 우연히 자가진단을 했는데, 아무래도 ADHD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내게 몇 가지 질문을 늘어놓았다.


"어릴 적에 산만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으셨나요?"

- 대놓고 산만하진 않았는데 아주 어릴 땐 수업 중에 교실을 돌아다니거나 해서 엄청 많이 혼이 났어요. 좀 더 커서는 혼자서 사부작 사부작 뭔가 엉뚱한 걸 하곤 했고요. 가령 낙서를 한다든가... 아니면 그냥 몽상에 빠졌죠.


"혹시 시간 약속을 지키는 것이 힘드시나요?"

-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가장 못하는 것이 그거예요. 미리 준비한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마지막에 뭔가 다른 할 일이 떠올라버리거나, 계획한 대로 나간대도 제 시간에 도착하는게 당최 쉽지 않아요.


"그럼, 혹시 집 상태는 어떠신가요?"

- 항상 어지러워요. 한달에 한번 정도는 싹 몰아서 치우긴 하는데, 남들 눈에는 그게 그다지 정돈되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길을 잘 잃어버리시나요?"

- (이 사람 사실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 무당 아냐?) 네, 맞아요! 저는 심각한 길치예요. 지도를 보고 가도 정반대 방향으로 가곤 하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언제나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걸 탔죠. 내 생각엔, 지하철이나 버스를 보면 우선 타고 봐야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인 거 같아요. 횡단보도도 마찬가지고요.


"퍼즐 같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게임을 좋아하시나요?"

-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게 그렇게 머리 쓰는 게임이에요. 평소도 힘들어 죽겠는데, 즐기기 위한 게임에서조차 그렇게 머리쓰는 일을 하고 싶진 않아요.


"혹시 가만히 앉아 있는 게 힘드신가요?"

- 음, 좀 그런 편인 같아요. 가만히 앉아 있으면 좀이 쑤셔서요. 허리가 아픈가?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니 허리가 아프지 않을 때도 언제나 손을 꼼지락거리거나 다리를 떨거나 아무튼 그랬어요.


... ... 선생님은 이런 식의 몇 가지 질문을 늘어놓았고, 나는 거의 모든 질문에 그렇노라 대답했다. 그는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검사를 하지 않아도 ADHD이신 거 같긴 한데, 그래도 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ADHD 같다고 이야기한 사람은 그 선생님이 처음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내가 정말로 ADHD인지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chimps.jpg?quality=75&width=982&height=726&auto=webp CAT 검사를 받는 나는 흡사 이런 모습에 가까웠다.

그 길로 CAT라는 '종합주의력 검사'를 받았다.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면서 각종 도형 따위에 맞춰 버튼을 누르는 테스트였는데, 나는 과연 이것이 내 집중력의 정도를 얼마나 측정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단순한 과제 같아 보였고, 내가 그것을 못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인간의 오만은 운명에 의해 쉽게 좌절되는 법이다.



3. 축하합니다, 중증 ADHD이십니다.


ADHD 받아 보면서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선생님은 열 몇 페이지 남짓한 보고서를 훑어 보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테스트에서는 약 7가지 다른 영역의 집중력을 확인하는데요, 토리(가명) 씨께서는 그 중 4개 영역에서 저하가 나오셨어요."

"어... ... 어느 정도 심한건가요?"

"이 정도면 중증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 나는 중증 ADHD였던 것이다!


그제야, 그 동안 내가 왜 그렇게 산만했는지, 왜 내 교과서나 학습지 한 귀퉁이에는 의미불명의 낙서들이 가득했으며 왜 다른 사람의 말은 그토록 지루하게만 느껴졌는지를 깨달았다. 내 집중력이 형편 없었으니까!


