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토리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리 Sep 18. 2023

[SICFF 데일리] 잊지 못할 어느 나바호의 여름날

영화 <빵떡 소녀와 나>

감독: 빌리 루터  (나바호, 호피, 라구나 푸에블로 아메리칸 원주민, 감독 겸 제작자)

출연진: Kier TALLMAN, Charlie HOGAN, Sarah NATANI, Martin SENSMEIER, Kahara HODGES

시놉시스: 애착 인형 이름은 제프 브리지스, 애정하는 밴드는 플리트우드 맥. 감수성 넘치는 베니와 똘똘한 사촌 돈의 특별한 우정





혹시 그런 적 있는가?


너무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어느 날 돌연 조부모님의 손에 떠맡겨지거나 하는 일 말이다. 이것은 필자 개인이라든가 한국에서만 공감을 얻는 국지적인 경험은 아닐 것이다.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어머니의 어머니에게 맡겨지는 경험은 인류가 가부장제를 따르기 이전 시절에서부터 오래도록 전해져 내려왔을 것이므로.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의 대리로 가장 적합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또 다른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더듬어 올라가면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할머니 집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엄마 없는 그곳은 마냥 낯설기만 하고, 그들의 살뜰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겉도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그런 순간. 엄마는 나를 버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고립된 것만 같고 막연한 불안감이 휩싸였던 어린 나의 모습 같은 것들. 명절에나 가끔 보는 할머니는 가족이면서도 가족이 아닌 것 같고, 나를 닮았으면서도 닮지 않은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필자에게는 할머니집에 맡겨지던 그때의 기억이 어렴풋하면서도 강렬한 한 장면으로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아주 개인적인 방식으로 나의 뿌리와 마주치게 되는, 일종의 문화 충격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구 반대편, 1990년의 어느 나바호 땅에서도 이와 그리 동떨어지지 않은 경험담이 펼쳐진다.



1. 나바호의 길 잃은 어린양


나바호(아메리카 원주민 중 미국 남서부에 뿌리를 둔 한 부족)의 후예인 베니는 어느 날 황량한 나바호 들판에 다다른다. 베니는 정말이지 그런 시골 구석에는 머물고 싶지 않았지만 이혼을 앞두고 정신없을 엄마에게는 오래전 떠나온 고향 말고는 달리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할머니와 황량한 들판의 어느 낡은 집. 이 집 자식들(그러니까 삼촌과 이모들)은 죄다 고향으로부터 도망쳤다는데 유일하게 하나 남아 자리를 지킨 삼촌은 심술 맞기만 하고 가끔 오는 이모는 영 소문이 나쁘다. 양들을 가두는 울타리는 허구한 날 망가진다. 부모님의 이혼 소식은 자꾸만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데, 하필 수중에는 샌디에이고로 돌아갈 39달러가 없다.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아오던 땅에서 소년은 자꾸만 겉돈다.


바로 그즈음에, 동병상련의 처지인 소녀가 나바호 집에 도착한다. 그의 이름은 '새벽(Dawn)', 어쩐지 가족들 사이에서는 본명보다도 '빵떡 소녀'라는 애칭으로 잘 알려진 사촌이다.

빵떡 소녀는 여느 십 대들과는 다르다. 교도소에 간 삼촌 대신 할머니의 품에서 자라다시피 한 그는 나바호의 전통을 할머니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나바호 방식으로 머리를 길러 묶고 영어를 할 줄 알면서도 나바호 말을 고집하는 그에게서는 백인들의 삶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은 할머니의 완고함이 묻어난다.


록밴드와 파우와우(아메리칸 인디언의 연례 축제 행사)만큼이나 다른 삶을 살아온 베니와 새벽은 한솥밥을 먹으며 그 황량한 시골땅의 유일한 친구가 된다. 양을 잃어버리고 삼촌 차를 훔쳐 타고, 그 양을 다시 되찾아와 울타리를 제대로 고치는 법을 알게 되는 사이, 베니는 미처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고향, 조상들의 삶에 대해 배운다.


그는 여전히 나바호어는 모르지만 양 목장 울타리를 고칠 줄 알고, 엉터리 지라지만 전통적인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출 줄도 안다. 백인의 샴푸가 아니라 나바호의 방식으로 머리를 감고 길게 기른 머리에 지혜가 흐른다는 것도 알게 된 베니는 그 여름날 나바호에 갓 발을 디디던 베니와는 사뭇 다른 사람이다. 소년의 눈에 드리우던 방황의 그림자는 가시고 얼굴에는 미소가 꽃핀다. 마침내 뿌리 뻗을 곳이 어디인지 깨달은 사람처럼.



2. 어떤 문화의 전승

이 영화는 한 어린 소년이 그의 방황과 상처를 딛고 일어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그러한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는 나바호라는 생소한 공간을 배경으로 함으로써 색다름을 선사한다. 실제로 나바호이자 호피, 그리고 푸에블로의 후예인 감독 빌리 루터는 그의 유년 시절을 이 영화에 담아내고자 했다고 하는데,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진솔하게 담아낸 장면과 장면들이 백인들의 사회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던 아메리카 원주민, 그중 나바호의 후손들의 삶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영화 속의 나바호들은 어쩐지 위태로워 보인다. 베니의 삼촌과 이모, 엄마에게 나바호는 그리운 고향땅이면서 도망치고 싶은 가난의 터전이다. 원 주인을 몰아내고 백인들이 세운 자본주의의 제국에서 나바호의 방식은 이질적이고 '돈이 안 된다.' 그래서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살아온 자들의 후예이면서 바로 그 땅을 떠나 배회하는 방랑자가 되고, 그들은 원주민이면서 이민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산다.


나바호 문화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만 같던 베니가 외할머니와 사촌, 그리고 다른 친척들을 만남으로써 나바호들의 삶을 배워가는 이 이야기는 그래서 더 뜻깊다. 나바호들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전승될 테니까. 할머니의 양탄자와 그에 담긴 이야기들을 전수받은 손주가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 시절 나바호에서 여름날을 보낸 '베니'는 필름을 베틀 삼아 그 옛날의 이야기를 새겨 넣었지 않나. 나바호 할머니가 들려주는 어느 고집스럽고 지혜로운 전통의 단편은 스크린과 스피커 너머로 오래도록 이어지리라. 바다 건너, 나바호가 아닌 또 다른 손주들의 입을 통해서.






09-17(일) 20:00 - 21:29

롯데시네마 은평 7관

매거진의 이전글 [SICFF 데일리] 생각하는 아이들, 생각하는 학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