이 진단을 받고 나서 한결 명쾌해진 기분이 들었다. 지난 30여 년간 내가 왜 이 모양이었는지를 드디어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원래 글러먹은 사람일까봐 너무나 초조했는데, 내 산만함과 덜렁거림의 원인이 어떤 장애에 기인하고, 이 장애라는 것은 약물과 인지 치료를 통해 어느 정도 호전될 수 있는 것이었다. 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게 된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었다!


저하가 나타난 4개 영역은 '단순선택주의력(청각)', '억제지속주의력', '간섭선택주의력', '분할주의력'이었다. (그밖의 몇 가지 영역에서 '경계'가 나왔지만 이것에 대해 논하지는 않겠다.) 말이 어렵지만 쉽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나는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다. 여러 소리 중에서 내게 필요한 청각적 자극에 집중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나는 또한 어떤 일을 일정하게 지속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가령, 의자에 오래 앉아서 어떤 일을 한다든가, 하나의 책을 오래 붙잡고 있는 것은 내게 정말 곤혹스러운 일이다. 다음으로, 나는 내게 주어진 수많은 정보 중에서 내게 필요한 것을 선별해 내는 것이 어렵다. 예를 들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들이 함께 놓여 있다면, 나는 머리로는 해야만 하는 일에 먼저 손을 대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곤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멀티태스킹을 전혀 못한다. 대중 가요를 들으면서 일을 한다든가, 여러 사람과 동시에 소통해야 하는 상황은 나를 힘겹게 한다.


집중력이 없다는 것이 위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집중력이 없다는 건 알았지만 이게 ADHD 증상이었을 줄이야. 나는 선생님과의 약간의 상담을 더 이어갔고, 선생님은 가장 저용량의 약부터 처방해주겠노라 했다. 다행히 중증 중에서는 상당히 증상이 약한 편(그러니까 상태가 안 좋긴 한데 엄청 안 좋은건 아니고 좀 안 좋다는 것 같다.)이라서 금방 효과를 보일 것이라고 했다.


약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고, 가족들과 오랜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밝혔더니 반응은 "어쩐지 네가 너무 뭘 잘 잊어버리더라."와 "너 전혀 그렇게 안 보였는데 의외다." 라는 2가지로 나뉘었다. 나 자신도 내가 그런 줄 모르고 서른 해를 살아왔으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내가 ADHD임을 모르던 시대가 저문 것이다. 내게는 약이 있었고, 내가 ADHD라고 말해도 나를 이해해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다. 약효는 나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또 이야기해보겠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아주 효과는 좋은데 심장이 벌렁거리지는 않는 커피'를 마신 기분이었다. 마법처럼 내 모든 실수가 사라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전보다 훨씬 빠르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약을 먹고 출근한 첫날에는 직장 동료와 대화할 때 '이 사람 말 언제 끝나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곤 스스로의 모습에 놀라워 하기도 했다.


지금은 진단을 받은지 벌써 8개월 가까이 지났다. 나는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있고, 업무 능률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일을 잘하게 되니 자괴감이 드는 일도 적어졌다. 여전히 실수는 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졌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덜 불안해졌다. 일할 맛이 났다.


ADHD는 30년 동안 나와 함께 했고, 나는 ADHD를 가진 채 너무 오래 살아와서 내 성격을 이것에서 완전히 분리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우울을 받아들였듯이 ADHD 또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나는 ADHD다. 환자라고 말하지 않겠다. 이것은 나를 나타내는 또다른 특성이기 때문이다. 내 뇌에서는 남들보다 신경전달물질이 덜 분비되지만, 그래서 때때로 사회생활을 할 때 난감해질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이며, 나는 내가 생긴 바대로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적응해 나갈 것이다.



아, 참고로 말하자면, 내 MBTI는 INTP~INFJ다. 그때 그때 달라진다는 소리다.



+) 혹 ADHD 자가 진단을 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아래 링크를 확인해 보라. 이것이 절대적일 수는 없겠지만 참고할 만한 자료는 된다.

https://www.jongno.go.kr/health/info/self/checkList.do?menuId=4741&menuNo=4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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